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서유럽 배낭여행(이탈리아 편)

류귀숙 2017. 7. 15. 14:12

   이탈리아 편

 오후에 파리에서 로마로 가는 쿠셋열차를 타려고 벌씨역으로 갔다. 이태리 밀라노 행을 타야한다기에 눈이 빠지게 전광판을 노려봤으나 저녁 8시에 출발하는 열차는 '토리노'행 뿐이었다. 순간 당황했다. 창구에 가서 차표를 보여주었더니 '토리노'행을 타면 된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밀라노는 중간 경유역이고 토리노는 종착역이었다. 사전에 이태리 지도를 보며 공부했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생전 처음 타 보는 야간열차에 대해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기차에 올랐다. 이 곳은 기차 탈 때 개찰이 없었다. 그러니 바르게 차를 타고 있는지 물을 곳도 없었다. '만약 차를 잘못 탔다면….' 하는 불안감이 스멀거린다. 어쨌든 타고 볼 일이다. 한 칸에 6개의 침대가 양쪽 벽으로 불어 있고 통로는 복잡했다. 이걸 타고 밤 시간을 이용해 밀라노로 가야한다. 나는 가장 아래에 있는 침대를 차지하고 바로 위는 딸아이를 보내고 기다렸더니 동양인 아줌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 아줌마도 맨 아래와 바로 위 칸을 차지해버렸다. 남은 곳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하는 3층만 남았다. 차표에 분명히 자석 넘버도 있을 텐데 무시하고 자는 척하고 있었다. 잠시 후 청년이 들어와 3층으로 가고, 뒤이어 중년 남자가 오더니 말없이 3층으로 갔다.

 땅거미가 온 땅을 덮고 있는 시간이다. 프랑스에서 이태리로 가는 길인데 쿠셋열차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기차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라 밖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담 우리는 중간에서 내려야 하는데 언제쯤 밀라노에 도착했는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또 불안하다. 딸아이는 나를 믿고 이미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맑은 정신을 잃지 않고 주위사람의 도움을 청하려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마침 옆자리  아줌마가 중국인이었다. 말문이 터여지고 대화가 오고 갔다. 그는 프랑스에 살면서 이태리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한단다. 내가 궁금한 점을 묻자 좀 있으면 역무원이 올 테니 걱정마라고 했다. 듣던 대로 역무원이 왔다. 패스포드와 유레알패스를 요구했다. 그리고는 술을 마시느냐? 담배를 피우느냐? 묻고는 간단한 빵과 우유 그리고 물 한 병씩을 주며 한 역 앞서서 깨워줄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선진국인데 이 정도는 돼야지."  정말 시간이 되니 "코리아 갯업" 하는 소리와 함께 여권과 유레알 패스를 주며 다음 역이 밀라노라고 말했다.

 밀라노 역에 내리니 이른 새벽이었다. 기차에서 잠을 잤으니 화장 실에 가서 간단한 세수도 해야 했다. 그런데 별로 좋지 않은 시설인데다 한 번 사용료가 70센트란다. 우리 돈 900원이 좀 넘는다. 기분이 팍 상했다. 요금도 비쌌고, 시설도 억망이었다. 관광객을 상대로 이렇게 해도 되나? 싶다.

