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민들레 꽃씨 되어

류귀숙 2022. 6. 12. 13:15

(소설)민들레 꽃씨 되어

언제부턴가 밝음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밝음을 피해 그 반대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를 끌어안게 됐다. 불안하고 답답한 가슴이 그래도 그림자 속에 들어서면 숨쉬기가 수월했다.

그림자 속에는 지난날의 그리움이 오롯이 숨어있다. 그림자 속에는 미래의 꿈도 날갯짓하고 있다. 현실에서 누리고자 하는 욕망은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자 또한 햇살 아래서만 존재하니 햇살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하루해가 긴 그림자를 남기며 자취를 감추려는 시간이 오면 얼른 햇살을 붙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린다. 그림자가 아닌 완전한 어둠은 내 의지를 삼켜버린다. 어둠이 세상의 왕이 되어 지배의 채찍을 내리치기 때문이다.

소영은 밤이 오면 빈 깡통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신세가 된다. 어떨 때는 강 펀치를 맞고 나뒹굴 때도 있고, 발로 차여 시궁창에 처박히기도 한다. 자신을 지배하는 뇌는 기능을 잃고 하얗게 백지로 변하고, 마음속엔 공포가 들어와 이성을 빼앗아 간다.

그래도 낮에는 그림자 속이나마 아들 서준이가 있으니 존재 이유가 된다. 지금까지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도 아들의 힘이다.

5살짜리 아들을 이리저리 뜯어보니 생긴 모습이 환상적이다. 눈은 호수같이 맑고 크며, 코도 적당하게 오뚝하고 얼굴은 자그마한 게 서양 아이를 닮았다. 세련된 모습에 목소리까지 또르르 구슬 구르는 소리를 내니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소영은 자신의 꿈을 아들에게 걸어본다. 교육을 잘 해서 훌륭한 인재를 만들리라. 그러면 이 아이가 나의 설움을 보상해 주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 힘이 솟는다.

이곳에서 아들이 대학교육을 마치면 자신의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가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한 게 몇 달 전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따라 남편의 기분이 봄바람처럼 화사했다. 6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표정이 살아나고 있었다.

느닷없이

“우리 내일 수성 못에 놀러 갈까?”

“모처럼 외식도 하고.”

마음속에 불안감이 쪼그리고 앉아있지만

‘혹시 마음이 변했나? 어쨌든 남편이 끄는 대로 가 볼 수밖에….’

이날은 남편이 정상을 되찾았나? 의심할 정도로 잘 했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한쪽 팔씩 잡고 비행기 태우며 못 주위를 돌았다. 마침 악단이 와서 공연하고 있었다.

색소폰, 기타, 하모니카 등의 악기들이 등장하며 주위를 들썩이고 있었다. 아이는 처음 보는 모습이라 신기한 듯 쳐다보며 흥미를 보였다. 거기다 아이에게는 장난감을 쥐어주며 아버지 노릇 하기에 열심을 보였다. 또 주위 식당에서 내가 좋아하는 샤부샤부 요리도 아낌없이 쏘아댔다.

다음 날 아들은 전날 보았던 공연 장면과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일로 소영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잡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영특함이 그녀를 이 시궁창 같은 늪에서 건져 줄 것이라 믿었다.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아들에게 갖다 안겼다. 아이는 보이는 대로 그려댔다.

아들의 그림 능력과 취미를 발견한 후 소영은

’아들이 천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조기교육으로 한글과 중국어, 영어, 그리고 일본어까지 가르쳐 세계적인 인재로 길러내면 자신의 처지가 몇 단계로 뛰어오를 것 같았다.

아이는 본 것은 모두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리는 시간만큼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도 모두 그림으로 나타낸다. 그중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라면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그려놓고 자랑하고 있다.

아들의 지능이 높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지갯빛 희망이 된다.

‘외국어 조기교육을 시키면 세계적인 인물이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급해진다. 우선 중국어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친다.

중국 동생에게 중국어 교재와 낱말 카드를 보내라고 위쳇 대화창을 통해 연락한다. 다음으로 인터넷을 뒤져 아들에게 필요한 교재와 장난감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간 시간에는 아들을 교육할 교재를 만들고 인터넷에서 가르치는 대로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집안 곳곳에 중국어 낱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냉장고, 세탁기, 소파, 책상, 침대 그리고 방마다 빈 곳은 중국어 단어장으로 변한다.

냉장고에는 你好(안녕하세요), 谢谢(감사합니다), 再见(또 만나요) 등의 낱말 카드를 내 건다.

