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 가는 길
<요양원 가는 길>
쾌속정 타고 가듯 빠른 세월에 얹혀서 한 해를 보내고 설날을 맞았다. 한 살 더 먹기를 손꼽아 기다릴 때는 몰랐다. 바람처럼 휘달리는 세월의 빠름을...
가속 페달을 밟은 발을 멈출 수도 잡을 수도 없다. 두 눈 부릅뜨고 막아보지만 그것은 어느새 지름길로 와서 귀밑에 서리만 남겼다.
한 살이 포개진 설날 아침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온몸이 나른하다. 이젠 내 나이를 말하라면 입만 달싹대고 소리는 기어들어 간다.
교자상 펼쳐놓고 온가족이 둘러앉아 웃음꽃 피워낸다. 품에서 흩어졌던 피붙이들의 정이 곰살갑다.
어린 손자 앞세우고 세배하는 자식들. 내가 드리던 세배를 이젠 내가 받는 위치에 왔다. 쌈지 대신 빨간 봉투 속에 빳빳한 새 돈 넣어 손자에게 건넨다. 세뱃돈 받은 손자가 까르르 웃음으로 답한다.
어릴 적 할아버지 쌈지에서 나온 곰삭은 세뱃돈이 정겹게 다가온다. 검버섯 활짝 핀 할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얼굴에 왜 검은 점이 많아요?" 라고 물었을 때 "이게 저승꽃이란다."라시던 할아버지가 그립다. "저승에서 피는 꽃은 왜 검은가요?" 꼬치꼬치 묻는 손녀에게 '저승 꽃 피면 저승 갈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시던 할아버지의 어둡던 얼굴이 눈앞을 막는다.
인간은 태어나면 걸음마로 시작해서 그 먼 저승 길 향해 한 발짝씩 다가서는 것이든가? 어릴 때는 아장 걸음이니 천천히 가더니만 나이가 포개지니 속도도 따라 붙는다. 또 한 해가 갔으니 그 곳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간 것이다.
시아버지 형제분이 여섯 분이신데, 오형제는 바삐 떠나고 막내 삼촌만이 미련을 놓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계신다.
요즈음엔 마지막 귀착지인 그 곳으로 가기 전 거쳐야할 곳이 한 곳 더 생겼다.
저승 길 가는 길도 연수(硏修)를 거쳐야하나 보다. 요양원이란 간판 달고 회원 모집에 열을 올린다. 아들, 딸, 며느리, 심지어 아내까지도 마지막 길 외면하니 어쩔 수 없다. 도살장에 끌려가듯 자식들 자가용 타고 그곳으로 향한다.
한복 곱게 입고 애들 앞세우고 작은 집으로 세배 갔던 일이 어제 같은데, 올해는 오리털 파카 적당히 입고 요양원으로 간다.
정갈하신 작은 아버지의 카랑카랑한 훈계의 말씀 귀에 쟁쟁거린다. 우리 아이들 손에 세뱃돈 건네주시며 덕담하시던 그 모습, 그 위풍, 어디서 찾아볼까.
마지막 길의 문전까지 당도한 작은 아버지를 지금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 깔끔하시던 분이 공동생활을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다.
건강에 직격탄을 맞고도 의연히 버티시더니, 세월 앞에서는 맥을 놓으셨다.
요양원 간판 앞에 섰다. 머지않은 날 나도 이곳을 찾게 되겠지. 그 때의 내 모습이 희미하게 스쳐간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에 앉았던 노인들의 눈길이 문 쪽으로 쏠린다. 마주 보는 그들의 얼굴에선 말도 표정도 찾을 수 없다. 가라앉은 공기처럼 엉덩짝 바닥에 붙이고 앉아 눈만 멀뚱거린다. 그래도 거실에 나온 노인은 제 발로 걸을 수 있으니 이곳에선 우수생이다.
작은아버지는 침대에 나무토막처럼 누워계셨다. 지난 추석 집에서 뵈었을 때보다는 살이 좀 더 찌고 피부도 고왔다. 시신경이 작동하지 않은 지가 15년이 됐다. 15년을 장님으로 사시면서도 마음에 평정을 잃지 않던 분이셨다. 청각이 발달했는지 나를 대뜸 알아보신다.
'밖이 춥지 않느냐? 시간이 늦었으니 어둡기 전에 가야지.' 하시는 말씀마다 정이 묻어 있다.
나무 등걸 같이 누워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옆 침대의 노인 두 분도 작은 아버지와 비슷한 수준이라 꼼짝 않고 누워있다. 저승이 이곳인가 착각할 정도다. 군데군데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방안 공기를 휘저으며 작은 아버지께 가져온 음식을 드렸다. 손에 떡을 쥐어 드리니 맛있게 드신다. 방금 목욕했노라 자랑하시는 작은 아버지 얼굴이 아기 같다. 촉촉한 손 잡아끌어 손톱을 깎아드린다. 돋보기가 없으니 그 일도 쉽지 않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앙상하게 뼈만 남아 만지기도 안쓰럽다. 작은 아버지는 힘들다고 '그만하라' 하신다. 다정한 그 마음 그 목소리 예나 다름없는데, 육신의 쇠퇴는 앞장 서 달리고 있다.
죽음엔 변명도 불평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경우, 어떤 사람도 조용히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수명의 장단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항변도,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시시각각 죽음에 이르는 여로라는 생각이 든다.
옆자리, 옆 방 노인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죽음을 이웃해서 생의 여로를 걸어간다.
작은 아버지는 죽음과 이웃할 준비가 됐는가? 묻고 싶다. 또 막다른 인생길의 소감과 살아온 생에 대한 감회도 묻고 싶다.
죽음 앞에서 초연 할 수 있는 사람은 쉽지 않다. 사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인간사가 어디 있는가? '죽을 각오로 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눈을 감고 누워 계시는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평화스럽다. 모든 것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길을 가시겠다는 표정 같다. 그러나 조용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축복 아닌가. 이 때문에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아닐까.
작은 아버지도 슬하에 3남 1녀를 훌륭히 길러 냈다. 그 분이 뿌린 씨앗이 사회에서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는 큰 손자가 성형외과전문의 시험에 합격하더니, 올해는 작은 손자가 행시에 합격했다. 그 분의 희생이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몇 번을 더 만날 지 기약할 수 없으니 목이 메인다. 방금 목욕한 손잡으니 촉촉하고 따뜻했다. 이 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모쪼록 편안히 가시라고 마음속으로 기도 드렸다.
내일을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어쩌다 죽음의 숲길을 지나게 되어 옷자락이 어느 죽음에게 붙잡힌다 해도 두려워하지도 탓하지도 않고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나이가 가까워 오고 있다.
하루에 욕심 하나씩 버리고, 소유를 버리고, 집착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겠다. 살아온 인생 길 돌아보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정하나 남기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할까 보다.
요양원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무표정한 눈동자들이 등 뒤에 붙는다. 그들은 이제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겠지. 엘리베이터도 관계자 외는 작동하지 못하게 해 놓았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손으로 열 수가 없는 이승의 열쇠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이승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당당하게 그 길을 갔으면 좋겠다. 이승을 떠나면 더 나은 천국이 도래 한다 지 않은가. 천성을 향해서 가는 길은 기쁨으로 걸어가는 꽃길이라는 믿음 하나 붙잡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