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天池感動--북경 백두산 4박5일 (제5차 중국여행)

류귀숙 2011. 7. 20. 15:24

일정: 2007녀 8월 13일--8월17일 (4박 5일)

참석자: 윤재준 부부. 손계천부부. 이성희 부부. 김전 부부(총 8명)

여행사: 무궁화 관광 : 대구시 중구 공평동 8-2번지 (053)422-5555

           담당자: 김윤조:017-521-5133

여행경비: 한 가구당 93만×2=186만 +공동경비(가구당)14만 +현지 추가5만 * 총계: 205만원

항공편 :대구공항 12시30분 출발 CA146(중국 국제항공)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쯤 백두산에 가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강대국의 패권 다툼과 이념의 희생양이 된 한반도는 지척에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두고 가 볼 수 없다. 6.25 참전 댓가로 백두산의 절반이 중국에 넘어가, 개혁개방 후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갈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남의 땅 백두산을 간다는 건 좀 씁쓸한 기분이다.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을 땐 여행의 들뜬 기분에 마냥 설레이기만 했다.

북경 도착 후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 이화원 등을 관람했는데, 35도를 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행객으로 인해 관람이 힘들 지경이다. 중국 올 때마다 느끼는 건 이들은 조상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것이다. 보존 상태도 좋을 뿐 아니라 그 싸이즈에 압도 당하고 만다. 생긴 것은 우리와 비슷한데,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을 볼 때 그들은 배포가 우리 보다 훨씬 크다는 생각이다.

이튿날 만리가 넘는다는 長城에 올랐을 때는 어제와는 또 다른 감회가 앞을 가린다. 일만 이천 리나 되는 길이를 전국시대부터 쌓아 왔던 것을 진시황이 이었다고 한다. 장대함과 돌을 구워 만든 기술도 감동이지만,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희생된 일도 짐작이 간다. 그 거대한 나라도 북방민족이 어지간히 무서웠던가 보다 그 중 우리 고구려가 가장 무서웠을 것이고......

세재날은 핵심관광 장소인 백두산이다. 연길 공항에 내리니 마치 한국에 온 기분이다. 거리의 간판이 모두 한글을 먼저 쓰고,괄호를 해서 중국어로 기록 했다. 중국 정부의 포용력을 볼 수 있었다. 가옥 구조, 상점들이 우리와 흡사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백두산은 열번을 가도 천지를 한 번 볼까 말까하고, 3대를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단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 어쩌나! 하고 걱정이 눈앞을 어른거린다. 가슴 졸이며 백두산 입구에서 6인용 찝차를 타고 정상 입구까지 갔다.

산 정상에서  천지를 내려다 보니 구름이 자욱하고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그래도 아쉬워 기다리고 있었더니, 배시시 얼굴을 내 민다. 그러다 천지는 또다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애 태우며 기다렸더니, 드디어 또 모습을 드러냈다. 그 환하고 청아한 모습을.....

초록빛의 맑은 물이 드러나자 모두들 환호했다.

그 들은 모두가 우리 민족이었다. 요즈음엔 중국이 백두산 개발에 힘써서 중국인들도 많이 온다고 한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 환호의 주인공이 모두 우리 민족 같았다.

백두산 가이드<김송란>은 촉촉히 젖은 눈과  낭랑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낭송했다. 이 시는 전남 보성의 '이 생전'이라는 교사가 6번을 와서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남긴 시이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알았어  나라고 네얼굴 보고 가려 하겠느냐?

또다시 네 앞에 선들 그 때라고 네 얼굴 보여 주겠느냐?

널 보고픈 마음 장백산 가지 속에 새 소리로 두고 간다.

 

아니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북경 심양 장춘으로 돌아온 것이  네 비위를 거슬렸다면

요다음 개성 원산 청진으로 널 보러 올께.

그 대 고운 얼굴 예쁜 몸매 안고,   저 언덕 위에 뛰어 내려 어우르리라.

아니면 외로운 새 한마리가 내 몸 스쳐간다면 그것이 님이라고 반겨라

그 것이 님이라고 꽃처럼 반겨라.

네째날은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 하려고, 말타고 달렸던 선구자의 땅을 밟아 봤다. 넓은 만주 벌판을 누볐던 우리의 독립 투사들. 일제 수탈로 고향 떠나 타향에 이주한 우리의 민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용정시로 들어가 선구자의 가사에 나오는 혜란강을 건너 보고, 일종정을 멀리서 바라 보며 민족의 슬픔을 느꼈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와 그 분의 시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감회에 젖어 본다.

다음은 두만강이 흐르는  도문시로 이동하여 두만강을 관람했다.  푸른 물은 간곳 없고 흙탕물만 흐르고, 가까운 거리에 우리 민족의 주거지가 보였으며, 일하는 모습과 초소의 군인들이 웃통 벗고 더위를 식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뗏목 나룻배를 타고 우리 민족 뱃사공이 노를 저어 건너지 못할 북한 땅, 한 걸음만 닿으면 손에 잡힐 그 땅을 휘 돌아서 건너지 못하고 남의 땅 중국으로 돌아온다.  마치 이 땅이 내 땅인 양.....

통일이 되면, 개성 청진 원산을 거쳐 두만강 건너 백두산에 다시 오리라. 뒷 등성이 아닌 앞 등성으로 찝차 아니고 내 발로 걸어오리라.

이번 여행은 어느 여행보다 뜻 깊고 재미 있었다. 윤선생의 유머로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이선생의 주선으로 또 손선생의 가이드 보조 역할로 순탄하고 즐거운 여행이 됐다. 이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