한쪽 벽은 가족 호칭, 창문엔 꽃 이름과 과일 종류, 거실의 빈 곳엔 동물 이름과 그림을 붙여놓는다. 이제 머잖아 아들이 중국인처럼 중국말을 잘 할 것으로 생각하니 그림자로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까지 든다.

어둠이 검은 보자기가 되어 천지를 덮으면 퇴근 시간이 왔다는 뜻이다.

이미 중국어로 바리케이드를 쳐 두었으니. 남편의 횡포도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향 언어 뒤로 숨어본다. 시계 초침이 돌아가면 가슴 속 불안도 한 칸식 그 지수가 오른다. 귀를 벌려 바깥소리에 집중한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대문 차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술에 취한 듯하다. 오늘은 또 무슨 트집으로 도전해 올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다. 2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불규칙적이다. 술 마신 수위가 높은 것 같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전깃불을 켜고 현관문을 연다.

어둠에 묻혀있던 중국어 단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 같다. 붙일 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불안감이 솟아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본 남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목에서 쇳소리가 울린다.

“이게 뭐야?”

잔뜩 주눅이 들어 모기만 한 소리로 답한다.

“서준이 공부시키려고요.”

뒤이어 그의 손은 갈퀴가 되어 낙엽처럼 붙어 있던 낱말 카드를 긁어버린다.

“뭐? 이까짓 중국 말이 공부라고? 네가 뭘 안다고 공부를 시켜!”

목소리에 나를? 중국인을? 무시하는 마음이 녹아있다.

말은 날쌘 검이 되어 심장에 꽂힌다. 흘긴 눈동자에서 무시하는 눈빛이 쏟아져 내린다.

온종일 서준이가 정성 들여 그렸던 그림도 휴지통으로 들어간다. 눈동자는 갈수록 노기에 차 붉게 물들고 있다.

이어서 미친 듯이 집안을 수색해 들어간다. 어제 배달된 서준이 그림책도 패대기치고, 장난감도 발로 차 버린다. 다음 코스는 부엌이다. 어질러진 부엌 바닥을 보며 청소도 못 하는 더러운 여자라고 하더니, 냉장고 문까지 덜컥 열고 비닐봉지에 싸여 있던 식재료를 끄집어낸다.

둥글게 눈을 굴리고 있던 달걀을 싱크대 위로 던지고 바닥에도 내동댕이친다. 깨진 달걀이 조롱하듯 미끈거린다.

한참을 설쳐대더니 성이 좀 풀렸는지 아니면 술이 깼는지, 서준이를 찾는다. 자는 애를 흔들어 깨우니 애가 자지러지게 운다. 겨우 성질이 죽었나 싶더니 애가 우니 또다시 소리 지른다.

“애 교육을 어떻게 했냐고?”

소영은 우는 아들을 품에 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꼬?

북받치는 서러움을 달래보려고 애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시어머니 방을 훔쳐본다. 불 꺼진 창을 한참 바라보다 친정엄마를 생각한다. 한국에 시집가서 잘 사는 줄 알고 있는데, 이런 모습을 안다면 얼마나 걱정하실까? 내가 잘 살아야 친정 부모도 초대하고 안심시킬 텐데, 불효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시어머니도 내 편이 될 리 없는 데도 제일 먼저 도움을 청하고 싶다. 아들을 좀 꾸짖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남편도 지쳤는지 조용하다. 집으로 들어와 아들 방에서 아들을 안고 생각해 본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일이 꼬여버린 것일까? 나의 잘못은 무엇일까? 국제결혼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러면 해결책은 없을까? 이왕 선택한 길이니 내가 겪어야 하는 운명인가?

이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편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뱉어낸다.

“생활비 줬더니 쓸데없는 것만 사니까 이제 생활비는 반으로 깎는다.”

지금도 모자랐는데 반이라면 50만 원만 주겠다는 것이다. 뼛속 깊은 곳에서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자존심은 이미 콩가루같이 분해되어 허공을 나른다.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누군가에게 이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고 목 놓아 울고 싶다.

 

남편 최정석은 요즈음 살맛이 안 난다. 50이 다된 나이에 17살이나 어린 중국 아가씨와 결혼한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밑바닥을 기며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앞뒤 구분도 못 하고 살다 보니 덜컥 나이만 늘어갔다.

