수필

화려한 외출

류귀숙 2013. 6. 8. 20:14

     <화려한 외출>

 "애 우리 둘이 놀러 갈래?" 라는 전화가 친구에게서 걸려 왔다.

 난 흔쾌히 허락했다. 그냥 9시에 만나 어디든지 떠나 보자고 의논했다.

 판에 박힌 일상의 답답함과 지루함이 일시에 몰려와 한 번쯤은 일탈의 즐거움을 맛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 좋은 계절에 가족에게서 벗어나 화려한 외출을 해보자.'

 남편이나 딸에게는 적당히 둘러대고 과감히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20대 소녀 때에 더러 해본 일탈의 스릴이 다시 살아나 전날 밤은 잠도 설쳤다.

 마음은 벌써 날개 달고 과거로 날아가고 있었다.

 여름휴가 철만 되면 그동안 저축한 적잖은 돈을 움켜쥐고 부모님께는 요리 연수에 참여한다느니, 서예 하러 간다느니, 하면서 핑계를 댔다.

 떠날 때는 '걱정 말라'는 쪽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10여일 넘게 방방곡곡을 여행했었다.

  그때도 가장 마음에 맞는 단짝과 단 둘이서 부부처럼 떠났는데 청바지에 T샤쓰 하나 걸치면 족했다.

 가다가 버스를 만나면 버스를 타고, 트럭을 만나면 손을 들어 트럭을 세웠다.

 이때는 풋풋한 젊음을 간직한 소녀 때라 트럭이든 자가용이든 손만 들면 O.K였다. 심지어는 직행이 서지 않는 작은 정류소에서도 경찰을 동원해서 직행버스를 세운 적도 있었다.

 두려울 게 없고, 그칠 것이 없어 발 가는대로 내달았다.

 차비 아끼려고 대전 발 밤기차 호남선을 탔었는데, 그게 군용열차였다. 민간인 객차가 몇 칸 있고, 군인 칸이 몇 칸 있는 그런 열차를 타본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재미로 추억삼아 타보는 열차이지만 거기에는 차비를 아끼려고 초저녁부터 역사에 죽치고 앉아 12시가 넘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서민들이 많았다.

 멋모르고 차비도 아껴보고 밤기차의 낭만을 느껴보자는 친구의 말에 선뜻 동의는 했지만 그 차에 오르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발을 놓을 자리가 없어 한쪽 발은 들고 있었는데 옆에 선 힘센 총각이 무리들을 밀치고 겨우 발 놓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는 20대 소녀라 가는 곳마다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차 안을 맴도는 노동자들의 땀 냄새는 머리까지 어지럽게 했다. 지금 이런 차를 타라고 하면 누가 타겠는가?

 옛 부터 자식을 잘 기르려면 여행을 시키라고 하지 않던가? 여행을 통해서 자신감을 기르게 됐고, 서민들의 애환도 느낄 수 있었으니, 돈만 낭비하고 싸돌아다닌 것은 아니다.

 밤늦은 시간에 타지에서 숙소를 잡기가 미덥지 않으면 경찰서나 파출소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이런 기발한 생각이 나왔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낮선 곳에서는 민중의 지팡이를 자주 활용했다. 이때 경찰관은 우리를 데리고 직접 여관을 알선해 주면서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여관주인도 특별대우를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집적대는 주정뱅이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했다.

 그 당시는 그래도 순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부모님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해는 제주도까지 날아갔었는데  풍랑을 만나  때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직장엔 무단결근을 하게됐다. 직장 상사에게 호되게 야단맞고 시말서(始末書)도 썼다. 그리고 아버지의 불호령으로 얼마간  외출 금지를 당했다.

 그 때는 그저 집 떠나는 게 좋았고, 한여름의 태양을 온 몸으로 받으며, 산으로 들로 쏘다니면서 좁은 국토를 아쉬워했다. 그때 만약 해외여행이 자유로웠다면 지구촌 곳곳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을 막을 자가 없었다. 부모님의 굴레는 그저 뒷전으로 날려 버리면 그만이다.

 '설마 죽이기야 할까' 하는 배짱으로 간 큰 짓을 마다않았다.

 그일을 요즈음의 친구들에게 애기하면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자신들은 70년대에 밖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단다.

 하기야 지금의 내 딸이 그때의 나 같은 행동을 한다 하드라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정말 천둥망아지처럼 쏘다닌 그때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제 60대 소녀가 되어 하루 동안의 일탈을 꿈꾸는데도 그 옛날 못지않게 즐겁다.

 가벼운 발걸음은 절로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고, 약속 장소에 나타난 친구 역시 상기되어, 소녀같이 싱그럽다. 오늘만큼은 20대의 정열로 마음껏 내달아보자고 두 손 맞잡았다.

 닥치는 대로 경주행 버스를 타고는 깔깔대고 웃으며 떠드는 모습이 수학여행 가는 학생 같다.

 경주시내에서는 역사 현장을 구경하고, 또 시장구경을 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었다.

 보문단지에 들어서서는 시원한 바람 따라 호숫가를 거닐며 친구와 마주보고 웃고, 또 웃고, 친구를 모델 삼아 사진을 찍었다.

 친구를 꽃 속에 앉혀놓고 찍고, 수양버들 가지아래 세워놓고 찍고, 갖가지 포즈로 찍고 또 찍었다.

 꽃 속에 앉은 친구의 모습은 꽃 보다 더 화사했다. 그러나 내가 찍은 사진을 확인한 친구는 "난 너를 잘 찍어 줬는데 넌 왜 이렇게 찍었니?" 하며 핀잔을 주었다.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인 것을......

 한참을 실랑이하던 우리는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욕심이 너무 많았지?" 라고 말하는 친구의 얼굴이 쓸쓸해 보인다.

 '100세를 살자면 아직 40년이 남았잖니?'라고 내가 위로했다.

 마침 석양이 서쪽하늘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들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친구와 나도 거울 앞에 섰다. 폭풍이 지난 뒤의 고요처럼 착 가라앉은 마음으로 조용히 거울을 본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오늘따라 생경하다.

 둘이서 손잡고 석양을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남은 인생을 바라봤다. 아직도 남음이 있는 값진 인생인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러나 보람되게 걸어가자고 굳게 약속했다.

 돌아오는 길에 황남빵 사 들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창밖으로 비치는 노을도 우리와 한마음이 되어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