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황룡

류귀숙 2017. 12. 22. 23:10

   황룡
 저 높은 곳에 가고 싶어 고개를 쳐들고 위로만 가고 있다. 해발 고도 49m인 대구에서 비행기로 날아 단숨에 2000m를 훌쩍 넘긴 사천성에 도착했다. 또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3000m가 넘는 구채구에 도착해 아름다운 물의 향연을 구경했다. 오늘은 기어이 4000m를 넘어서겠다고 새벽부터 그곳을 향해 출발했다. 꼬불꼬불 가파른 벼랑길을 오르며 버스와 같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버스가 굽은 길을 돌 때마다 오장육부가 뒤틀려 요동친다. 구토라는 반갑잖은 손님도  삐죽이며 목구멍을 오르내린다.
 어제 구채구 계곡에서 신선처럼 노닐다가 오늘은 더 높은 곳이 더 좋다기에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의 욕심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른 새벽 현지 가이드에게 중국 돈 60원을 주고 고산증 약과 미니 산소통을 구입했다. 모기약 통처럼 생긴 통인데 뚜껑엔 산소 마스크처럼 입과 코를 들이댈 수 있게 나팔 같이 생긴 흡입구가 있다.
산소 부족으로 답답하면 여기다 입과 코를 들이대고 산소를 빨아들인단다.
 해발 3000m대의 구채구에서도 여러 회원이 고산증을 호소했는데 오늘은 훨씬 더 높은 곳이란다. 평소에 건강이라면 자신감으로 깁스한 목을 뻣뻣이 세우다 약한 자들의 빈축을 샀는데, 오늘은 자신이 없다. 조심하려고 최대한 말을 아끼고 물을 한 모금씩 씹듯이 마시며 버스에 몸을 맡겼다. 그 와중에도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곁눈질해 보니 이 또한 절경이다. 성도에서 버스를 타고 구채구로  들어갈 땐 어두워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이제 환하게 들어온다. 가는 길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꼬부랑 길들이 실타래 얽히듯 높은 산 등성이에 걸려 있고 우리가 탄 버스는 그 길을 조심스럽게 기어오른다. 드디어 새벽에 출발한 버스가 해뜨기 직전에 해발 4200m 고지에 도착했다. 모두들 버스에서 내려 발아래 펼쳐진 장대한 운해
(雲海)를 보고 놀랐다. 이곳이 이승인지 저승인지도 분간 못하고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단체 사진은 필수다. 손에 손을 잡고 천국에 입성한 사람처럼 기뻐 뛰었다. 구름에 두둥실 떠 있는 기분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구름과는 차원이 다르다. 흩어질듯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 조각을 잡으려 손을 뻗어 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돌아왔다.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메스꺼움과 두통이 찾아왔다. 무기력증을 동반한 고산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친구는 심장에 통증이 온다고 호소했다. 나도 속수무책이다. 해결책은 산소통을 빨아대며 물을 마시는 방법 뿐이다. 아직 황룡 풍경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죽을힘으로 버티며 좌우를 돌아보니 비슷한 사정의 회원들이 산소통을 아이스크림이라도 된 양 빨아대고 있었다. 고개 숙여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울 수도 없다.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고 정신까지도 혼미하다. 거기다 방광은 풍선처럼 팽창해 10분 단위로 화장실을 찾아야했다. 18명의 회원 중 몇 명만 빼고는 절여 논 배추 같다.
겨우 황룡 풍경구로 들어가 케이블카를 타고 황룡의 정상에 올랐다. 여기선 풍경에 대한 감동을 고통이 삼켜버린 지라 아무 감동도 없다. 건강을 잃고는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도 여기서 알았다. 그렇게도 높은 곳으로 발돋움 했는데, 이젠 낮은 곳이 그립다. 내려가는 길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니 황룡사도 건성으로 보고 한걸음씩 아래로만 향했다.

천천히  걸어서 내려가며 계곡과 산세를 관광하면 된다. 한 걸음씩 힘없는 다리에 힘을 모아 낮은 곳으로 향했다. 저 높은 곳으로 치켜든 고개가 이젠 땅을 향해 다소곳이 숙이며 아래로만 향하고 있다. 한 때 우쭐했던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니 주위의 아름다운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가져갔던 과자 봉지도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고 내 몸의 장기도 부풀어 올랐다. 이제 아래로 내려오니 서서히 헛바람이 빠지기 시작했다.
황룡 계곡은 구채구와 다르게 웅장했다. 계곡의 군데 군데 보물처럼 반짝이는 호수의 물 빛깔은 신비하기 짝이 없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색깔을 낼 수 있을까?  
오채지 호수에 와서는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석회암이 녹은 물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의 다랑이 논처럼 논둑이 생기고 얕고 작은 호수들이 경계선을 이루며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작은 호수들이 다양한 색깔로 경계를 이루며 붙어있는 모습이 용의 비늘 같다고 황룡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구채구의 오채지는 하나의 호수에서 여러 빛깔이 나오는 것이고 황룡 오채지는 하나의 호수에 한 가지 색깔인데 각기 다른  색깔의  호수들이 비늘처럼 붙어있다. 웅장한 황룡 계곡에 오채지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드디어 2500m의 평지로 내려오니 고산 증세는 자취를 감췄다. 대 자연의 품에 안겨 무한 능력의 자연에서 보잘 것 없는 자연인이었다가. 이젠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룬 발자취를 둘러보러 간다. 첫 번재로 "송판 고성(松潘古城)'에 들렀는데, 이곳은 장족 자치구다. 티벳 왕자인 (옛 토번국)송찬감보와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살았던 곳이다.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명나라 때 개축됐다고 한다. 당태종은 토번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자신의 양녀인 문성을 정략결혼의 재물로 삼았다. 그러나 문성 공주는 이런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이 지방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날의 티벳 불교도 공주가 전했으며 당나라의 발달된 문화도 전했다. 지금도 이 민족은 공주를 신처럼 받들고 있다.

 이곳 사천성은 역사적인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도강언'은 '이빙'부자가 사비를 들여 민강의 물줄기를 막아 홍수의 피해를 막았다고 하는 곳이다. 또 삼국지의 무대 속에 우둑 섰던 촉나라의 땅이다. '무후사'에는 유비와 재갈 량을 모신 사당이 있다. 삼국시대의 거리를 거닐며 유비와 관우 장비를 생각한다. 1500년 전 역사의 희 노 애 락이 서려있는 무후사에서 앞서 간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또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을 정도로 큰 석불인 '낙산대불' 앞에 서니 인간도 참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이다. 당나라 때 홍수를 막기 위해 불심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바램이 서린 곳이다. 움푹 패인 계곡에 떡하니 자리 잡은 부처님의 모습은 장관이다. 이 불상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과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감탄과 감동의 파노라마 속을 헤맨 지 닷새가 지났다. 이제 여행의 종지부를 찍는 시점에서 돌아보니 그저 자연은 도전의 대상이 아니었다. 주신대로 받고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옛날 바벨탑을 쌓았던 백성들이 맥없이 흩어지듯 우리 대원들도 한껏 어깨를 낮추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