나이가 들어 결혼 적령기가 됐는데도 시집오겠다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 소개팅이라도 하게 되면 고졸 학력과 변변찮은 직업, 만둣가게 하는 홀어머니라는 조건에서 번번이 탈락하게 됐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그간 모은 돈을 보태고 정석 씨가 모은 돈에 융자를 내서 카센터를 차렸다. 옆에 세차장까지 있어 이제 정석 씨는 사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이때 악마의 속삭임이 정석의 귓전을 두드렸다.

나이 젊고 예쁘고 학식도 갖춘 아가씨를 소개해 준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으면 직접 만나보면 될 것이라고 했다. 비용은 천만 원이면 된다고도 했다.

이 소리를 들은 정석은 마음이 흔들렸다. 50이 코 앞인 나이고, 홀어머니 외아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으니 한국에서는 결혼이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정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가씨의 나이다. 자신 보다. 17살이나 적은 32세라고 했고, 중국에서 대학교도 졸업했다고 했다. 또 중매쟁이는 덧붙여 말했다.

“이런 자리는 빨리 서둘지 않으면 놓쳐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정석은 곧장 어머니한테 장가가야겠으니 속히 천만 원을 구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잘 알아보고 하라면서 머뭇거리는 눈치라 정석은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아래 두 여동생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장남인 자신에게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다. 늘 어머니 말에는 순종하는 정석이지만 이번엔 화가 났다. 아들 장가보내려면 그깟 천만 원이 문제냐며 성질을 부렸더니 어머니도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았다고 했다.

정석의 어머니는 이러다 아들 혼처를 영영 놓칠까 봐 은행에 비축한 돈 천만 원과 추가비용 200만 원을 주면서 잘 살펴보고 데려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정석은 중매쟁이가 이끄는 대로 천만 원을 입금하고 여권을 내고, 장춘행 비행기 표를 끊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난생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은 정석은 불안해서 중매쟁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춘 시는 꽤 발달한 도시였다. 정석의 머릿속엔 중국은 못 사는 나라, 공산주의 체제의 음침한 나라라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신붓감에 대해서도 돈 몇 푼에 팔리는 저급한 사람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본 중국은 그렇게 후지진 않았다.

평범한 호텔에 자리 잡은 중매쟁이는 어딘가에 전화하더니, 약속 시각이 조금 남았다며 장춘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시장통은 붐비고 있었다. 중국 특유의 붉은색 장식과 역겨운 냄새가 못마땅했다. 그러나 뭐라도 먹어야겠기에 양고치랑 생선튀김 조금과 밥을 시켰다.

시장을 한참 둘러본 후 호텔에서 기다리니 한 남자 뒤를 따라오는 아가씨가 보였다. 그 남자도 아마 중국 측 중매쟁이인 듯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더니 이윽고 중국인은 가고 아가씨만 데리고 들어왔다.

정석은 첫눈에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정석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큰 눈에 아담한 몸매가 정석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개를 든 모습을 정면에서 보니 호수 같은 눈매며 알맞은 높이의 코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게다가 그 얼굴에서 선한 마음마저 읽을 수 있었다.

눈치 빠른 중매쟁이는 자리를 피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어색하지만 반갑다고 인사했다. 아가씨도 한국말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는 많은 언어는 필요 없다. 아가씨 쪽에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정석은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정말 중매쟁이가 한 말이 꼭 들어맞았다. 이 미모에 학벌까지 겸비했다니 늘그막에 이 무슨 복이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윽고 중매쟁이가 오더니 아가씨에게 내일 출발할 준비가 됐는지 물었다. 정석에게도 내일 떠나자고 말했다.

정석은 그때를 떠올려 본다. 꼭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무엇이 급해서 그렇게 하루 만에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낯선 외국인을 서둘러 아내의 자리에 앉혔는가? 장춘까지 갔는데, 그녀의 부모는 왜 나오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니 이해가 안 된다. 미심쩍은 일도 한둘이 아니다.

정말 대학까지 나왔을까? 온전한 가정에서 자라기나 했을까? 혹시 친정에 돈을 송금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머릿속은 온통 의문표다.

그래도 처음 일 년은 꿈 같은 신혼이었다.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다.

말이 서툴러도 이해하고, 정리정돈을 못 해도 이해가 됐다. 특히 1년 만에 아들을 낳았으니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2년은 그런대로 신혼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정석도 가늠하기 어렵다. 언제부턴가 아내가 싫었다. 집안을 엉망으로 어질러 놓은 모습은 미치도록 싫었다. 한국 여자처럼 깨끗하게 정리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친구 집을 방문할 때 본 집안 모습과 자신의 집을 비교해 보면 화가 났다. 또 친구의 아내들은 대부분 직장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집안 정돈을 잘 하는데, 중국 여자는 도대체 정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생각이다.

