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일을 예비하는 자

류귀숙 2013. 8. 29. 11:55

        <내일을 예비하는 자>

이불 보따리, 옷 보따리, 산더미처럼 이고, 지고, 어린아이 데리고, 힘겹게 떠나는 피난 행렬이다.

 요즈음은 특별히 역사드라마가 대세라, 방송사마다 앞 다투어 역사 드라마 경쟁이다. 같은 방송사에서조차도 동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부엌일을 하면서 얼핏얼핏 흘겨본 화면에선 임진왜란 당시의 피난 행렬이 재현됐다.

 피난 이야기라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했던 6.25전쟁 때의 사연을 부모님을 통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T V에선 선조임금 재임 시 일어났던 임진왜란 때의 내용이다.

 참전해야할 병사나 피난 가는 백성들 모두가 힘겨운  일이지만, 내 눈에는 어린 것 데리고 피난 보따리 이고 진 민초들의 아픔이 더 진하게 와 닿는다.

 눈은 두려움에 질려있고 발걸음은 방향을 잃고 휘청거린다.

 백성들을 책임질 임금조차도 우왕좌왕하는 신하들에 싸여 갈피를 못 잡는다.

 겁에 질린 임금과 신하들은 드디어 몽진 계획을 세워 백성들을 외면한 채 어가를 평양으로 돌린다.

 굴욕! 굴욕이다! 이 처참한 굴욕을 피할 수는 없었던가?

 선각자들은 이미 일본의 전쟁 준비를 눈치 채고, '10만 양병 설'을 주장하며 앞날에 대한 대비를 경고했다. 그러나 임금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은 같은 대상을 보고도 상반된 주장을 했고, 임금은 김성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임금은 전쟁 위험이 전혀 없다는 김성일의 주장을 채택하게 된다. 김성일은 정말 전운을 보지 못했을까? 혹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었을까?

 귀에 거슬리는 말에는 귀를 막았고, 좋은 말만 들었던 어리석은 지도자로 인해 삼천리는 초토화 되고, 백성들은 지리멸렬되지 않았는가?

 "왜 진작 검사 받지 않았소? 작년에만 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의사의 말이다.

가족 건강과 경제를 책임진 나의 잘못이다. 피난 길 떠나기 전 초조한 얼굴로 허둥대던 임금의 모습이 꼭 내 모습 같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해보는 대장내시경 검사 받기를 남편에게 권하지 않았을까? 용종을 떼어냈느니, 어찌 물을 먹고 검사를 했느니, 하는 무수한 말들을 귀를 막고 듣지 않았을까? 물론 나도 검사 받지 않았고 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의 건강 무관심과 오만으로, 언젠가 시동생이  "형님 허리둘레가 만만찮은데요. 건강 검진은 받고 있나요?" 라는 말도 귓전으로 흘려버렸다.

 이제 대장암 선고를 받고 보니 밀물처럼 후회가 밀려온다. 호미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이젠 온 몸으로 막아내야 한다.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놓쳐 버리고 이렇게 에둘러서 그 어려운 수술을 받고서야 한시름 놓게 됐다.

 지금 때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터진 봇물을 막느라 바싹 긴장하고 있다.

 예방하고 예비하는 일에 서툰 나는 그 흔한 감기 예방주사 한 번 맞은 적 없고, 건강식품도 애써 외면했다. 그런 나이기에 식구들도 무방비 상태에 놓아두었다.

 한발 늦게 인터넷 뒤적거려 건강에 좋다는 채소랑 과일 버겁게 사 들고 오는 길에 한 여름 뙤약볕이 나를 조롱한다.

 온 몸을 땀으로 씻고 돌아오는 길은 과일 무게만큼  발걸음이 무겁다

 중국의 명의 '편작'은 전국시대 사람으로 그의 세 형제가 모두 의술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유독 그만이 가장 유명했다. '위문 왕'이 그 이유가 궁금해 편작을 불렀다.

 위문 왕: 그대의 삼형제는 모두 의술에 정통한데 도대체 누가 가장 훌륭한가?

 편작: 큰 형님이 가장 훌륭하고, 둘째 형님이 그 다음이고, 제가 가장 못합니다.

 위문 왕: 그런데 왜 그대가 이름이 나 있는가?

 편작: 큰 형님은 병세가 나타나기 전에 치료합니다. 사람들은 형님이 사전에 병의

        원인을 뿌리 뽑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분의 명성이 전해질 방법이 없지

        요. 그저 우리 집안의 사람들이나 알 뿐입니다.

 위문 왕: 음! 그대의 큰 형이 가장 훌륭한 의사로군!

 편작: 그렇습니다. 둘째 형님은 병의 초기에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이

        가벼운 병만 치료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분의 명성이 사방 백리에만 소문이

        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병세가 심해졌을 때에야 치료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경맥 위에 침을 놓아 피를 뽑으며, 피부에 약을 바르는 등, 큰

       수술을 하는 것을 보고, 저의 의술이 훌륭하다고 여겨 명성이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위문 왕: 그대의 말이 훌륭하군! 그건 나에게 병 치료 원리만 알게 한 것이 아니라오.

 이런 이야기를 우리의 위정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천막을 치고, 장외 투쟁을 하고, 가시적으로만 내닫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먼동이 희붐하게 트면 남편과 아침 운동을 한다. 산책로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 운동을 한다.

 미래의 건강을 예비하는 자들은 조용하면서 힘찬 발걸음으로 하루를 연다.

 돌아오는 길엔 무거운 책가방을 멘 학생들의 종종걸음과 만나게 된다. 또 신문배달 아저씨, 우유배달 아줌마, 거리를 여는 청소부도 만나게 된다. 이들 모두가 아침을 열고 있다.

 여명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움직이는 군상들 속에 끼어 나도 걷고 있으니, 덩달아 힘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