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인생을 살고 싶다.
걸작 인생을 살고 싶다.
내가 하나님이 지으신 걸작 품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10절에서 분명히 밝힌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그래 난 하나님의 훌륭한 예술품이야!' 어깨에선 힘이 솟아오르고 겨드랑이에선 날개가 돋아날 것 같다. 60을 훌쩍 넘긴 시점인 지금에야 이 사실을 깨닫는다.
이승희 목사님이 저술한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책 속에는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인정서가 들어있다. 또 인생길의 내비게이션이 나를 인도한다. 한자 한자, 한장 한장 읽을 때마다 지나온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아울러 앞길엔 서광이 비치고 있다. 이어서 무지했던 어린 시절과 안일했던 믿음의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농촌 동네 치고는 좀 발달한 곳이었다. 일찍이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졌으니 깡촌과는 좀 달랐다.
볼거리가 부족했던 동네 아이들은 무시로 교회 마당으로 달려가 예쁜 꽃이랑 서양식 벽돌 건물을 구경했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서 보기 드문 부용화, 하와이 무궁화 그리고 각종 장미꽃들이 우리를 끌어들였다. 그때 전도사님의 인도로 주일학교도 열심히 다녔다. 특히 크리스마스는 설 명절보다 더 기다려졌다. 크리스마스 날 축하 공연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무대에 올라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춤을 추며 박수 받았던 일이 떠오른다. 이 날만큼은 절에 다니시던 부모님도 참석하셨다. 딸이 예쁜 한복을 입고 날아갈 듯 추는 춤 공연이랑 '탄일종이 땡 땡 땡….' 하면서 어린이 찬양대에서 공연할 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땐 왜 교회에 다녔을까? 아마 굶주리던 60년대 초반이라 파란 눈의 외국 선교사가 가져다 주는 과자랑 학용품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꼭 물질만이 이유가 아니라 이미 주께서 자녀로 선택하신 것이라 짐작된다. 가슴 속에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심어 주셨음을 믿는다.
자라면서 교회를 떠나 세상 물결에 휩쓸려 하염없이 떠돌았다. 이때 가슴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던 믿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후 지칠 대로지친 탕자가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시어 아버지의 포도원에 거하게 하셨다.
난 이곳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안주하는 생활 속에서 지금까지 지내왔다. 꼭 어린아이처럼 힘들 때는 도와주십사고 징징 대다가 일이 해결되면 세상을 기웃대며 주님과는 거리를 넓혀 나갔다. 그러다 남편이 대장암이라는 선고를 받는 폭풍노도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됐다. 그때도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치료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셨다. 건강을 되찾은 남편을 볼 때마다 주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마침 에베소서를 통한 삶의 방향키를 제시한 이 책을 읽고 안일하게 살았던 과거와 어린애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지금부터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살아야겠다. 말씀을 등대삼아 걸작 품다운 삶을 살아야겠는데….
버킨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첫 번째 순서로 나 자신부터 정비작업을 해야겠다. 구원의 선물을 마음껏 누리면서 은사를 잘 활용한다면 멋진 삶이 아니겠나?
지금까지 ‘나에게는 왜 은사를 주시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늘 받은 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주위엔 방언 은사를 받고, 찬양의 은사, 전도의 은사,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나는 왜?’라는 불만의 물음표가 머릿속을 헝클어놓았다. 그러나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분량대로 주셨다고 한다. 단지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 것을….
내 안에도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은사나 장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서 잘 활용한다면 멋진 인생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하나하나 주께서 주신 은사를 찾아내어 인생길의 밑천으로 삼고, 섬김의 도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가정을 잘 다스리는 걸로 정했다. 가정은 부부관계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결혼 식장에서 처음 부부가 되는 신랑신부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보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경에서 부부관계를 다룬 에베소서에서 제시한 아내의 역할에서 '복종'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복종이라니! 요즈음 같은 평등 시대에…. 그 불만을 이 책이 명쾌하게 해결해줬다. 그건 남존여비가 아니라 가정의 질서를 위해 스스로 낮아져야함이라는 가르침이다.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 지고 믿음이 자리 잡는다. 가정에서 남편을 머리로 세워야만 나또한 그의 지체로서 머리와 몸이 하나 되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것이다. 이건 주종관계가 아니고 유기체를 말하는 것이고 질서의 중요성을 말한다고 이 책은 가르치고 있다.
자녀들에게도 소유주로 군림하던 습관을 버리고, 독립된 인격체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여겨야 됨을 바탕에 깔고 자녀를 대해야겠다. ‘네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는데, 돌아보니 부끄러움이 눈앞을 가린다. 나를 점검하고 남편을 세우고 자녀를 잘 양육한다면 일단은 그리스도인으로써 구별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다. 도처에서 마귀의 유혹이 혀를 날름대고 있다. 이때는 믿음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영을 대적해야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이단의 유혹도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를 나태함으로 인도하려는 악한 영과도 과감히 싸워 이겨야한다. 이단의 유혹에 빠져 남편 없이 힘들게 양육했던 자식을 버리고 떠난 어미가 있다. 이는 내가 잘 아는 교우다. 이렇게 마귀가 악한 줄을 미처 몰랐다. 자녀 둘이 눈물로 호소하는 것도 뿌리치고 떠나버리는 매정한 엄마로 변한 것이다. 또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아직도 방황하는 아들을 둔 친구도 있다. 이 친구와 그의 아들을 위해 합심기도도 하고 여러모로 애를 썼지만 마귀는 그 올가미를 쉽게 풀어주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사례를 볼 때 전신갑주의 무장은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대적인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마귀보다 강해야한다. 그래서 마귀보다 약한 우리는 주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 바울은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지고,”(엡6:10) 라고 권면하고 있다.
요즈음 부쩍 이단의 유혹이 심해지고 있다. 길거리도 모자라 가정으로 또는 대학가로 파고 들어 영혼을 망가뜨리고 있다. 정말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라도 마귀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마귀가 설쳐대는 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아 주시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또 여기서 명쾌한 답을 얻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됐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마귀는 무저갱에 들어갈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로소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해서 주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천성을 항해 간다면, 이게 바로 걸작 인생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지으신 이승희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안일함의 늪에서 건져 올려 주시고 의문점들에 대해 적절한 회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