생활비도 그렇다. 100만 원 주고도 공공요금이나 목돈이 드는 것은 자신이 해결하는데도 저축은커녕 항상 돈이 모자란다고 징징거린다. 거기다 어머니나 여동생들의 비난도 한몫했다.

결정적인 것은 썩어나가는 음식물 냄새가 역겹다. 부엌 바닥에선 먹던 빵이 뒹굴고, 큰 과자봉지에서는 눅눅한 과자가 맛을 잃어가고 있다.

냉장고 안에서는 음식물이 검은 비닐에 싸여 썩어가고, 바닥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져 집에 오기가 싫다.

한국말이 서툴러 의사소통이 안 될 때는 때리고 싶은 유혹이 일어난다. 또 결정적으로 불신감을 안겨준 사실은 중매쟁이가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는데. 겨우 중졸인 것 같다. 중국에서는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므로 중졸은 기본 아닌가?

이렇게 무식한 아내를 맞다니….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중졸 주제에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면 더욱더 싫어진다.

중매쟁이가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라는 말에 의심은 됐지만, 외모가 지적으로 보였다. 또 중국에서도 대학 졸업생이 많을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 둘 중매쟁이의 말과는 차이가 드러났다.

한국말이 느린 것도 배움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니, 정석의 마음속에는 아내를 불신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어머니와도 소통이 되지 않아 정석을 만나면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정석의 머리 위에 쏟아붓는다.

덩달아서 여동생 두 명도 올케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시누이로서 자신보다 나이가 적으니 무시하는 마음이 자리 잡은 것 같다. 더군다나 중국인이라는 약점이 작용한 점도 있다.

정석의 가족은 깔끔한 성격이다. 어머니나 정석은 물론이고 두 여동생도 집안 정리며 자신의 외모도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중국인 올케언니의 어질러진 집을 보면 잔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소영의 처지에서 보면 시어머니나 시누이 모두가 자신에게 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명절 때 자신의 집에 오면 큰 시누이는 욕실이 더럽다느니 부엌 정리가 안 됐다는 둥 하면서 잔소리를 해댄다. 작은 시누이는 어질러진 방을 휴지로 닦으며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있다.

‘더러워서 움직이기도 싫다. 이거 아닌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소영은 자존심이 상하고 시집 식구를 만나기가 꺼려진다.

정석은 마음 한구석에 소영에 대한 연민이 있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소영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머니나 두 여동생이 소영을 비난하는 소리도 듣기 싫고,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소영도 싫다.

 

소영은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소영의 마음 한구석엔 한국에 대한 꿈이 꿈틀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던 영애는 조선족이었다. 그의 부모님과 소영의 부모님도 장춘 시장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어 초등학교가 파하면 둘은 자주 시장에 들러 각종 튀김이랑 양고치 등을 먹곤 했다. 장충시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길림 성의 성도라 한족 보다 조선족의 숫자가 더 많았다.

언젠가 영애는 눈을 감았다 뜰 수 있는 인형을 안고 자랑하고 다녔다. 한국에 사는 고모가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또 가끔 예쁜 옷을 입고 와서 고모가 보낸 것이라고 했다.

소영의 마음속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아주 잘 사는 나라며 자신도 영애 고모처럼 한국에 시집갈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됐다.

중학교까지는 무난하게 다닐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부터 집안 형편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면서 병원을 찾는 횟수가 잦아지고 장사 일을 못 하게 됐다.

소영은 고등학생이고 두 동생은 중학생이라 교육비랑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소영은 맏딸로서 학교보다 먼저 어머니를 도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아버지를 대신해 식재료를 손보고, 손님이 오면 직접 음식을 내주며 어머니의 손발이 됐다.

자신은 희생하더라도 남동생과 여동생은 제대로 교육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만 했다.

수족을 잘 쓰지 못하는 아버지는 급기야 바깥출입을 못하게 됐고, 시장에서의 일도 절반 이상을 소영이가 해야 했다. 이러다 20대 후반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그 대신 두 동생은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남동생은 대학교육도 받았다. 이어 결혼까지도 시키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남동생네는 태어난 아이가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를 갖게 됐다. 어머니는 동생네 집에서 손자를 돌보고 살림을 맡아야 했다.

