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을 내고나서
<수필집을 내고나서>
내가 쓴 글귀들이 수필이란 이름 아래 오롯이 모여들었다. 올망졸망한 나의 작품들이 반짝이는 눈을 굴리고 있다. 자신을 선택해 주길 기다리면서....
이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산통도 감당해야 했다. 이런 저런 사연을 담고 있기에 그 가치 또한 자식들에게 버금 갈 정도로 귀중하다.
손아귀 가득 들어오는 두께만큼 가슴도 덩달아 뿌듯하다.
과거란 시간을 씨실로 삼고, 내 삶을 날실로 삼아, 수필이란 고상한 베를 짜기까지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온다.
녹슨 머리 이리저리 굴리며 얽히고 설힌 실타래를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어떨 때는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때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좌우명을 바라보았다. 그 글귀가 목걸이처럼 걸려 있는 한 중도 하차는 없다.
책 표지 앞면에 적혀 있는 작가 약력과 작가 사진을 본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인데 오늘따라 생경하게 느껴진다.
내 내부에서 도망쳐나가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와 마주한다.
생경한 모습을 한 이야기들이 다락에 올려놓은 책무더기 쏟아지듯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각자의 이름표를 단 75가지의 이야기들이.....
그 속에는 꽃피는 고향 산천의 이야기가, 부모 형제의 정다운 모습이, 가슴에 안긴다. 물장구 치고 소꿉놀이 했던 개울이, 나물캐던 들판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주렁주렁 감을 매단 감나무와 그 밑에서 감홍시 기다리던 동생도 보인다. 간간이 섞인 고통의 순간들이랑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간들도 그 속에서 자맥질하고 있다.
이미 이들은 나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이고 나를 통해 생명을 얻은 나의 분신들이다.
그동안의 수고가 보람으로 나타난 듯, 대단한 것을 해낸 듯, 우쭐대는 마음이 고개를 든다.
들뜬 마음으로 묘사 떡 나눠주듯 지인들에게 내가 만든 장한 책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시인인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지인으로부터 책을 기증받았다. 또 그 보답으로 자신의 시집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책을 내는 사람이 위대해 보였고, 그런 책을 받는 남편도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는 책을 내서 나눠주리라는 꿈 하나를 품기 시작했다.
새해 소원을 말하라면 수필집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 지가 몇 년 됐다.
이제 그 막연했던 꿈이 현실이 되고 보니 성취감에 도취되어 우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가 사인한 책들을 나눠주고 나니, 지금까지 빚으로 남아있던 짐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웃으로부터 또는 지인으로 부터 도움 받았던 일에 대해 갚을 길 없어 무거운 마음이 있었다. 그 보답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 안겨 줬으니 이만하면 족하리라는 만족감에, 짐 벗은 해방감까지 들었다.
그러나 책들을 나눠주고 돌아서는데 내 뒤를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따라붙는 것이 아닌가! 뒤 꼭지에 달라붙은 부끄러움 한 조각 떼어내려고 얼른 발길을 돌려본다. 내 속을 들킨 것 같은 민망함과 소중한 것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어느 순간엔 뒤 꼭지에서 나의 부족을 손가락질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장 불러 세워 이것도 글이라고 썼냐며 책망할 것 같다.
마음을 추스르고 한숨 돌리고 보니 이들의 탄생으로 인해 기뻐했던 마음, 허전한 마음, 쑥스러웠던 마음들을 모두 날려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들레 씨에 날개를 달아주듯 75명의 자식들에게 세상을 비상할 수 있는 힘찬 날개를 하나씩 달아주고 싶다.
이들이 날아가 어느 곳에 정착하든 그 곳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여 한 송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길 희망한다.
고향을 잃은 자에겐 고향의 포근함을 안겨 주었으면 좋겠다. 또 부모 형제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에겐 햇솜 같은 이불이 되어 외로움 한 자락 덮어주길 바란다.
상한 가슴에 다가가 위로를, 절망의 늪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주는 장한 꽃이 되어라! 뛰어라! 그리고 힘껏 날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