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디에
<행복은 어디에>
어린 시절 '파랑새'라는 동화책 속에서 '미치르와 치르치르'를 따라 파랑새를 찾아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멀고 먼 여정에서 파랑새는 찾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찾았을 때 파랑새는 바로 내 집의 새장에 있었다. 그 때의 씁쓸함이란.....
그때의 생각으론 '그 귀하고 신비롭게 생긴 파랑새가 자기 집에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또 여고 시절엔 풍부한 감성으로 명시 집을 품에 안고 다니며 친구끼리 돌려 보기도 하고 예쁜 색깔의 종이에 직접 적어 친구에게 선물도 하고 그랬다.
지금이야 카톡으로 모든 걸 공유하고, 전송하기도 쉽지만 그때 그 아날로그 방식이 더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읽고 또 읽으며, 외우다시피 한 시 중, 독일 시인 '칼 부세'의 시 <저 산 너머>라는 시가 생각난다.
산 너머 고개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아- 나는/ 남 따라/ 찾아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 왔다네.
산 너머 고개 너머/ 더욱 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이렇게 어린 시절에서 청년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행복을 쫓아다녔다.
그러니까 행복이란 인간이 추구 할 최종 목표이며 인생 자체가 행복 찾아 나서는 긴 여정인 것이다.
지금 인생의 중간 지점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서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넌 행복하냐?'고
글쎄.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과연 며칠? 아님 몇 년 정도 행복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난날은 행복했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 있겠으나, 지금 현재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며 앞날은 불안하다.
그럼 타인에게 " 넌 행복하냐?"고 물어 보면 어떨까?
글쎄 대부분은 행복하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그들은 부족한 몇 가지를 들먹이며 '이것만 해결되면, 돈 만 좀 더 여유 있다면, 자식이 좀 더 잘됐으면, 건강했으면' 이라고 말할 것이다.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라면 모든 게 갖추어졌더라도 앞 날 즉 죽음에 대한 원천적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행복은 손에 잡힐 듯하나 놓쳐버린 신기루와 같은 것인가?
이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막연했던 행복의 실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얼마 전 미국 작가 '린다리밍'의 "부탄을 가다."라는 책을 통해 행복 찾는 길라잡이를 삼고자 한다.
작가는 인도와 티벳의 중간에 위치한 고산 지대인 '부탄'이라는 나라에 매료돼 그곳 남자와 결혼까지 하면서 그 나라에서 보고, 듣고 , 느낀 점을 담담하게 써 내려갔는데, 나에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나라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문화가 굉장히 뒤떨어진 곳이다. 우리나라의 1950, 60년대로 보면 아마 엇비슷한 환경일 것이다.
교통이 불편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통신 시절도 최악이라 전화 한번 걸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스마트폰 세대인 현재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한 동네에 전화기가 한 대 뿐이고 담당자를 통해야만 전화를 걸 수 있단다.
상수도 시설이나 전기 시설이 빈약해 세탁기도 돌릴 수 없는 곳이다.
이 외도 많은 악 조건이 도시리고 있는 나라임에도 행복지수는 세계8위라니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그들의 마음엔 행복이, 그들의 행동엔 친절이, 또 그들에겐 앞날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러니 행복지수가 높을 수밖에.....
그럼 무엇이 그들에게 행복을 갖다 주었을까?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들은 우리들과 행복찾는 길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행복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부, 자신의 정신 세계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것은 치르치르와 미치르, 칼 부세의 시에 나오는 인물처럼 먼 곳을 바라보고 헛된 꿈을 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파랑새가 집안에,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아차린 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락을 추구하지 않았고 물질에 욕심을 두지 않았다.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는 내생에 희망을 걸고 현실의 어려움을 잘 피해갔다. 그들은 불교 국가로 '윤회설'을 믿었기 때문에 현재의 불만은 '먼 미래인 내생에서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어려운 일도 여유롭게 풀어 나갔다.
작가는 말한다. '행복이란 정신적인 것이며 스스로 추구해야 되는 부분이다'고 그리고 그 방법으론 포기하기, 물 흐르듯 내 버려두기, 밀어내기, 벗어버리기 등이 있다고 한다.
황금만능주의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들의 현실을 볼 때 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풍요 속에서 자살률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도 내면세계를 보지 못하고 치르치르와 미치르 처럼 파랑새를 찾아 먼 곳을 헤매었던 것이다.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파랑새를 찾으려다 좌절하고, 우울증에, 불안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불특정 다수인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분화구를 뚫고 폭발하여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애 키우기도 무섭고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악다구니 같은 현실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들을 멀찍이서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는 자가 지구 저 편에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부럽다.
우리말에도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지 않는가? 물질의 욕망을 한 절반쯤만 내려놓는다면, 외부의 유혹과 충격을 조금만 더 멀리 밀어낼 수 있다면, 좀 더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행복 찾는 길을 잘 못 들어섰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뉴-턴 할 수 있다. 그게 오히려 지름길인 것이다.
나는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 중 종교를 가져 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라고 본다.
그것만큼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