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무상(無常)

류귀숙 2014. 11. 3. 18:58

             무상(無常)

 깎아지른 담벼락을 담쟁이덩굴처럼 기어오른다. 등에는 세상을 지고, 고개는 하늘을 향한다. 한발 한발 내 딛는 발걸음이 아슬아슬 곡예를 한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깊이파인 상처는 가슴에 고이 쟁여두고 가야한다. 힘겹고 버거울 때면 모든 것 놓아버리고 싶다. 그때마다 자식이, 남편이, 한 가닥 미련이, 손에 힘을 준다.

 여명에 일어나 하루와 맞선다. 사람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쉼 없이 맴을 돈다. 두 손엔 삶의 고삐를 꽉 잡았다. 옆과 뒤는 없고 오직 앞만 있을 뿐이다.

 허욕의 강을 건너 이젠 평지에 이르렀나 싶더니, 이승의 동아줄 쉽게 놓아버린 한 영혼 앞에 섰다.

 육신의 고통과 삶의 무게로 무던히도 힘들어하더니만 그렇게 평화스럽게 떠날 줄이야!

 그 입엔 악다구니와, 그 눈엔 원망의 불빛을 시도 때도 없이 퍼붓더니 그 손 놓고 나니 화사한 얼굴이 소녀 같다.

 시 숙모님의 부음을 들은 건 낙엽이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던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한잎 두잎 떨어지던 그날 그분도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장례 날은 가을비가 추적거렸다. 그분의 인생길에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보다. 10년 세월을 요양원에서 보냈다. 처음엔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며 추한 모습까지 보였다. 또 얼마간은 고통스런 육신으로 자식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더니 최근엔 어린 소녀가 되어 팔딱거렸다. 노래하며 깔깔대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가슴엔 치매라는 이름표를 달고 요양원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젊은 시절엔 직설적인 화법으로 주위 사람들의 가슴을 할퀴고 후비더니만  말년의 모습은 오히려 좋았다. 순진한 눈빛과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보는 이에게 평안을 주었다.

 오늘 그분이 이 땅에 남긴 빚을 모두 청산하는 날이다. 쓰던 물건 입던 옷이 쓸려 나가고 한 점 남은 육신도 화마 속으로 사라질 찰나에 있다.

 화장장이라면 시신 타는 연기가 하늘을 덮고, 그 냄새가 무시무시할 것이라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발인 예배 마치고 슬며시 꽁지를 빼려다 시 백모님께 오달지게 잡혔다.

 큰어머니께서 "너희들이 화장장 오가는 길에 나를 좀 태워줘야겠다." 이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남편과 나는 겁먹은 얼굴로 따라나섰다.

 가로수로 서있는 은행나무의 재잘거림이 귓속을 간질인다. 또 눈 앞엔 공원이란 팻말이 두려움을 덜어준다. 공원 입구에 버티고 선 단풍나무에선 한창 붉은 물이 올라 금시라도 붉은 물이 떨어질 것 같다. 저 고운 빛깔도 며칠을 견딜까? 생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갔더니 맨 끝자락에 화장장이 있었다.

 깔끔한 건물이 꼭 관공서를 닮았다. 순번을 기다리니 망자의 이름이 호명되고 사진 속 망자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미소를 한입 베어 물고 있다. 저승의 문이 열리고 망자의 관이 빨려 들어간다. 한 줄기 불을 실은 바람이 휙 하고 불꽃을 몰아온다. 바람처럼 번개처럼 그렇게 한순간 저승의 문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승의 문은 닫혀버렸다. 그 분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

 궁금한 유족들 앞에 전광판은 알려주고 있다. '진행 중' 이란 멘트다. 남편을 수술실에 들여보내 놓고 초조한 시간을 보낼 때도 전광판은 '수술 중"이라는 멘트를 날려줬다. 화마 속에서 저승 길 가고 있는 그 시간 유족들은 무표정이다. 눈물도 말라버렸는지 눈물 흘리는 자는 하나도 없다. 모두들 차 한 잔을 입 속으로 흘려 넣으며 생각에 잠긴 듯하다.

 나도 녹차 한잔을 음미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려 본다. 접견실도 휴게실도 적막이 살얼음처럼 덮여있다. 사방을 휘둘러보던 나의 눈길을 잡는 것이 있었다.

 

 송산'배영식님의 '무상'이라는 시구가 소박한 자태로 내려다보고 있다.

 한 세상 살다가거늘 무얼 그리 애쓰노/ 한평생 누릴 것도 아닌데/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았노/ 걷다보면 어느새/ 내리막길인 것을/ 부를 짊어지고 가랴/ 명예를 짊어지고 가랴/ 지그시 눈 감으면/ 자연 속에 사라지거늘/ 둥근 게 인생이면/ 삶은 무상이 아닌가?

 이 시구는 바로 나의 시가 되어 가슴에 파고든다.

 

 그렇다! 무상이다! 무상이란 말을 입 속으로 웅얼거려 본다. 부도 명예도 모두 놓고 가는 인생길인데 그동안 너무 각박하게 살아온 삶을 돌아본다. 적신(赤身)으로 왔다가 돌아갈 때는 그 적신에 수의 한 벌 걸치고 가는 것이 고작 아닌가! 그래도 삶은 왜 그리도 팍팍한지…. 또 손아귀에 잡히면 왜 그렇게도 놓기가 어려운지 모르겠다, 나도 손 놓고 돌아서야할 때가 차츰 차츰 가까워지고 있다.

 이윽고 한 줌 재로 변한 육신의 잔해가 하얀 통에 담겨져서 유족의 손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땅에서는 한 줌 흙 속에 묻힐 지극히 작은 자연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공원묘지 한 쪽 양지바른 곳에 망자의 이름표가 붙어있다. 망자의 이름표 앞의 흙을 파고 한 줌 가루를 흙 속에 보탠다.

 이제 모든 게 끝이 났다. 한 인생이 90년을 살다가 남긴 것은 돌로 만든 작은 이름표 하나다. 물론 망자가 가지고 간 것도 없다. 끝은 무상일 뿐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도 욕심을 부려본다. 내가 남겨야 할 것과 가져갈 것을 계수해 본다.

 남길 것은 평강과 사랑이다. 나를 알고 있던 지인들과 나의 후손들에게 사랑의 꽃씨를 심어주고 그 가정에 평강의 이불을 덮어주고 싶다. 내가 꼭 가져가야할 것은 이 땅에 만연한 불신과 불의를 한 짐 가득 지고 가고 싶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떠나신 것처럼 말이다. 너무 욕심이 과했나! 이것 역시 허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