이런 사정으로 시장의 작은 음식점을 처분했고, 소영의 나이는 32살이나 됐다. 중국에서는 처녀 나이 서른을 넘기면 노처녀라 시집가기도 마땅찮았다.

이때 친구 영애가 조선족 중매쟁이를 소개해 지금의 남편과 결혼에 이르게 된 것이다.

중매쟁이는 입에 침이 마르게 정석을 선전했다. 나이는 좀 많지만 큰 카센터를 운영하는 사장이며 시어머니는 고급 식당을 하는 부잣집이라 했다.

소영은 평소 가졌던 꿈이 실현되나? 하고 생각하며 부모님 허락은 생략하고 승낙하고 말았다.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영애 고모처럼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겼다.

한국은 의술이 좋아 아버지와 조카의 병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품었다.

약속 날짜에 중매쟁이에게 소개받은 신랑감은 첫인상이 좋았다. 나이가 별로 들어 보이지 않았고, 날씬한 몸매에 순수한 인상을 풍겼다. 여자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더욱 진실하게 보였다.

부모님께는 결혼한다는 말은 꺼내지 않고 영애 고모의 소개로 한국에 일자리가 생겼다고 했다. 물론 동생에게는 귀띔했으니 엄마 아빠가 아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석을 따라 한국 대구에 발을 딛는 순간 안도감과 기대감으로 이 땅을 바라봤다.

남편은 도착하자마자 백화점에 들러 고급옷을 고르고 화장품도 샀다. 백화점 옷을 처음 입어보는지라 꿈인가? 생신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흥분했다.

내 모습이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뒤이어 남편은 마사지 가게에서 피부 마사지를 받게 했다. 또 소영은 생전 처음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근사하게 식사도 했다. 정말 꿈에 그리던 그 대한민국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날 밤은 첫날 밤이라 생전 처음 가 보는 고급 호텔에서 황홀한 밤을 보냈다.

그다음 날은 혼인신고와 행정 업무를 마치고 남편의 승용차를 타고 대구 시내를 드라이브했다. 정말 자상한 남편이었고, 풍족한 대접을 하는 부자 남편이 맞았다.

소영은 하루속히 자리 잡고, 부모님께 결혼 사실을 정식으로 알리고 한국에 모셔 오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장애인 조카도 이곳에선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았다.

부모님께는 걱정 끼칠까 봐 일자리를 얻어 한국으로 간다고 했지만, 여동생에게는 사실대로 말했다. 부모님은 동생의 입을 통해 내가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겠지.

3일 후 남편은

“우리가 살게 될 집으로 가자.”라고 했다.

소영은 마음속으로 아담하고 멋진 집을 상상했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현대식 구조의 아파트를….

그러나 소개된 집은 낡은 2층 주택이었다. 아래층엔 시어머니가 살고, 자신은 2층에 살게 됐다. 실망하는 눈빛을 읽었는지 남편이 말했다.

“이 집은 어머니 집이고 우리가 임시로 살다가 옮길 거야. 아파트를 청약했는데 3년 후에 완공되면 새 아파트로 가게 될 거야. 그때까지만 여기서 살자.”

소영은 3년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살림살이를 준비해 두었다. 장롱, 소파, 가전제품과 부엌 집기들을 불편 없이 갖추어 놓았다.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다.

소영은 남편에게 시어머니와의 첫 만남에 대해 어떤 예의를 차려야 하나 물었더니 그냥 인사하면 된다고 했다.

백화점에서 산 새 옷으로 갈아입고, 어제 산 화장품으로 화장하고 있었더니 시어머니가 가게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소영은 남편 손에 이끌려 1층으로 시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한국말이 서툴러 그냥 남편 뒤에 서서 모기만 한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했더니

시어머니의 표정이 별로인 것 같다.

인상은 좀 날카롭게 보이고,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할 것 같은 싸늘함이 느껴졌다.

입은 옷을 눈으로 죽 훑어보더니 뭐라고 별로 좋지 않은 말을 한 것 같다.

지금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살림살이며 혼수품을 신부 측에서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맨몸으로 시집온 신부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어머니와는 만남에서부터 이미 불행의 씨가 발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튿날 시누이 두 명도 어머니와 비슷한 표정으로 소영을 맞았다.

소영의 마음속에는 낯선 이국에서 어떻게 헤쳐나갈까? 하는 의문표가 일어났다. 어쩌면 먹구름이 몰려올 것 같은 불안감도 스멀거렸다.

