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해병대여 영원 하라

류귀숙 2016. 5. 5. 13:46

   해병대여 영원 하라

  '나성에 가면은 편지를 띄우세요.∼∼'

우리민족의 이민사 중 최근에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 LA 곧 나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사의 땅이라 불리는 로스엔젤레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기에 영어를 몰라도 살 수 있는 곳이라 들었다.

 과연 그랬다. 우리 민족이 LA 중심가에 떡 버티고 한인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LA 다운타운 가를 주름잡고 있는 한글 간판들이 정답다. 형제 이발관, 장미 미용실, 영빈관 식당, 엄마 분식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들이다. 요즈음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상호들을 보니 60∼70년대의 거리를 거니는 기분이다. 형제 이발관이니 장미 미용실이니 하는 간판을 보니 왠지 '울컥' 하고 향수 한 뭉티기가 솟아오른다.

 그들이 이곳에서도 고향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구나!  도리어 우리나라 간판이 더 이국적이다. 미용실 대신 헤어샵, 헤어컬러 등을 쓰고 이발관은 블루클럽이라 부른다. 이민족들과 부대끼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소산이다.

 지금은 중심가를 지키며 당당히 선 우리 한인들이 자랑스럽다. 박토에서 뿌리 내리려 얼마나 애를 썼을까? 짐작 해본다.

 여행객인 우리들도 성공한 한인 덕분에 어깨를 올리고 다닐 수 있다.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하기까지 하다. 교민들 역시 고국의 발전으로 관광객이 넘쳐나니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이들 덕분에 이번 여행길에서는 쉽게 한식을 먹을 수 있어 좋다. 이게 모두 우리 교민들의 노력 덕분이 아닌가.

 우리 일행이 LA에 도착해서 처음 묵었던 호텔도 한국 냄새가 물씬 풍겼다. 호텔 프런트에도 한국 사람이 귀에 익은 우리말로 인사했다. 식당도 한식당에서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된장찌개 등 찌개 3총사가 예스러운 맛을 준다. 미국 속에서 지극히 한국스런 음식을 먹으니 여기가 한국인가? 착각할 정도다.

 그때 호텔 레스토랑 쪽에서 애국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뒤이어 자주 듣던 군가 소리가 들리더니 놀랍게도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들린다. 광복절이나 삼일절 기념식 때 들어 본 만세 소리가 아닌가?

 대한 독립을 외치며 목이 쉬도록 불렀던 만세 소리가 LA하늘 아래서, 그것도 바로 지척에서 들린다. 소리의 근원지인 레스토랑 쪽으로 가만히 다가가 안쪽을 살폈다. 바로 정면 벽이 눈에 들어왔는데 거기에는 흰색 바탕의 천에 검은 글씨로 'LA 거주 해병대 정기 모임'이라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아∼ 그렇구나! 해병대 출신 한인의 정기 모임이었구나! 대충 눈대중으로도 30여명은 됨직하다.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청, 장년층들도 더러 보인다. 그들은 모두 해병대 군복에, 모자에, 군화까지 신고 현역 군인인 양 패기가 넘친다.

 아∼ 그들은 대한민국의 영원한 해병대였다. 자랑스런 해병대는 LA 땅에서도 그 옛날 고국에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 시절의 향수에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섞어 애국심이라는 비빔밥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미국 땅에서 뿌리박고 웬만큼 자리 잡고 사는 것 같다. 그들의 고생을 보지 못하는 고향 친구나 친지들은 그들의 이민 생활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고국 사람들의 입장에선 미국에 살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얼핏 본 그들의 얼굴엔 그동안의 고생이 앙금으로 남았고, 그리움이 안개처럼 덮여 있었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을까! 선진국에 와서 후진 국민이라 설움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자존심을 밥 먹듯 집어 삼키고 멸시의 눈초리를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두 주먹을 불근 쥔 적이 한 두 번이겠는가! 가슴이 짠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은 백발을 이고 있는 할아버지지만 20대의 풋사과 같은 시절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젊음이 훈장이었던 그 시절이 생각날 땐 해병대 계급장으로 위로를 받았을까?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해병대는 함께 모여 눈물 한 됫박을 쏟았을 것이다.

 해병대 훈련이 고되다는 건 군대와 상관없는 여성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어려운 훈련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그리움이었나 보다. 아님 덧없는 세월이 아쉬워 서로 얽혀서 가는 세월을 막아보려는 것인가?

 해병대의 우렁찬 군가 소리가 Grand Hotel 안에 울려 퍼진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 조국이 그리워 만난 작은 모임이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계모임이나 비슷한 모임이다. 이런 사적인 모임에서도 국민의례를 제대로 하고 있다. 그 우렁찬 애국가가 LA 하늘을 넘어 조국에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는 염원도 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조국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 가슴 속 조국은 가난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그때 모습으로 고정돼 있지 않을까?

 그때는 가난했지만 마음이 하나였고, 가는 길도 하나였다. 어린 시절 국기가 게양되거나 하강될 때는 길 가던 행인들도 가는 길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예를 표했다. 오른 손을 왼 쪽 가슴에 대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했다. 이때는 애국가도 4절까지 불렀다. 그때 그 애국심이 이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현실은 많이 변했다. 공적인 기념행사에서도 '애국가는 생략하겠습니다.'를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 소리를 듣는 국민들조차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조국의 혜택을 듬뿍 입은 지금 세대들은 그 고마움을 잘 모른다. 걸핏하면 기성세대를 원망하고 국가와 정치를 비방하며 쌓인 분노를 표출한다. 또 이성을 잃고 국가 원수에 대해서도 막말을 예사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곳 교민들은 또렷한 국가관을 간직하고 살아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조국을 생각하며 하나 되었고, 또 조국을 들어올렸다.

 이 일이 미국 여행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늘 나라의 혜택을 입고 살면서도 그 은혜를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퍼뜩 일어난다. 앞서 고생한 조상들과 지도자들의 노고를 잊을 뻔 했다. 고액의 여행비를 내고 미국 산천을 누비며 미국인들의 서비스를 받고 있는 것도 그 혜택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관광지 곳곳에 한국인이 넘쳐난다. 그 다음이 중국인이고 일본인은 보이지 않는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유럽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한국인은 유럽을 좋아하나 보다.' 중국에서 만나면 '중국은 가까우니까 오기가 쉬워서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이번 미국 여행에서도 관광객이 넘치는 것을 보면 이젠 세계 어느 곳이나 한국 관광객이 넘쳐난다는 결론이다. 그만큼 경제 대국이 됐다는 증거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코리아' 라면 알고 있다. 또 잘사는 나라라 여긴다.

 밖에 나와 보면 조국의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던가. 이번 여행길에서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보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