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에 빛나는 두 별
문학사에 빛나는 두 별
이번 구채구 여행은 신비스런 물의 향연을 보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그 물 빛깔보다 더욱 영롱한 빛을 내는 두 별을 만나게 되는 행운까지 거머쥐게 됐다. 바로 당대의 문학을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다.
사천 성의 험난한 산세와 도도히 흐르는 민강 그리고 그 유명한 물 빛깔 등이 이들의 시심을 끌어냈나보다.
성당 시대에 굵은 획을 그었던 시선( 诗仙 ) 이백과 시성( 诗聖 ) 두보는 지금도 하늘의 별빛이 되고, 영롱한 보석이 되어 빛나고 있다.
성도 공항에 내려 메인 관광지인 구채구로 이동할 때 항공편을 택하지 않았다. 버스로 이동하는 길은 하루를 온통(11시간 이상) 버스만 타야하는 지루한 길이지만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경비 절감과 고산에 대한 적응력을 키울 수 있다. 거기다가 이백의 생가도 볼 수 있고, 창밖으로 비치는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도 있다.
가는 길에 이백의 고향인 강유( 江油 )에 들리게 된 게 큰 행운이었다. 이백의 생가 앞에 서니 이백이란 대 문호를 만난 양 가슴이 두근거린다. 신선의 경지에 오른 시선 이백의 생가 앞에서 이백의 동상이 우릴 반긴다. 붓을 들고 한 번 휘두르면 시가 한 편 나왔다고 한다. 술을 즐겨 마시고 달을 노래했던 호방한 시인의 생가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넓게 자리 잡은 집터와 기거했던 집들이 여러 채라 부유하게 살았던 것 같다. 부친이 서역의 호상이었다고 하니 그에 따른 식솔들도 많았으리라. 대궐만한 집이었다. 이런 여유가 바탕이 됐으니 두주도 불사하는 호방함을 보인 듯하다.
그는 인간을 초월해서 자유를 향해 비상하려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현실사회와 국가에대해 강한 관심이 있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적절한 응시도 있었다. 그 예로 이백은 현종의 부름을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는 궁정시인에 불과한 벼슬이었다. 원대한 정치 야망을 가진 그가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는 안록산의 난 때 영왕의 막료가 되어 영왕을 보위에 올리려다 실패했다. 그 후 보위를 이은 숙종에 의해 투옥되는 신세가 됐다. 죽음 직전에 와서 "곽자의"에 의해 구명됐다.
이때부터 방랑자가 되어 현실 도피 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곳으로부터 비상하려했다. 그때부터 술은 비상의 수단이 됐다. 민강에 배를 띄우고 술과 달을 벗하며 시를 지었다. 그는 달과 함께 천상을 오르내리는 신선이 됐다.
이백의 시 (산중 문답)을 감상해 보자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산에 사는가
웃을뿐 답은 않고 마음은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네
별천지일세 인간세상이 아니네
이 시를 대하니 이백은 인간 세상을 한발 물러서서 관조하는 신선 같다는 느낌이다.
돌아오는 길에 성도 시에 있는 두보 초당을 찾았다. 성당시대의 두 별 이백과 두보, 시선과 시성, 李 杜,
이렇게 두 시인은 쌍두마차가 되어 당나라 문학을 이끌었고, 중국 문학사에 가장 빛나는 별이 됐다.
두보 초당은 이름처럼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숲을 느낄 수 있었다. 시내 한복판인 데도 쭉쭉 뻗은 대나무가 두보 초당을 덮고 있었다. 대나무의 종류 또한 다양했다. 두보의 대쪽 같은 성품을 대변하려는 듯했다. 두보가 말년에 머물렀다는 초당은 우리나라의 초가집과 흡사했다. 아담한 초가삼간에다 자그마한 마당이라! 소박의 극치다! 이백의 넓은 집과 비교가 된다. 두보 동상도 작고 가냘픈 모습이라 동상 위로 가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저 있었다. 후대에 추앙받는 두보도 당대에는 불우한 생애를 살았다. 그는 늘 생활고에 시달려왔고 벼슬자리를 원했다. 그러나 그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겨우 "좌습유"라는 미관말직에 머물렀다. 안사의 난 이후에는 그 자리마저 잃고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성도에서 초당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이백보다 11살 아래인 두보는 이백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중국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이백은 안록산의 난 이전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했으나 두보는 난리 이후의 혼란스럽고 강퍅한 시대에 주목했다. 또 이백은 시선이라는 별칭답게 청순한 지연미를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두보는 시성으로써 인생과 사회를 비추기 위한 거울을 닦고 단련해서 현실 지향적 성향을 보여줬다. 그러나 두보는 현실을 형벌로 생각하지 않고 이상을 동경했다.
후세 시인들은 두보의 시를 본받으려했다. 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갈고 닦으면 결국 그 경지에 이를 것이라는 자신이 들기 때문이다. 두보의 시는 한자 문화권의 많은 문학 애호가들의 심금을 울렸다.
중요한 것은 두보의 시는 현실의 생활상을 묘사했기 때문에 역사 시라고도 한다.
두보의 시 곡강(曲江)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
酒債尋常行處有:주책심상항처우
人生七十占來稀인생칠십고래희
조회에서 돌아오면 매일 봄옷을 저당 잡혀
날마다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몇 푼 안 되는 술빚은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살이 칠십년은 드문 일 아닌가? <중략>
두보의 시는 어려운 백성의 고통을 어느 역사서보다 생생하게 기록하여 서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초당을 돌아서 나오며 시인이 걸었던 그 길 위에 내 발자국을 포갠다.
이백과 두보, 두 시인이 현실 속에 존재하듯 과거로 흘러간 사람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영롱한 빛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