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미국 작곡가 '타레가'의 기타 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기타줄 위로 잔잔히 흐르고 있다. 달이라도 두둥실 떠올라 텅 빈 궁전을 비춰준다면 더욱 애잔할 것 같다. 화려했던 250년의 역사를 묻어둔 채 고즈넉이 서 있는 궁전들 속을 각국 사람들이 넘나든다. 놀라 외치는 소리가 여러 나라 말이 되어 궁전 안을 맴돈다.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은 연신 열어놓고 감탄사만 연발한다.
위대한 건축 솜씨와 그들이 살다간 겉모습을 핥으며 지나치는 관광객들 속에 나도 끼어들어 눈빛을 반짝인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문화의 꽃을 피웠던 그라나다에 왔다. 몇 달 전부터 관람 예약을 해 두었기에 관람 티켓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 궁전은 일정 수 이상은 받지 않기 때문에 미리 예약해 두지 않으면 관람 할 수가 없다.
IS가 세상을 들쑤시고 설쳐대는 지금 이슬람이라면 섬쩍지근하다. 이슬람은 잔인하다는 선입견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머리를 크게 한 번 흔들고는 이슬람 문화 깊숙이 들어가 본다.
이 곳 스페인에 와서 어제까지 만해도 하늘 높이 치솟은 성당 종탑들만 보아 왔다. 하늘로만 향하고 신과 가까워지려고만 했던 몸짓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첨탑들을 뾰족하게 높이 세웠다. 이곳에는 나무들까지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높이 뻗어 올랐다. 우리나라의 측백나무와 비슷한 잎을 가졌는데 자라는 모습은 판이했다. 가로수로 심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있다. 인간이나 나무나 모두 신께로 가까이 가려는 몸짓이다.
이 땅에 마지막 남은 이슬람 궁전 알함브라 궁전에 들어갔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반, 호기심 반으로 이슬람 왕국의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이름도 붉은 색이란 뜻의 알함브라이고 도시도 석류를 뜻하는 그라나다다. 이름에서 오는 느낌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붉게 익은 석류가 입을 벌려 붉은 피를 알알이 토해내는 느낌이다. 망국의 한을 또 울분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려는 것인가!
이 궁전은 에스파냐에 존재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니스르'왕조가 세운 궁전이다. 무하마드 1세가 13세기에 세우기 시작해서 14세기에 완성된 궁전이다. 아랍어로 붉은 색이라는 뜻의 이 궁전은 이름대로 외벽을 대부분 붉은 벽돌로 처리했다. 이 지역은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석회암 건축이 가능했다고 한다. 또 큰 돌을 구할 수 없어 벽돌을 만들어 건축했다.
웅장한 성당들만 보다가 이 궁전들을 둘러보니 아기자기하다. 이 궁전에서 살았던 주인공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 중 2세기 반 동안 왕좌를 이어갔던 왕들의 모습이 앞서서 나타난다. 한껏 권위를 세우고 위엄을 강조하려 애썼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값비싼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보좌에 앉아서 왕관을 쓰고 신하들에게 군림하는 모습이다. 왕자나 공주들도 왕실에 태어나서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궁 안에서 액자 속에 갇힌 행복을 누렸을 것이니 과연 행복했을까? 내 눈 앞에 스치는 왕이나 왕자 공주들의 뒤편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보인다. 왕은 권력 유지를 위해 노심초사했을 것이고, 왕자들 또한 형제간의 경쟁으로 각박한 시간을 보내야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시리에스'궁전을 관람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라이온 궁' 앞에 섰다. 이 궁은 술탄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궁중 여인들이 거처하는 하렘이다. 이 궁은 국왕의 집무실인 '코마레스'궁이나 사신 접견실인 '메수아르'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124개 기둥의 조화가 이렇게 아름다울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지금까지 보았던 사각형 모양의 직선을 벗어나 있다. 모든 문양과 건축에 곡선을 사용해서 부드러움을 주었다. 자연의 나뭇잎이나 꽃잎의 문양을 사용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 특이한 모습은 12마리의 사자상이 떠받히는 분수를 마주하고 있는 '코마레스'궁에 닿으면 '아라야네스'라는 안뜰이 있다. 이곳에는 직 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연못 양 쪽에는 원형의 작은 분수가 자리 잡고 있다.
물을 귀히 여기는 이슬람 인들은 임금이 옥좌에 앉으면 바로 앞에 물이 보여야한단다. 놀라운 것은 그 연못이 거울 같이 맑아서 '코마레스' 궁전이 물 위에 비친다. 그 모습이 꼭 궁전이 물 위에 떠 있는 듯도 하고, 물속에 잠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신비스러운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런 모습들은 다른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그 외에 알함브라를 지키는 천혜의 요새인 '알카사바'성벽의 주위를 거닐어 본다. 이곳에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며 알함브라를 지키려 애썼던 병사들의 절규가 발길을 잡는다.
이 궁을 함락했던 가톨릭 왕국의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이슬람의 맥을 끊기 위해 알함브라 궁전 앞에 세워졌다. 망국의 아픔과 승리의 팡파르가 공존하는 현장이다.
알함브라 궁전을 보면서 한반도에서 사라져 갔던 왕조들의 흔적을 생각해 본다. 찬란한 역사를 자랑했던 삼국시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 한글을 창제했던 조선시대 등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남의 나라 관광 이전에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문화재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부끄러움과 함께 찾아 온다. 또 13세기의 궁전이 잘 보존 된 이 나라에 대한 부러움도 솟아난다. 왜? 우리 조상들은 건축 자재를 모두 나무로만 사용했을까? 다보탑, 석가탑, 석굴암을 만들었던 솜씨로 궁전을 돌로 만들었다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았을까? 아마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고 보면 나무 사용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조상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이 나라가 부러웠나보다.
지금은 승리자도 패한 자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의 발자취를 쫓아 이곳을 찾아든 많은 관광객들이 궁전 곳곳을 가득 채우며 그들의 솜씨를 찬사하고 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적막한 궁전에서 구슬프고 애잔한 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흘러나올 것 같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침표를 찍은 '니스르' 이슬람 왕조의 애환이 오롯이 남아있는 알람브라 왕궁을 뒤로 하고 떠나는 내 발걸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인간 세상의 영화는 풀잎의 이슬처럼 스러진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난다.
흥망성쇠를 돌아보는 문화재 관람은 그 조상들의 훌륭한 솜씨에 감탄과 칭송을 아끼지 않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은 항상 쓸쓸하다. 남겨진 발자취에는 애잔한 슬픔이 묻어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