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중국에서 길을 묻다

류귀숙 2016. 6. 5. 16:00

     중국에서 길을 묻다

 钟樓怎么走?(종루에는 어떻게 갑니까?)를 시작으로 ○○怎么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중국 서안의 대로를 장악했다. 나이를 잊고, 부실한 건강은 무시해 버리고, 20년쯤 세월도 꺾어버렸다.

 한 친구는 포켓와이파이를 운전대인 양 잡고 길 안내를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이 말을 듣지 않거나 안내가 정확하지 않을 때는 길눈이 밝은 친구가 나섰다. 묻고 또 묻고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철저히 따랐다.

 이 친구가 부족한 부분은 저 친구가 보완하고,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맞대며 4마리의 비익조가 됐다. 그 모습을 생각해 보니 입가에 웃음이 비실비실 비집고 나온다. 누가 봤으면 참 가관이었을 것 같다. 노인이라 불릴 외모에, 약간의 장애를 가진 다리에(한 친구는 실제로 6급 장애자 증명서도 땄다.) 지팡이 들고,  배낭을 메고, 절뚝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들이 길을 휩쓸고 지나가면 뒤통수에다 대고 킥킥대며 야유 섞인 목소리로 韩国, 韩国(한구어~, 한구어~)하는 소리가 들린다.  걔네들이 볼 때도 이 모습은 볼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들은 비실거리며 우리 곁으로 다가와 수작을 걸기도 했다. 길을 물으면 택시를 타라고도 하고, 입장권을 대신 끊어 주겠다고도 했다. 도처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눈들이 번들거린다.

 어림없는 소리다. 아직도 우리들은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최면을 걸고 있으니 속을 리는 없다. 인터넷이 있고, 중국어를 할 수 있고, 판단력도 우수하다. 될 수 있으면 묻고 또 물어서 공공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투어 첫날 호텔 로비에서 시내버스 요금을 물었더니 '이 콰이(1块)라고 말해 얼핏 받은 느낌이 2원 같아서

 2원을 요금 통에 집어넣었다. 우리 돈으로 400원이 못되니 '정말 싸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아차! 착각했다. 중국어를 배웠다는 사람이….

 한국에서 일. 이. 삼이 중국어로는 이. 얼. 산이다. 그러니 중국어로 일원이 '이콰이'인데 곱절인 2원을 냈다. 첫 번째 실수로 작은 돈을 잃고 더욱 더 정신을 차리게 됐다. 이렇게 가벼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 4명은 용감하게 앞으로 돌진했다

 중국은 서민들이 이용하는 기본요금은 터무니없이 싸다. 그러나 조금 고급스런 고속철이나 관광지 입장료는 꽤 비싸다. 물론 자국민에게는 노인. 장애자. 어린이 등에 혜택을 주지만 외국인에게는 고가의 요금을 받는다. 참고로 碑林입장료가 우리 돈 15,000원 정도이고, 공연비도 가장 싼 표가 5만 원 정도다. 고속철 요금도 40분 걸리는 거리인데 1만원이 넘는다.

 낯선 거리에서 현지 말로 길을 물을 수 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용기다. 젊은이들의 전용물인 자유여행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힌 일은 내 인생에서 굵은 획 하나를 그은 셈이다. 돌고 돌아 70의 문전에 와서 이 일을 해냈지만 아주 잘한 일이다. 내  자신이 흐뭇하게 느껴진다. 가정의 울타리를 넘는데 많은 세월과 용기. 또 베짱이 필요했다. 눈앞에서 알짱대던 아이들이 분봉해서 나간 벌처럼 새 둥지를 틀었기에 가능성이 열렸다. 또 사회적으로도 딱히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제야 한 숨 돌리는 시점에 왔다. 그러나 태산 같은 복병이 가로막을 줄이야! 

 유통기한이 바싹 코앞으로 다가오니 무릎과 척추 관절이 반란을 일으킨다. 불쑥불쑥 내 지르는 반란군의 방망이질에 정신이 아득할 때가 잦아지고 있다.  이러다간 발뒤꿈치를 오달지게 잡힐 것 같은 불안감이 땅거미처럼 눈앞에 내려앉는다.

 언젠가는 붙박이로 서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의 날을 보낼 것이다. 그때 해보지 못한 자유여행도 후회의 품목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 일어나자! 용기를 내 보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말을 가슴 속에 새겨 넣는다.

 우리 4사람이 같은 생각으로 자유여행을 택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국어를 할 수 있으니 중국으로 일단 정해 놨다. 그 다음은 도시를 정하는데 비교적 이동 거리가 짧으면서 많은 곳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서안이 낙점 찍혔다. 또 서안에는 중국 딸 '핑핑'의 사촌 형제들이 사는 곳이라 만약의 경우에 현지인의 도움을 받기에 용이하다는 장점도 작용했다.


 이만할 때 떠나자! 아직은 뜨거운 가슴이 있지 않은가!

 참 다행인 것은 4명 모두가 중국어를 배워 두었다는 것이다. 갱년기의 허전함을 달래려고 심심풀이 삼아 배워둔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채곡채곡 쟁여두었던 중국어를 살며시 꺼내 본다. 길을 묻고, 요금을 계산하고, 물건 사는 말 정도야 식은 죽 먹기다.

 밤 비행기를 타고 밤 12시 50분쯤에 내렸는데 미리 부탁해둔 중국 딸의 오빠가 마중 나와서 첫 번째 관문은 무사히 통과했다.

 인터넷 지도를 다운 받아 첫 째 날의 투어는 시내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종루 부근에서 내려 종루를 구경했다. 시내버스 요금이 싸서 마음이 푸근했고, 나도 서안 시민과 섞여서 버스에 오르고 내릴 수 있다는 뿌듯함도 일어났다. 택시 요금도 싸다고 하니 한 번 타 보려고 했다. 속이기를 잘 하는 중국

 사람에게 속지 않고 택시를 타 보는 거다. 인터넷에 9원 정도라기에  흥정을 하다가 10원을 주고 비림으로 가는 길에 택시를 이용했다. 입장료가 만만찮아 노인 할인을 물어봤는데 외국인은 안 된단다. 역대 중요한 비석들을 모아둔 곳이니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가이드가 없으니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또 인력거 비슷한 탈 것이 있기에 경험 삼아 10원을 주고 성벽 입장 표 파는 곳에서 내리기로 했다. 그런데  번화한 6거리 건너 편에서 내리란다. 우리들은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너 성벽입구로 갈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속은 경험도 한 셈이다. 회족거리에서도 우리가 정한 음식에 조금 변화를 주고는 바가지를 씌웠다. 지금도 그 일은 억울하다. 그러나 이일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이니 웃고 넘길 일이다.

 둘째 날부터는 제법 익숙하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도 타고, 고속 철을 타면서 화산까지 갔다. 서안에서 2시간 걸리는 거리인데 고속철을 타니 4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돌아 올 때는 일반 버스도 타 보고 모든 탈 것은 다 타 봤다. 묻고 물으니 길은 거기 있었다. 병마용, 화청지, 진시황 릉, 대안 탑을 봤고, '장한가' 공연도 관람했다. 여기서 중국 공연 예술의 스케일과 조명의 우수함을 보고 기가 조금 죽었다.

 우리 인생 길도 이렇게 묻고 물으면 길이 열릴 것이다. 인생 길에 든든한 동행자가 있으면 더욱 힘이 날 것 같다.

 다음 여행은 청도로 가자고 정했다. 비실거리던 몸들이 여행만 하면 싱싱하게 살아나니 여행이 바로 약이다. 이번엔 태산을 넘고, 공자의 고향 곡부를 점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