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역경속에 핀 한송이 꽃 (M B C 시청 소감)

류귀숙 2011. 8. 5. 09:05

*2000년 4월 15일 MBC방영된<허준>에 대한 시청소감 공모에 출품한 작품

  원작:이은성   극본:최완규   연출:이병훈

         <역경 속에 핀 한 송이 꽃>

현대는 최첨단 과학의 시대요 초스피드 시대라 각자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거대한 버스 속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니 가족끼리, 이웃끼리 대화가 단절되기 쉽고  특히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 '허준'이라는 걸출한 TV프로그램 때문에 우리 가족은 정말 오랫 만에 한 자리에 앉아 대화할 수 있었다.

400년을 훨씬 뛰어 넘은 현재에도 그 때의 화제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 이건 뜻밖의 수확이다.

'허준'이라는 인물은 이은성님의 소설과 몇 번의 TV방영으로 인해 세인들의 가슴에 요지부동으로 각인 되어 있는 터라 새삼스럽게 또'허준'이냐 하는 식상한 마음으로 TV채널을 돌렸다.

거기엔 400년 전의 우리 조상들이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훈훈한 인간미를 풍기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있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물질 만능주의, 개인주의가 판치는 인간성 상실의 현실을 다소나마 정화 시켜주는 청량제 역할을 해 냈다.

이 드라마는 신분제도 때문에 서자의 멍에를 져야했던 허준의 파란 만장한 생애와 허준을 둘러싼 민초들의 삶이 해학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래서 어느 드라마 어느 사극에서도 맛 볼 수 없는 된장 뚝배기를 대하는 것 같은 순수함과 진실함과 심오한 진리가 있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의 저자이며 서출의 신분으로 의술을 연마하여 급기야 어의가 되었다는 간단한 역사적 기록으로 이렇게 폭넓은 상상력을 동원 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원작자 이은성님과 극작가 최완규님의 공로도 크다 하겠으나 연출가  이병훈님의 탁월한 기량이 더욱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딸은 앞으로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TV화면을 응시하며 나름대로의 작품 해석을 했다. 드라마에는 전혀 문외한인 남편도 이번만은 참여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학에 다니는 큰 애까지 허준 드라마가 방영되는 월, 화는 일찍 귀가해서 한 몫을 하게 되니 이 시간은 우리 가족이 하나의 주제로 토론 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라고 해야 되겠다.

정말 작가의 힘, 예술가의 힘이 이렇게 인간의 정서를 흔드는 마력이 있는가? 새삼 감탄해 본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출연자들의 연기력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허준을 많이 닮은 것 같은 허준역의 '전광열'씨의 연기는 단연 돋보였다. 병자들의 아픔을 긍휼히 여기는 표정과 고차원의 인격을 소유한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을 풍기는 외모이지만 때로는 자애로운 남편으로 또 약방 하인의 조롱에는 주먹으로 맞서는 용감한 정의의 사나이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어 탁월한 연기력이 시청자들을 더욱 감동케 했다.

꼭 400년 전의 허준이 살아온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다.

상대 역 '예진'의 등장 또한 허준을 더 한층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을 하는 고매한 인격자로 성장 시켰다.

여기에 어진 아내와 자애로운 어머니까지 등장해 위인 뒤에는 언제나 그를 뒷바라지 한 여인이 있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증명했다.

인종을 미덕으로 여기며 꿋꿋이 살아가는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조선시대의 여인상을 예진과 허준의 아내 그리고 허준의 어머니를 통해 잘 나타냈다.

이 부분에서 막내딸과 수차례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으나, 난 드라마 속의 여인상에 후한 점수를 주었고 딸아이는 남녀평등을 주장해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게 됐다, 그래서 딸 아이는 나를 19세기 여인이라 단정 지우고 토론의 끝을 내었다.

특히 이 드라마는 강도 높은 갈등으로 긴장감과 위기감 그리고 안타까움마저 주었는데 그 큰 갈등의 원인 제공자는'유도지'이다.  그는 스승 유의태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의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인격과 만만치 않은 의술의 소유자'허준'의 등장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인 아버지와 사랑하는 예진이까지 빼앗기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그는 불안감 때문에  허준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사사건건 도전장을 내게 된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허준은 스승의 신뢰마저 상실하고 방황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다행이도 예진의 지극한 사랑으로 스승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게 됐다.

 허준은 스승의 유언에 따라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게 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게 된다.