그렇지만 든든한 남편이 있으니 걱정은 기우가 될 것으로 생각하며 내일부터 한국에서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먼저 시에서 운영하는 다문화 교실에 등록하고 한국어랑 풍습 등을 익히려고 마음먹었다.

마침 소영의 집은 북구청 근처고, 지하철이 통과하는 도심이라 이동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남편은 이미 다문화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해 놓았다.

소영은 설레는 맘으로 한국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한국어 교육은 고맙게도 나라에서 개인 교사를 지정해 주었다. 배정받은 선생님은 50대 초반의 큰 언니 같은 예쁘장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2번씩 직접 찾아오셔서 한국어를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한국어 공부는 무척 어려웠다. 선생님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니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재치있게 눈치로 몸짓으로 가르쳤다. 특히 그림책을 이용해서 설명하니 좀 쉬웠다.

마음속 깊은 곳의 고민이나 의문점은 소통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단순한 생활용어만 배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내 편이 되어줄 든든한 배후가 생겨 한결 편하게 됐다.

또 한국은 중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여러 시설과 먹거리, 볼거리들이 소영을 즐겁게 했다.

다문화 신부 모임에서 2명의 중국인 친구와 1명의 베트남 친구를 소개받았다. 모두 소영이 보다는 먼저 시집온 신부들이다.

‘한국은 이렇게 외국인 신부에게 혜택을 주는구나! 그러니 모두 한국으로 시집가는 것을 원하는가 보다.’

교재랑 수강료가 모두 무료인 교육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또 다달이 소영의 통장에는 다문화 지원자금까지 들어왔다. 친구도 만나고 공부도 하고….

소영은 하루속히 이곳에 뿌리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 친구나 부모 형제에게 자랑도 하고, 부모님을 초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준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도서관, 박물관 등의 시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좋았다.

문화센터에서는 한국 문화를 배우고, 친구들이랑 선생님과 교제할 수도 있다.

가끔 함께 식사할 기회가 올 때는 정말 행복했다.

저녁엔 남편이 퇴근길에 치킨이나 케이크를 사 오기도 하고 외식도 자주 하며 하루하루의 생활이 신기하고, 행복했다.

소영이가 결정적으로 이 집안에서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은 임신하고부터다. 늦은 결혼으로 자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인지라 집안에 경사가 났다. 이때 시어머니는 100만 원을 쥐여주며 수고했다고 말했다.

시어머니나 남편의 기쁨은 최고조였다. 시어머니는 미리부터 출산용품을 준비하고, 먹고 싶은 것을 사 주겠다고 관심을 보였다.

남편은 매일 저녁 외식하자고 제의했고, 소영은 대구 시내를 돌며 맛집 여행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외식하고, 아이 장난감이랑 먹거리를 잔뜩 사서 들어오다가

방금 일을 마치고 들어오던 시어머니와 부딪혔다. 시어머니의 눈에 힘이 들어가더니 급기야 남편의 얼굴을 후려쳤다.

“네 눈에는 늙은 어미는 보이지 않냐? 종일 힘들게 일한 어미에게 밥 한 끼 사 준 적이 있냐?”

소영은 깜짝 놀랐다. 저렇게 억센 어머니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나이든 자식을…, 그것도 며느리 앞에서 뺨을 때리다니….

소영은 무서운 시어머니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어머니로서는 자신은 힘들여 일하는데 집에서 노는 자기 아내만 위한다는 생각에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소영은 시어머니가 질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 고부간의 갈등을 다룬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때는 한국 시어머니의 감정이 이해가 되지 않고 과장된 내용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안에 자리한 시어머니는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이번 일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이후로 남편의 외식 제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시어머니가 무슨 말을 아들에게 했는지 남편이 소영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달라졌다.

이런 고부간의 갈등도 손자가 완충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소영은 시어머니 마음을 사려면 손자를 이용하면 된다는 사실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친손자가 없던 집에 친손자가 태어났으니 시어머니나 남편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외손자가 2명 있으나. 남성주의자인 시어머니는 친손자를 귀하게 생각했다. 백일잔치 돌잔치도 풍성하게 했다.

예식장을 빌려 연회를 베풀었다. 집안 친척들과 친구가 모이고 이벤트 회사에서 사진 촬영이랑 여러 가지 행사도 덧붙였다.

소영은 이런 모습은 자신의 고향에서는 생각도 못 했다. 한국에서 이런 화려한 모습을 보면서 차츰 한국적인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한국어 선생님이랑 다문화 친구들을 통해 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박물관, 미술관의 무료 관람과 음악회 등의 무료공연은 소영에게는 횡재를 만난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혜택이 곳곳에서 손짓하고 있다.

