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문
입춘이라는 문을 열어젖히고 성급히 들어오더니, 결국은 동장군의 위세에 어이없이 기가 꺾인 봄이다. 들고 나감에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그래도 명색이 장군 아닌가!
일찌감치 문안에 들어선 봄바람이 미적대던 동장군에게 호되게 당하던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화가 난 동장군이 남은 힘을 모아 기세 등등 찬바람을 휘몰아 다녔다. 방송사에선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봄바람만 등에 업었던 사람들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소식이 꼬리 물기를 한다. 보일러나 수도관이 동파되었다고도 하고, 감기 환자가 부적 늘었다는 둥 호들갑을 떤다.
겨울 문을 닫고 떠나가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물러설 때를 확실히 알고 있는 자가 추하지 않을 텐데…. 어차피 발악해 봤자 추한 모습만 남게 될 텐데 말이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계절조차도 나가고 물러섬을 분명히 하라고 문을 만들어 은근히 유도 작전을 썼다. 아직은 추위와 동행하고 있는 쌀쌀한 봄날 아침에 하루를 열기 위해 대문을 열었다. 대문 밖에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인생 마당이 펼쳐져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삶의 현장으로 인간 숲을 헤치고 들어간다. 그 속에 숨어있는 파도와 살얼음을 피해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그래도 문이 있으니 갇힘이나 은둔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 아닌가.
문은 억압된 감정에 숨구멍을 틔우는 유로(流路)가 되기도 한다. 문의 열림은 시작이요, 개방이요, 자유다. 사방을 휘둘러본다. 문 닫힌 아파트 밀림에서 지척이 천리 같은 소외감이 밀려온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말만 입속에서 웅성거린다. 높은 담장에 철문으로 굳게 닫힌 부잣집을 지나갈 때면 철옹성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그곳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우주인이라도 사는 듯하다.
이렇게 문은 닫으면 단절이요, 열면 개방이다.
내가 자랐던 고향집에는 대문은커녕 사립문조차도 없었다. 항상 열려 있는 집이기에 동네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웠고, 거지, 상이군인, 나병환자 등 동냥아치들도 덩달아 자유롭게 들어왔다. 보따리 장사는 우리 집을 본부로 삼고 며칠을 눌러 앉아 물건을 팔기도 했다. 그런 중에 각설이패라도 들어오면 그 해는 운수가 트이는 해이다.
난 어릴 적에 이런 우리 집이 싫었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이웃에 사는 친구 집이 부러웠다. 그 집은 언제든지 빗장만 걸어 잠그면 이상한 사람들의 출입을 막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도둑도 아니고 동냥아치였다. 어떨 때는 팔 없는 거지가 상이군인이라며 쇠갈고리를 휘두르며 위협했고, 또 얼굴과 손가락이 짓무른 흉측한 나병환자들도 동냥질에 나섰다. 난 가끔 이들에게 쫓기는 꿈으로 베갯잇을 적시곤 했다. 그래서 난 식구들 몰래 나만의 공간을 확보했다. 거기는 장작을 쌓아두는 곳인데 옆 벽에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여기다 나의 소원은 우리 집에 거지가 오지 않는 것과 불이 나지 않는 것이라 써 놓고 매일 기도 했다.
어느 날 혼자 집에 있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험상궂은 거지가 깡통을 두드리며 쌀을 달라고 했다. 내 몸은 이미 사시나무가 됐다. 극도의 공포로 이성을 잃고 옆에 있는 바가지로 하나 가득 쌀을 퍼 주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가 어머니께 들켜 혼이 났다. 어머니는 작은 접시 하나를 주며 이걸로 동냥을 주라고 했다. 그 이후도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적게 주면 상이군인의 쇠갈고리가 내 머리를 잡아챌 것 같고, 뭉그러진 나병환자의 손이 나를 만질 것같아 이후에도 그 일은 계속됐다.
천만 다행은 내 소원 중 하나가 이루어 졌다. 동냥아치들이 새마을운동과 함께 정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내 마음 속에 도사린 불안의 씨앗이 한방에 날아가 버리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제 대문 없는 우리 집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출입이 자유로운 우리 집이 각종 모임의 장소가 됐고, 오다가다 들리는 참새 방앗간이 됐다.
친척 아주머니 한 분은 5남매를 끌어안고 청상과부가 됐는데, 호구책으로 떡 장사를 했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 집을 자기 집인 양 드나들며 우리 디딜방앗간에서 떡 방아를 찧어 떡을 만들었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우리 집에 들러 남은 밥으로 허기를 채우곤 했다. 또 이웃에게는 우리 집 농기구나 부엌 기구들이 개방됐다. 낫이든, 호미든, 소쿠리든, 무엇이나 필요할 때 가져다 쓰고 해가 지면 돌려 주었다. 그런데 나갔던 물건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이렇게 문의 열림은 화목이요, 소통이며, 나눔이고, 쉼을 얻는 공간이 된다.
20대에 들어서고 부터는 대문 없는 우리 집이 자유로워서 참 좋았다. 친구와 어울려 밤늦도록 놀다가 귀가할 때는 희비가 엇갈렸다. 대문 있는 친구는 어떻게 대문을 통과해서 집에 들어가나 걱정인 반면 나는 무한 자유다. 난 친구를 대문 앞까지 데려다가 대문에 들어가는 일을 도와야 했다. 어떨 때는 대문 밑 좁은 공간으로 납작 엎드려 기어들어갈 때 두 발을 밀어주기도 했고, 또 내가 무동이 되어 월장을 도우기도 했다. 그 시절엔 혼기에 달한 처녀가 밤 마실을 가는 게 허용되지 않은 집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집은 비교적 자유로워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잘도 돌아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대문을 만들지 않은 아버지가 선구자처럼 보였다. 막힌 담을 허물고 잠긴 빗장을 활짝 열어 이웃과 소통하는 길을 찾았던 옛 집이 그립다.
요즈음 도회지에서도 담장 헐기 운동이 일어나 병원을 비롯한 학교 등의 공공건물이 담장 철거의 선두주자가 됐다. 이건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바람이 봄바람에 실려 날아갔으면 좋겠다.
눈에 보이는 담장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열린 문으로는 평화가 들어올 것이고, 병든 자와 억눌린 자가 이 문으로 들어와 고침 받고 위로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나도 마음의 빗장을 열 때가 됐다. 수용하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 밭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만이 천국문도 쉬 열리지 않을까.
지금도 떠오르는 우리 집의 모습은 대문 없는 안채와 담장 없는 바깥마당이다. 바깥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고, 약장수나 마술사의 공연장도 됐다. 설날이 돌아오면 우리 집 마당은 뻥튀기 소리가 요란했다. 티밥 장수가 우리 마당에서 영업했다고 볼 수 있다.
나도 대문 없는 집을 고수했던 아버지처럼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