 나는 여기서 스승 유의태의 교육 방식을 짚어 보고 싶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유의태의 교육을 보면 허준과 유도지 중 허준은 성공을 거두었고 아들 도지는 실패 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교육은 상대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져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허준과 같은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는 냉혹하리만치 강하게 단련을 해도 빛을 발하는가 하면 유도지는 도리어 아버지를 미워하며 비굴한 인간성을 소유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책망만이 능사가 아니라 책망에 앞서 자애로움으로 훈계 했더라면 유도지도 허준 버금가는 어의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유도지와 허준의 끊임없는 갈등과 허준의 출중함을 시기하는 내의원 의원들을 보면서 과거의 현장이 오늘에 되살아 난 착각을  하게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과거나 현재에 상관없이 잘난 사람을 시기하고 모함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살아있는 법,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허준을 축출하려던 내의원 의원들의 음모는 허준에게 도리어 전화위복의 전기를 마련하게 했다.

그 외에 긴장감을 풀어 주며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연기자 임현식(임오근 역)과 언년 엄마 아빠역의 이희도 김해숙 등의 연기 때문에 모처럼 활짝 웃음꽃을 피우기도 하고 때로는 박장대소를 할 정도로 코믹 연기를 잘 해냈다. 그들의 연기를 생각하면  두고 두고 웃음이 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을 향해 달리는 고뇌에 찬 허준의 모습을 보며 긴장이 최고조에 이를 때 이 들의 코믹 연기 때문에 긴장이 풀리며 해방감을 맛보았다.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느슨하게 놓았다를 반복하며 연출가는 시청자들을 끌고 어느새 허준의 인생 항로에 동참 시키고 있었다.

산음에서 내의원에 입격하기 까지 여정에서 내의원 과거 시험 보러 가는 도중에 환자들을 돌보느라 과거 시험도 치르지 못한 허준의 모습은 심의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 유의태와의 갈등은 애처로울 정도로 도가 넘쳤다.

허 준이 유의태의 불신임을 받고 삼적사에서 문둥병을 치료하는 부분에서는 산만감도 없지 않았으나 작가는 재빠르게 무대를 한양으로 옮겨 다양한 모습의 의녀들을 등장시켜 한층 더 흥미를 더하게 했다.

이번 드라마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의녀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임무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내의원 의원들의 면모를 더욱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와 의사 장인 등의 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을 보고 그들의 허상에 분노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현대화가 늦어졌고 많은 인재가 사장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허준은 신분 상승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승리자의 표상이다. 그나마 허준은 중인이라도 됐으니 망정이지 천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면서도 서출에게는 입신의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의사나 기술자를 천시한 일은 유럽 선진국과 대조적이다. 이러니 어떻게 과학과 기술 분야가 발전 하겠으며 의학이 발전 하겠는가?

이렇게 허준 같은 훌륭한 의학의 선구자를 둔 후손이 서양의 의술에 뒤지는 것은 모두 기술 분야를 천시했던 조상의 탓일 것이다.

허준이 출중한 실력으로 내의원에 입격했으나,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혜민서에서 일하게 된 사실은 능력 위주가 아닌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내의녀를 뽑을 때도 실력있는자를 도리어 배격하고 자신에게 순종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 모두가 자신에게 강력한 도전자가 될 것이니 미리 제거 하자는 속셈인 것이다. 정말 한심한 일이다. 지존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를 선출하는 것도 이러하니 정치판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나라야 어찌 됐건 자신과 당의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다. 지도자가 이럴진데 민초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혜민서에 찾아온 불쌍한 병자에게 돈을 받는 무리들이 그 단적인 예이다.

허준은 혜민서에서 일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하며 부정한 무리들을 응징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으며 뜻 한 바 어의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홍문관 교리의 죽음과 도약사령 박씨의 자결은 의문점을 남겨 놓았고, 일촉즉발의 위기감과 긴장감을 주어 탐정 소설을 읽는 것같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을 맛보게 했다. 사건을 밝히려는 허준과 포도청 종사관의 패기와 정의감은 모처럼 숨통이 트이는 시원함과 기대감을 주었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고도 오히려 거대한 권력가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불의에 항거하는 미약한 힘과 그를 제거 하려는 거대한 악의 세력을 보면서 씁쓸한 실망감을 느끼게 했다.

이 때 부터 조선 시대에는 붕당의 씨앗이 싹트게 되었고, 급기야는 망국의 원인을 몰고 온 당파 싸움의 회오리바람이 불게 됐다.

지금 문밖에는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국회의원 후보자의 호소가 들린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노라고......

글쌔 정말 국민을 위하는 자 일까 ?

폭풍이 지난 자리에도 싹이 나고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 도도하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준이며 둘도 없는 심의며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스승의 가르침 따라 심의가 되고자 쌓아올린 숱한 시간과 노력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묵묵히 참아내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 가슴 저미는 인간애를 느끼게 했다.

당시에는 소인배들의 그림자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그의 백성을 위한 숭고한 정신은 '동의보감'이라는 거작을 남겨 가난한 자의 생명을 구했으며 후세 의학발전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