또 특이한 공연은 마술 공연이다. 한국어 선생님인 손 선생님은 문화센터에서 마술을 가르치고 있는데, 소영에게는 무료로 마술을 가르쳐 주겠단다.

정말 한국은 기회의 나라, 자유의 나라다.

그중에서 소영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말은 공부를 무료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늘 고등학교 졸업을 못 해 안타까웠는데, 그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고졸 검정고시 공부다. 여기에 합격하면 꿈에 그리던 대학 공부도 할 수 있단다.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증을 따고 방송대학에 들어가면 다문화 가족은 대학 학비도 면제받는다고 한다.

꿈속에서나 상상하던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단다. 소영의 눈앞엔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아른거린다.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공분데, 여기서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니! 한국으로 시집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중국 청도에서 시집온 밍밍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니 도움을 받으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이 공부도 다문화 센터에서 하면 된다고 한다. 이 일을 한국어 선생님인 손 선생님께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어 공부는 일주일에 2번 하는데 이때는 공부뿐만 아니라 한국 풍습과 요리도 가르쳐 주신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손 선생님이 콩나물밥도 해 주시고, 생선도 조려 주셔서 점심시간도 즐겁다.

일주일에 2번 한국어 공부시간이 기다려진다. 큰 언니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 첫 번째 기쁨이요.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것이 두 번째다.

한국으로 시집온 지도 벌써 2년을 훌쩍 넘긴 시점에서 돌아보니, 반쯤은 한국 사람이 된 듯하다. 말도 이젠 웬만한 말은 알아듣게 됐고, 하고 싶은 말도 한국어로 별 어려움 없이 하게 됐다. 단지 받침이 있는 발음이 까다로워 외국인 티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소영은 가끔 어깨가 우쭐해지고 이제 선진국 국민이 다 됐다고 자부하게 됐다. 중국과 달리 여러 가지 혜택과 무한대의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에 오게 된 게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중국 가족이 걱정되긴 해도 인터넷으로 안부를 물을 수도 있고, 동영상 통화도 가능하니 별문제가 없다.

이제 자신의 공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서준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낮에 공부하러 가면 되는 일이다.

하루속히 고졸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통신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다면 이곳에서도 유치원교사가 될 수도 있단다.

한국에서 자리 잡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부모님이나 중국 친구 특히 영애에게 보여주고 싶다.

한국어 선생님께 부푼 꿈을 얘기했더니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 주신다. 선생님은 나의 모든 어려운 얘기를 들어주고 조언도 해 주신다. 어머니 같은 포근함에 위안을 받는다.

다음 날 밍밍에게 전화해서 검정시험 공부하는 곳에 같이 가자고 제의했다. 밍밍도 좋다고 하며 기꺼이 같이 가 주기로 했다. 이런 공부도 모두 무료로 운영한다고 한다.

검정시험 공부 반에는 대학생들 또는 학원 선생님이 주로 봉사활동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주간과 야간이 있는데 나와 밍밍은 낮에 공부하기로 했다.

영어, 수학, 과학은 별문제가 없는데, 국어랑 역사가 가장 어려웠다. 특히 국어는 문법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국어가 가장 기초가 되니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르는 부분은 한국어 선생님께 배우기로 했다. 선생님은 시도 쓰고 문학에 대해 소질이 있어 국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됐다.

낮엔 공부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시간엔 어린이집에 맡긴 아들을 찾아온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오게 되니 자연히 집안일은 소홀해진다.

한국 요리도 서툴고 집안일도 서툴러 남편이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점이 아마 이때부터인 것 같다. 시어머니도 종일 집에 없는 며느리가 수상한 모양이다.

퇴근한 남편은 곧바로 2층으로 오지 않고 1층 어머니 집에 들러 밥 먹고 얘기하고 9시가 넘어서야 올라오곤 한다.

아마 모자가 머리 맞대고 소영을 헐뜯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눈길이 곱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한국어 선생님께 상의했더니 남편이 퇴근할 때는 예쁘게 꾸미고 상냥하게 잘 맞아 주라고 한다. 또 청소며 정리정돈도 잘 해야 하고, 한국 요리도 한 가지씩 배워 남편에게 점수를 따야만 어머니와 밥을 먹지 않고 곧장 집으로 온다고 한다.

그러나 소영은 선생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넘겨버린다.