 이태리의 분위기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또 달랐다. 영국은 깨끗하고 친절했고, 프랑스는 아름답고 우아했다. 그러나 여기는 소란스럽고 지저분하다. 우린 여기서 로마행 기차를 타야했기에 창구로 가서 예매를 했다. 유레알패스는 좌석표가 아니므로 얼마간의 돈을 더 주고 좌석이 있는 1등석으로 예매를 했다. 창구에 앉은 사람은 늙은 할아버지였다. 딱딱한 분위기에 영어를 잘 못했다. 거기다 아주 불친절했다. 그래서 차표만 로마행으로 끊고 밖으로 나와 영어권 사람을 찾았다. 마침 내 눈에 영자 신문을 손에든 영어권 중년 아저씨가 보였다. 딸아이더러 가서 물어보라 했다. 로마로 가야하는데 어느 차를 타야 로마로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저씨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꼭 아빠가 어린 딸을 보듯 사랑을 가득 담은 눈빛이다. 아∼이 아저씨도 딸아이를 초딩으로 보는구나!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영국인으로 보였다.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설명했는데 나포리 행을 타고 로마에서 내리면 된다고 했다. 이번 기차는 일반여객차였는데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마침 아침 시간이라 출근하는 젊은이들이 탁자 위에 컴퓨터를 올려놓고 일하며 가고 있었다.

 로마역에서는 가까운 곳에 호텔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침 한 건물에 태극기가 펄럭이기에 찾아갔더니 한국에서 이민 온 한국인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말 고맙고 반가웠다.

 다음 날 로마 터미니역 1번 플랫폼에서 오페라 가수인 권혁준 가이드를 만났다. 여기서는 신혼부부를 포함해서 21명이 투어를 받게됐다.

 로마 시내를 돌면서 유적들을 샅샅이 뒤졌다. 로마 시내 전체가 유적이요 유물 전시장이었다. 고대 건축물의 훌륭함은 말보다는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기원전 건축물에서부터 10세기 이전의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의 전차경기장이나 사원들은 허물어진 곳도 많지만 그때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로마를 망하게 한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빵,서커스(도박),목욕탕이란다. 터미니역의 '터미니'란 말도 목욕탕이란 뜻이란다.

 대전차 경기장은 길이가 665m로 처음엔 사람이 칼을 들고 짐승과 경기했고 나중엔 검사들끼리 경기했다고 한다. 치열한 생존 전투에서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경기다. 피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스릴을 즐겼던 잔인한 민족이었다. 소름이 돋는다.

 진실의 입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곳이다. 5세기 베스파시티아누스에 의해 하수구 멘홀 뚜껑으로 제작했다. 거짓이 있는 사람은 손이 잘린다는 소문을 퍼뜨려 정치적 정적은 뒤에서 손을 잘르기도 했다. 또 십자군은 이를 이용해 아내에게 정조를 시험하겠다고 위협했다. 나도 딸애와 같이 손을 집어넣고 사진을 찍었다. 별것 아닌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혹세무민한 관리들의 흔적이 유명세를 타고 있구나!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 다음으로 헤라클라스 신전, 판테논신전, 베네치아 광장을 지나 스페인 계단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햅번'이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고 여기가 또 관광명소가 돼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생활했던 '카타콤'에서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좁고 낮은 굴로 들어가자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굴 속 곳곳에 남아 있는 기독교인들이 희생된 흑적과 깊은 신앙심을 가슴에 담아왔다.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은 우리 모녀가 기차를 타고 바티칸 시티를 찾았다. 그 유명한 베드로 성당도 관람했다. 마침 그날은 주일이라 교황께서 미사를 집례하신다고 한다. 넓은 베드로 광장에는 각국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깃발을 들고 단체를 인솔해 오는 장면도 보였다. 인파를 비집고 우리도 그 속에 한몫 끼었다. 관중석을 한 바퀴 돌고 있는 교황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카메라를 높이 들고 사진도 찍었다. 교황을 아버지라며 예수님이라도 되는 양 열광하는 군중들이 눈에 거슬렸다. 다음으로  바티칸 박물관으로 갔는데 입구에 늘어선 줄이 만만찮았다. 한 시간을 기다려 겨우 입장이 가능했다. 딸아이는 국제 학생증으로 입장료 할인을 받고 가까스로 입장했다. 과연 3대 박물관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많은 회화 작품과 조각품들은 모두 당대의 최고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너무 많은 작품의 홍수 속에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저녁엔 또 쿠셋열차를 타고 스위스로 이동해야하는 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