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동행>
돌담이 집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어 꼭 성을 쌓은 것 같다. 둥근 성 안에는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 잡은 나지막한 초가지붕이 보인다.
지붕 위엔 보름달 같은 박 덩이가 뒹굴고, 정다운 고샅길에선 두런두런 사투리가 구수하다.
삽살개 꼬리 치며 쫄랑쫄랑 가는데 알 낳은 암탉 대신 장 닭소리 요란하다.
고개 들어 위를 보니 단풍잎 사이로 감 홍시도 보인다. 긴 장대 둘러메고 감 따시던 아버지와 감나무 밑에서 홍시 기다리던 어린 동생 생각난다.
저녁연기 따라 걸어보는 고샅길엔 정다움도 따라 간다.
돌 담 위 누렁이 호박은 맛 자랑 덩치 자랑 발걸음 잡는다.
가마솥에 호박죽 끊여 온 동네 나눠먹던 그 인심 오늘로 되돌리고 싶다.
마당 한 쪽에 놓여 있는 절구통에서도 찰떡 치는 소리 쿵덕쿵덕 들리고, 맷돌 돌려 두부콩 가는 소리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사랑방엔 둘러 앉아 새끼 꼬고, 멍석 짜던 아저씨들 보인다.
달 밝은 밤이 오면 앞 동네 처녀와 뒷동네 총각이 들판을 오작교 삼아 만났었지.
굽이굽이 골목길 돌아 동구 밖에 나오니 술래 잡고, 깡통 차던 옛 친구 생각난다.
마을 앞 은행나무 굵기도 하구나! 그 나이 알 수 없으니, 올망졸망 매달린 은행에게나 물어볼까?
울컥 치미는 그리움 삼키며 성곽에 오르니 마을이 한 눈에 잡힌다.
정다운 초가지붕 나지막한 돌담 길, 그 옛날 고향 길이 여기에 있구나!
낙풍루(樂豊樓) 높은 누각에 오르니 승냥이 떼 지키던 장군들의 숨소리 들린다.
즐거움이 머무는 이 낙안 읍성(樂安邑城)에서 과거와 동행해 본다.
가을의 손짓 따라 남도라 순천만을 찾았다.
단풍보다 더 고운 옷을 입고, 가을의 상큼함을 가슴으로 안으며 부부 팀이 모처럼 나들이 길에 들어 섰다.
'정원 박람회'가 열리는 순천으로 가자고 마음을 모아 순천만에 들렀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박람회가 끝났으니 입장할 수 없단다. 지난 번 '경주 박람회' 때는 기간이 지나도 입장 할 수 있었기에 그것만 믿고 갔더니, 이번엔 아니었다.
발길 돌려 순천만 갈대숲에 오니 하나하나 뜯어보면 별 것 아닌 모습이나, 군락을 이루니 그 또한 장관이다. 개인 보다 단체가, 작은 수 보다 다수가,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갈대숲의 멋스러움은 꽃들의 아름다움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육지 깊숙이 바닷물을 맞이한 순천만 갯벌에서는 더 넓은 갈대밭이 조성돼 있었다.
세상 때를 벗기고 가을을 즐기려 찾아간 남도에서 그간의 잡다한 군더더기를 벗기는 계기가 됐다.
순천만 전망대를 찾아가는 야산 길에서 소나무 숲의 힐링을 받으니, 속의 병들이 치료되는 소리가 들린다.
아래를 굽어보니 넓은 갯벌과 탁 트인 바다가 향긋한 내음을 선사했고, 들판의 황금 물결은 풍년을 알려 왔다.
점심으로 먹은 꼬막 정식에 짱뚱어 탕은 남도의 특 미라 한껏 기대했는데, 얄팍한 상술 때문에 바가지 썼다 생각하니 맛도 제대로 안 났다.
돌아오는 길에 시골들판 길을 달려 낙안읍성을 찾았다.
몇 백 년 전의 과거 속에서 내 어린 시절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의 내가 옮기는 이 발걸음이 하나 되어 마을길을 돌고 또 돌았다.
이름부터 즐거움과 평안이 깃든 낙안읍성(樂安邑城)! 그 옛날의 정취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이곳을 찾게 된 것은 행운이다.
옛날모습 그대로의 초가집, 성곽, 누각, 동헌(東軒), 객사(客舍)등을 원형에 가깝도록 보존하려 애쓴 노력이 돋보인다.
지금도 108세대 279명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다니, 우리 문화 전통을 이어 가려는 의지에 고개가 숙여 진다.
세월을 뛰어넘어 어린 시절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정서와 맞아 떨어지니, 오늘의 발걸음을 '과거와의 동행'이라 이름 지어도 좋을 듯싶다.
고샅길을 돌며 갖가지 체험 장 앞에서 셔터를 눌러대며 옛 추억에 젖었다.
우리의 건축 양식인 초가는 이제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 추억의 초 집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하회 마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정다움이 여기 낙안읍성에서는 느낄 수 있었다.
고을 원님이 집무하시던 동헌(東軒)과 객사(客舍)를 둘러보고 지방 관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사전에 준비가 있었더라면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여러 체험을 하면서 과거와 확실하게 동행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년여름엔 애들 데리고 와서 옛날 체험을 시키고 싶다. 떡치기, 제기차기, 한지공예, 천연 염색 등의 여러 가지 체험 중에서 감옥 체험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손자들에게 감옥 체험을 해 보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대가 된다.
내 자식 세대들은 무척 생소하고 신기하게 여기겠지? 그러나 노년에 접어든 우리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 과거와 현재가 하나 될 수 있었다.
현대인이 과거의 전통과 동행하여 수 백 년 전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 곳 낙안!
이제 고향의 어린시절이 그리울 때면 찾을 수 있는 안식처가 생긴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다시 돌아갈 고향이 있어 넉넉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