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의 꿈
번데기의 꿈
오늘도 끼니때는 빚쟁이처럼 득달같이 달려왔다. 반찬은 때마다 빚이 되어 머리를 짓누른다. 팔짱을 끼고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생각을 끌어낸다. 이때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은 바로 냉장고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냉동실에서 그 해법을 찾으면 되겠다 싶다.
냉동실 문을 열어젖혔다. 거기에는 경직된 기다림이 다닥다닥 엉겨 붙어 번지를 찾기가 힘들다. 모두가 플라스틱 통 아니면 검은 비닐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어 선뜻 다가가기도 힘들다. 그때 검은 비닐 하나가 손에 잡혔다. 얼음덩이처럼 딱딱한 다른 비닐과는 달리 안에서 '푸스륵'하며 손아귀에 안기는 게 아닌가? 얼른 풀어헤쳤더니 올망졸망한 작은 것들이 한껏 주름 잡으며 독기어린 항변을 보내온다. 언제 사 두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하얗게 얼음 꽃을 뒤집어쓰고 꽤나 기다렸나보다. 나도 한때는 뽕밭의 왕자였고, 창공을 비상할 꿈도 가졌었다고 항변한다.
미안한 마음에 그들의 항변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토닥이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네가 만든 그 빛나는 집이 비단 실의 원료가 되어, 귀한 인간의 몸을 감싸고 있지 않느냐? 지금도 너의 영양가는 이 냉동실 안에서 따를 자가 없느니라.' 물론 이 말은 꼭 빈말만은 아니다. 다음 끼의 식탁에서 번데기 요리가 단연 메인 메뉴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팔팔 끓는 물에 한 번 데쳐냈더니 말끔히 목욕한 몸처럼 반들반들 빛이 난다. 늙은 대추처럼 온통 주름투성이지만 품위가 있어 보인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뒤편에 있는 밭들은 온통 뽕밭이었다. 그 뽕밭 속에 들어가 오디를 따 먹고 입술이 푸르죽죽 검붉은 색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누에고치 철인 봄이 되면 이집 저집에서 누에들이 떡하니 방을 차지하고는 왕성한 식욕으로 뽕잎을 먹어댔다. 누에 방에서는 한꺼번에 여러 마리의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느라 사각사각, 와삭와삭거리는 게 꼭 비오는 소리 같았다. 꿈틀대는 유충의 몸 위로 번쩍이는 비단의 꿈이 꿈틀거렸다. 뽕잎을 먹은 누에 유충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 크고 징그러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가끔 문구멍으로만 슬쩍 들여다보고는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그 징그럽던 누에가 하얀 실을 뽑아내서 집을 지을 때는 신기하고 사랑스러워 문틈으로 한참을 바라봤다. 새하얀 누에고치는 순백의 목화 꽃 같기도 했고, 구름 속에서 피어난 천상의 꽃 같기도 했다.
또 그 고치들은 가난한 농가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되기도 했다. 누에 농사는 50여일이 지나면 보릿고개를 넘어온 농부의 빈 손에 두툼한 지폐뭉치를 선사했으니 효자 중의 효자였다. 그때는 그 꿈틀거리던 유충과 새하얀 누에고치가 한 몸이라는 것이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에 누에 유충의 징그러운 모습이 상상 되고 잔뜩 주름 잡힌 모습이 먹을 수 없는 벌레 같아서 번데기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영양가의 우수성과 누에고치의 아름다움만 생각나서 번데기 애호가가 됐다.
씻어 물기를 뺀 번데기를 참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달달 볶았다. 여기에 마늘, 소금, 고추장, 설탕 등을 넣고 적당히 버무려 맛깔스런 반찬을 만들어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번데기를 좋아한다. 반찬은 물론 소금 넣고 살짝 끓인 간식용 번데기도 좋아한다. 옛날 먹어왔던 메뚜기볶음 맛과 비슷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고단백질을 가지고 있으니 건강식이라 더욱 즐겨 먹는다.
한동안 그 공로를 잊고 냉동실에 몰아넣고는 지금에야 생각났으니 번데기가 토라질 만도하다.
번데기 반찬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고소한 맛 뒤에 웅크리고 앉은 인내를 곱씹어 본다. 쪼글쪼글 주름이 잡히기까지 많은 시간 동안 어둠에 갇혀 고독했으리라. 자신의 몸을 줄이며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인내하며 자신의 집을 지어왔을까? 보기에도 탐스럽고 깜찍한 하얀 집을 지으면서 황홀한 우화(羽化)의 꿈을 꾸었겠지! 세상 아픔을 올올이 풀어서 겹겹이 자신의 성을 쌓아올렸으리라. 그 몸짓, 그 수고, 그 꿈을 모두 내려놓고 콩알만큼 작아진 모습이 되어 식탁에 올라와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농축된 영양가가, 축척된 희생이 들어있다.
문득 젓가락질 하는 내 손에도 번데기 못지않게 주름이 잡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굵은 핏줄이 불거져 나와 강줄기를 이루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온통 잔주름이 들어차 있다. 거울과 마주한 얼굴도 이리저리 주름이 잡히고 입주위엔 홍수가 할긴 자국 같이 웅덩이가 생겼다.
번데기처럼 잡힌 주름을 보면서 나도 뽕잎 푸르던 젊은 날에는 우화(羽化)의 꿈을 꾸었었다고 위로해 본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조차도 희미하다. 단지 분명히 생각나는 건 가족을 위해 꽉 조인 몸으로 운신도 못한 채 날선 어둠을 몰아내느라 애썼던 기억뿐이다.
누에 유충처럼 자유롭게 들판을 누비며 쏘다녔을 때는 번데기처럼 입에서 실을 뽑아 성벽 짓는 일에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금빛날개 퍼덕이며 창공을 비상하는 꿈도 꾸었다.
지금은 번데기나 나나 우화의 꿈은 접고 차분히 식탁에서 마주하고 있다. 비록 화려한 비상의 꿈은 접었지만 아직도 꿈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꿈을 이룰 자신이나 있는가? 두리번거려 본다.
번데기가 내 입에서 고소한 맛을 내며 내 몸에 영양을 공급하고 있다. 그 뿐인가? 이미 자신의 껍질로 화려한 비단옷으로 거듭나지 않았나? 이제 마지막 남은 육신도 영양 공급원으로 제공하고 있는 번데기의 희생을 본다.
나도 번데기처럼 유익한 삶을 살았는지 뒤돌아본다. 내 성에서 양육된 자녀나 남편에게 화려한 비단옷을 입힌 적이 있는가? 또 나의 봉사가, 나의 희생이 어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는가도 계수해 본다.
그러나 희미한 안개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다. 생각해 보니 굽은 길을 에둘러 오면서 힘만 잔뜩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작은 꿈 하나쯤 만들면 되지 않겠나?
'아직도 쓸 만한 육신이 있으니 좀 더 굵은 주름을 잡으며 전진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