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럴 줄 알았어
내 그럴 줄 알았어
오늘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백두산에 오르는 날이다.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버스에선 가이드가 초를 치기 시작한다. 천지 호수의 맑은 물을 보겠다는 기대감을 낮춰보고자 하는 의도일까? 아님 천지를 못 본 원망을 자신이 받을까봐 염려하는 것일까? 어쨌든 가이드도 우리들도 모두 불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가이드는 백두산이란 백번 가도 천지 못은 두 번 볼까 말까할 정도다. 그래서 '백두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말한다. '3대를 덕을 쌓아야 겨우 볼 수 있다.'라고도 한다. 이는 우리의 기대감에 소금 뿌리는 말이다. 그렇담 오늘 이미 일이 틀어진 걸 알고 있다는 뜻 아닌가? 갑자기 희망의 빛이 절망의 먹구름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인 백두산! 그리고 신령한 호수인 천지! 이 얼마나 보고 싶었던 곳인가! 오늘은 하필 날씨까지도 우중충하다. 게다가 3대에 걸쳐 쌓은 덕도 없다.
더러 퀴즈 문제에 단골 메뉴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그 산의 높이는? 산 중앙에 있는 호수의 이름은? 등의 문제를 푸느라 머리를 회전 시켰던 어린 시절이 왜 하필 이때에 떠 오르는가? 그때는 내가 정말 그 산에 오를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던가? 꿈이 현실이 되어 내 앞으로 백두산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못 보고 돌아갈 수도 있다지 않은가!
이때 아쉬움이 내 마음속을 체념으로 바꿔놓았다. '그래,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엔 서파로 와서 보면 되지…. 그렇담 천지는 못 보더라도 산에는 오를 수 있지 않나? 그나마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몸과 마음을 백두산 쪽으로 밀고 나간다.
가르마 같이 곧은 외길 따라 버스는 달리고 버스 양편의 우거진 원시림도 달리기 선수마냥 휙휙 지나간다. 이곳엔 시베리아 호랑이나 곰, 멧돼지, 수달 등의 동물들도 서식하고 있단다. 창밖에는 여인의 피부 같은 자작나무 숲이 나타나더니 또 측백나무 숲이다. 특히 아름다운 모습이 미인을 닮았다는 미인송도 쭉쭉 뻗어 키 자랑을 하고 있다. 자꾸만 고도가 높아지니 나무들의 키는 작아지고 있다. 관목지대가 나타나는 걸 보니 이제 정상이 가까워지나 보다.
드디어 백두산 산문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입장표를 사려고 줄을 서 있다. 이 곳에서 표를 사서 버스를 타고 산 중턱으로 올라 2관문까지 간다. 여기서 다시 중형 버스를 타고(예전에는 찝차였다) 천문봉을 오른다. 중형 버스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춤추듯 출렁이며 올라간다. 운전기사는 곡예사처럼 승객들을 좌우로 몰아붙이며 난폭 운전을한다. 한참을 이리저리 깡통처럼 뒹굴다 보니 정상 입구까지 왔다. 천지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좌 우 어느 쪽이든 10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이때 찌뿌둥하던 날씨가 기어이 눈물을 짜냈다. 미리 준비한 비 옷을 입으며 "내 그럴 줄 알았다."를 되뇌어 본다.
입구의 간판에 씌어진 长白山 이라는 이름도 거슬리더니만 결국엔 비까지 오고 구름이 꽉 낀 날씨다. 이제 글렀구나! 그래도 모인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어. 늦게 온 것에 화가 난 것이냐? 아님 북경, 연변으로 돌아온 것이 마음에 걸리더냐? 인천 공항에서 양강도 삼지연 공항까지 1시간이면 족할 것을 비행기 두 번 타고 버스로 돌아돌아 온 것이 네 비위를 거슬렀느냐? 통일이 되면 개성, 청진, 원산을 거쳐 다시 오리라. 버스타고 산등성이로 오지 않고 내 발로 당당히 걸어오리라. 그때는 네 고운 얼굴 얼싸안고 저 언덕위에 뛰어 내려 어우르리라. 널 못 본 아쉬움 장군봉 바위위에 걸어두고 간다.' 이렇게 이별 인사를 하고 있을 때 봉우리 정상에서 만세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 만세" 정신이 번쩍 든다. 이곳에 모여 가슴 졸이며 천지를 보겠다던 사람들이 모두 한국사람 같아 보인다.
허겁지겁 몇 걸음 올라가니 글쎄! 거짓말 같이 구름이 걷히고 천지가 그 푸르고 청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우릴 버리지 않았구나! 카메라를 들고 그 예쁜 모습 담으려고 애를 썼다. 새색시의 웃음 같이 배시시 내민 얼굴 아닌가? 그 모습 조심스레 카메라에 담는다. 그랬더니 또 다시 구름떼가 몰려와 덮어버렸다. 아마 부끄러움 때문이 아닐까? 아님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것인가? 한 번 더 보려고 구름 속에서 또 기다렸다. 이 정도는 기다려줘야 예의가 아닐까? 그에 답하듯 자주고름 입에 물고 방긋 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정말 고맙고 반갑다. 그 깊은 심연에 녹아있는 우리민족의 정서가 있는데 그렇게 무심할 수는 없지….
지금은 남의 땅인 중국 땅의 북쪽 언덕에서 너의 모습 보고 간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흰 두루마기 입은 조상님이 나와서 호통을 친다. "어찌하여 백두산과 천지를 지키지 못했냐고?" 우리 산 우리 호수는 절반 이상이 중국에 넘어가고 남의 땅에서 우리의 천지를 내려다 보게 됐다. 돌아서는 뒤통수에 맷돌이라도 단 듯하다.
내려오면서 달문을 통해 흘러내린 천지의 물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계곡으로 내려갔다. 달문을 빠져나온 천지의 물은 천문봉과 용문봉 사이의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승사하를 따라 흐르다 장백 폭포에 도착한다. 장백폭포는 68m의 수직 절벽을 따라 떨어진다.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물의 함성이 들린다. 그 우렁찬 소리는 겹겹이 싸인 울분을 토해내는 소리다. 두 동강난 민족의 나약함에 대한 분노의 소리다. 아니 하루속히 정신 차리라는 경고의 소리다.
폭포의 함성이 희미하게 멀어질 때까지 흘러내린 물이 낙동강까지 흘러갈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