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누구인가?
범인은 누구인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화끈 달아오른다. 피부가 땅기면서 조여든다. 몸 속 어딘가에서 얼굴을 향해 공격을 퍼 붓는가 보다. 심장까지 두근거리는 게 꼭 수줍은 열아홉 소녀 같다.
누가 반란을 주도했을까? 북치고 꽹과리 치며 나를 향해 물밀듯 밀려온다. 조용하던 몸 안을 들쑤시고 다니며 급기야 곳곳에서 반란의 횃불을 들었다.
그 이후부터 피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푸른 숲 무성하던 머리칼이 가뭄에 마른 풀 같이 시들해졌다 .어느 날엔 머리를 감는데 빠진 머리칼이 주먹 안으로 겁 없이 들어왔다. 이 외에 손아귀를 벗어난 것들은 곳곳에 떨어져 이리저리 나풀대다 음식에도 들어앉고, 옷에도 들어붙는다. 피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빛나던 흑공단 같은 머리칼이 붉그레하게 변하더니 귀 부분엔 서리까지 내려앉았다. 이걸 감추고 싶었다. 이 피해를 하루 속히 복구하고 싶었다. 미장원에 가서 휑하니 쓸려간 정수리를 덮으며 뽀글 파마를 하고는 검은 염색약으로 서릿발을 눌러 버렸다.
거울을 보니 영락없는 촌 할머니다. 꼭 예전의 어머니 모습 같다. 갈퀴손 같이 엉성한 머리칼들이 독한 파마 약을 머금고 간신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다시 거울을 찬찬히 보니 얼굴 피부에도 피해가 속출했다. 햇빛을 받아서 인가? 아님 늙어서 인가? 검버섯 비슷한 반점들이 땡땡이 무늬같이 둥근 모양으로 여기저기 퍼져있다. 입 주위엔 제법 큰 갯고랑이 생겼고, 이마, 목, 눈 주위에도 실금들이 옹골지게 들어차 있다. 이러다간 내 얼굴을 내가 못 알아보겠다.
이렇게 얼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주동자는 매우 용의주도하다. 머리칼을 훑어 내린 손으로 얼굴에 주름을 만들더니 이젠 눈에까지 들어와 앞을 막는다. 안경의 도움 없이는 한 자도 읽지 못하게 한다. 이젠 부엌일할 때도 안경을 씌운다. 나물 다듬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집안일도 안경 없이는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시력이 특별히 좋았던 나는 학창시절부터 안경 낀 친구나 렌즈 낀 친구들 앞에서 한껏 어깨를 으쓱이며 교만한 몸짓을 보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친구나 나나 다를 게 없다. 노안이 되니 평소 근시였던 친구가 오히려 더 유리하게 됐다.
오늘은 또 팔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 더 이상 내 뜻을 따르지 않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든다. 탁구장에서 강스매시를 무리하게 했더니 '딱'하는 외침과 함께 삐끗했다. 아마 근육이 놀란 것 같다. 며칠 약간의 통증이 있었으나 무시한 것이 문제가 돼서 이젠 영 말을 듣지 않는다. 팔을 들어 만세를 부를 수 없고 무거운 것은 아예 들지 못한다. 그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옷을 벗지 못한다는 것이다. 뒤로 젖히는 근육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입을 때는 좀 덜한데 벗을 때는 통증이 더욱 심해 입이 벌어진다.
이 반란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이들을 살살 달래며 당근과 채찍을 병행해야 하는데 당근은 주지 않고 채찍만 휘둘러댔다. 그랬더니 오른 팔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했다. 이어서 내가 이행해야할 조항을 경고 비슷하게 들고 나왔다. '오른 팔만 쓰는 운동은 피해라. 적당히 치료도 하고 쉬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석회로 팔을 굳혀 밥숟갈도 뜨지 못하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질 새라 슬 관절도 덩달아 나선다. 그리고는 한 술 더 뜬다. 칼슘, 단백질, 철, 인 등이 들어있는 음식을 먹으란다. 그동안 즐겨 먹었던 단것은 단호히 끊어버릴 것을 경고했다. 경고를 무시하고 이대로 가다간 앉은뱅이가 될 수도 있다고 위협한다.
나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움직일 수 없는 신세란 산송장이 된다는 것 아닌가? 그것만은 막아야겠다고 다지고 또 다져본다.
이런 종류의 반란들이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밀려 올 때 침묵하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작전을 비폭력, 무반응 그리고 모르쇠로 세웠는가 보다. '네 몸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알 바가 아니다. 난 너에게 원하는 것이 없어. 내가 갈 곳은 바로 망각의 호수야.'라고 무언으로 대답한다. 그게 바로 기억력이다. 지금까지는 이게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언제 무엇을 했으며, 오늘이 며칠이고, 안경은 어디 두었고, 휴대폰은 어디 두었는가? 이 모든 것들이 희미한 가로등이다. 날만 새면 안경 찾고, 휴대폰 찾고, 각종 물건 찾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이것들 역시 머릿속에서 나를 향해 반기를 든 것이다. 다정하게 나에게 가르쳐 줘야하는데 어디로 간 것인가? 아마 망각의 호수로 가 버린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내 기억 창고를 깡그리 쓸어버리겠다는 심산이다. 머릿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러다가 치매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그것들을 붙들려고 펜을 들고 기록한다. 생각이 날 때마다 그때그때 기록해 둔다. 잊지 말아야할 소중한 추억들, 그리고 그리운 이름들을…. 이번엔 이것도 모자라 이중 방호벽을 설치한다. 스마트폰 노트에 중요한 것을 기록해 두고 컴퓨터 블로그에도 잊지 못할 사진이나 사연들을 기록 해 둔다. 감출 수 있는 곳에는 모두 감춰두고 무장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어디에 저장했는지 심지어는 이것을 저장했는지 여부도 기억 못한다. 이래서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무언의 반란자인 기억력이다.
다른 곳의 반란은 발달된 의술에 맡기면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하다. 머리칼은 가발로 대처하고, 눈은 노안 수술을 하면 된다. 피부는 성형해서 적당히 다림질하고 팔다리는 인공 관절 수술도 있고 여러 가지 적절한 수술이 있으니 빠져 나갈 방법은 있다. 그렇게 한다면 어느 정도는 반란을 진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기억은 어찌하랴! 주동자를 잡아 타협할 수도 없고 방법이 묘연하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머리를 써서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슬슬 달래면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 같이할 수있지 않을까.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 주동자를 잡아서 원인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 최선일 것 같다.
누가 주동했으며, 배후 조종자가 있는가? 내 몸속을 휘젓고 기억의 창고까지 넘보는 그 범인의 실체는?
잡고 보니 두 놈이다. 처음 시작한 놈은 갱년기란 놈이고, 다음으로 설치는 놈은 노년이라는 놈이었다. 그 둘을 어찌 정죄 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