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빈 항아리

류귀숙 2015. 3. 3. 18:13

            빈 항아리

 앉고 일어설 때마다 무릎 관절이 삐꺽거린다. 외출하기가 부담스럽다. 애라! 모르겠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일단 드러누워 보자. 운동과도 휴전하고 따뜻하게 전기장판 데워 큰 대자로 누워 있으니 천지가 내 세상 같다.

 빈 깡통처럼 드러누워 리모컨 들고 T. V 채널만 부지런히 돌리며 화면 속을 기웃거렸다. 그때 마침 환하게 아침이 밝아오면서 따스한 봄볕도 따라 들어왔다. T. V도 별 신통한 게 없던 차라 눈이 창 밖 베란다 쪽으로 움직였다. 화분들은 며칠 새 연두빛깔 새싹을 틔워 올리고 있었다. 고마움에 물을 듬뿍 주며 인사를 했다. 시간이 여유로우니 눈길 또한 여유롭게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됐다.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올망졸망 모여 있는 옹기 가족에게 모처럼 눈길이 갔다.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옹기 가족들이 원망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 듯하다. 한 때는 부엌이나 장독대에서 사랑 받던 그들인데 이젠 할일을 놓아버린 빈 항아리로 나 앉아있다. 마치 새들이 떠난 빈 둥지처럼 허허롭고 애처롭다.

 간장을 가득 담고 있는 항아리와 이웃하고 있는 된장 항아리는 아직도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크고 작은 20여개의 항아리들은 모두가 빈 털털이로 관심밖에 있다. 나도 머지않아 빈 항아리 신세가 될 것 같은 예감에 불안감이 따라붙는다.

 다리가 예전 같지 않으니 같이 탁구 치고 운동했던 젊은 친구들이 서서히 멀어질 것은 뻔 한 일이다. 빈 둥지 지키는 늙은이의 길로 가는 데 속도가 붙는 것 같아 씁쓸하다.

 머리를 도리질하며 벌떡 일어나 고무장갑을 끼고, 물행주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얼굴을 씻겨 나갔다. 오래도록 제 구실을 하지 않아 곰팡이나 먼지들이 앉았지만 어느새 빛나던 그때 모습을 되찾았다. 항아리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추억을 더듬어 본다.

 이 항아리는 고추장을 담고 있었고, 저 항아리는 고추 장아찌를, 또 저 항아리는 멸치 젓갈을 담고 있었지. 씀바귀나 깻잎을 삭혀 먹었던 항아리도 아는 체를 한다. 참! 그때 너희들은 김치를 담았던 항아리들이었지? 배추김치, 동치미, 총각김치, 갓 김치, 깻잎 김치 등을 담았었지. 그때는 김장도 참 많이 했었는데….

 바로 앞에 있는 항아리 셋은 겨우내 땅 속에 묻혀 김치 맛을 살아있게 했지. 초봄에 땅 속에 묻어두었던 김치를 꺼내 먹었을 때의 맛이 입 속에 고인다. 지금은 김치 냉장고에게 자리를 뺏겨 버린 항아리들이 아닌가! 이 중 몇 개는 시어머님이 물려주신 것이니 대를 이어온 의미 있는 그릇들이다. 또 새까만 색깔의 작고 앙증맞은 단지 셋은 친정어머니가 시집 올 때 마련해 주신 것이다. 옻칠 한 것같이 검은 색깔이라 옻 단지 라고 불렀다. 이 단지에 고추장을 담아 먹었는데, 이제 고추장도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냉장고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항아리들 속에서 가장 큰 항아리와 두 번째로 큰 항아리는 각각 간장과 된장을 담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소용가치가 있으니 위풍 당당히 버티고 있다. 두 딸네 집까지 간장과 된장을 공급할 임무를 맡았으니 그 둘의 책임은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나 같은 구세대들은 아직도 집에서 간장을 담그지만 바로 아래세대 부터는 간장 담기를 번거로워 한다. 대부분 어른들에게서 갖다 먹든지 사 먹든지 하고 있으니 아예 장독대가 필요 없단다.

 옹기는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 부터 발전한 것이니 오랜 역사를 가진 그릇 아닌가! 그 그릇들이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발효 식품을 만드는데 공을 세웠던 일등 공신 옹기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햇볕 드는 장독대에서 우리들의 먹거리를 보관하고, 발효를 도와 곰삭은 맛을 내어 주었다. 이런 옹기 가족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간혹 쓸모없어진 빈 항아리가 아파트 쓰레기장 옆에 쭈그리고 앉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쩐지 아까운 것을 버리는 것 같고, 뒷일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나도 이사할 때가 되면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빈 항아리들을 버릴까도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그들의 공로가 생각나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이사 짐과 같이 싣고 왔다. 이제는 생각을 바꿔서 항아리들의 빈속을 채워서 사랑해 줄 수 있는 새 주인에게 입양 시켜야겠는 생각이다. 전원주택을 짓고 노후를 농촌에서 보낼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입양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아참! '작은 항아리는 꽃병으로 쓰면 되겠고, 다른 것들은 적당히 흙을 담아 화분으로 쓰면 되겠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빈 항아리 이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가슴 속에서는 불쑥불쑥 빈 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노인들이 더 걱정이 된다고 알려 주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빈 항아리가 됐을 땐 어떻게 하나?' 이다.

 그때 간장, 된장 항아리가 눈짓을 한다. 그래! 아직도 이 항아리들처럼 할 일이 있지 않겠나.

 내 속에 많은 것을 담아서 나눌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가진 작은 글재주로 기쁨을 나눠 줄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또 사랑을 가득 담아 향기로운 말과 다정한 눈빛으로 외로움을 녹일 수 있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육신의 쇠락이 온다고 해도 이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비록 마지막 지점인 요양원에 가더라도, 거기서 천국의 소망을 나눠 준다면 뜻있는 일일 것이다. 마지막 길에 희망 한 점 안겨 줄 수 있다면 그들은 마지막 길도 기쁨으로 달려갈 것이다.

 따뜻한 물을 다시 길러와 깨끗한 행주로 빈 항아리를 닦는다. 그들이 반짝이며 나에게 안겨든다.

 마침 봄볕도 내 얼굴 위에서 미소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