중국에서는 집안일은 대부분 남편이 하는데, 여기서는 아내가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는 것도 모자라 못한다고 타박까지 맞으니 적응이 잘 안 된다.

공부하고, 육아도 해야 하고, 한국 문화에 적응해야 하니 무척 힘들다.

남편이 언제까지 봐 줄 것으로 알고 예사로 넘긴 게 화근이 됐다.

이날 따라 공부를 마치고 친구와 차 한잔 마시고 서준이 마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왔다. 물론 집안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먹을 것도 변변찮았다. 남편은 술이 가득 취해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들어서는데 눈빛에 잔뜩 힘이 들어 있다. 잘 돌아왔냐는 인사도 받지 않고 집안을 휘둘러 보더니 급기야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책꽂이에 꽂힌 서준이 책을 밀가루 반죽 뭉개듯 휩쓸어버린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이렇게 책을 많이 샀어.”

장난감도 추풍낙엽이 되어 방안을 날아다닌다. 세탁실로 가더니 쌓여있는 빨랫감을 창밖으로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내친김에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는 내용물을 모두 꺼내 팽개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나도 이렇게 대우받는 게 분해서 맞섰다.

“책은 공부하는 건데 왜 그래요?”

“장난감도 서준이 건데 그러면 안 돼요. 이러면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에 더욱 화를 부추겨 급기야 나를 밀치며 나가라고 한다. 나는 전화기를 찾아 가까스로 112에 신고했다.

이런 난리가 났으니 1층 시어머니가 가만있을 리 없다. 시집간 큰 시누이를 데리고 들이닥친다. 그 두 사람은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한통속이 돼서 나를 나무란다.

그중 시어머니가 뱉듯이 한 말은 나를 천 길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너 같은 여자는 이제 가격이 반으로 줄어서 500만 원이면 얼마든지 사 올 수 있다. 이 집에서 나가라. 더럽고 무식한 여자는 필요 없다.”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다. 소영은 비로소 자신이 1000만 원에 팔려온 사실을 알게 된다.

아하~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네~

‘지금까지 이들은 나에 대해 돈 몇 푼에 사 온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마음 바탕에 깔고 있었구나!’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팔려온 존재인가? 그럼 그 1,000만 원은? 누가 챙겼나?’

소영은 해머로 뒤통수를 한 방 오지게 맞았다.

뒤이어 경찰도 도착했다. 마침 시어머니는 경찰과 안면이 있는 모양이다. 시어머니는 경찰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어떻게 말했는지 경찰은 돌아가 버렸다,

여기다 시누이까지 한술 더 떠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도 좋다고 한다. 애는 자기가 키우면 된다고도 한다.

지금까지 키워왔던 보랏빛 꿈이,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마치 꿈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와 같은 허탈감과 두려움이 밀물이 되어 눈앞으로 밀려오고 있다.

‘난 어떡해야 하나! 어디다 이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나?’

천 길 낭떠러지에서 밑을 보니 까마득한 절벽이다.

이제 이 집 식구들의 얼굴 대하기가 무서워진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나간 후 소영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염없이 울었다. 이제 엎질러진 물이라 어쩔 수 없다.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더욱 싫다.

소영은 밤을 꼬박 새우며 앞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절망과 희망이 번갈아 들락거린다. 남편과 시집 식구들을 생각하면 절망뿐이지만, 또 다른 희망도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여긴 기회의 땅이 아닌가? 공부를 할 수 있고, 성공도 보장돼 있으니 참고 기다려야겠다고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소영은 냉정함을 되찾고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 본다. 그동안 한국 생활에 나름대로 적응했기에 한국을 떠나기는 싫다. 중국보다는 훨씬 기회가 많은 나라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소영에게는 똑똑한 아들 서준이가 있지 않은가! 이 아이는 소영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며 폭풍우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지금은 서준이가 어리지만 잘 가르치면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재목이 될 것이다.

소영 자신도 이 나라 제도 속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히 전문직을 가진다면 남편이나 시집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더욱더 열심히 한국어를 배울 것이고, 고입 검정고시반에도 등록할 것이다. 그리고 서준에게도 중국어를 가르치고 다음으로 영어, 일본어까지 가르쳐서 한국 아이보다 더 경쟁력 있는 아이로 키우리라 다짐해 본다.

다시 시작하는 공부가 재미있다. 젊은 선생님이 가르치니 더욱 생기가 난다. 특히 영어 선생님은 자신의 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낮에 수강생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다문화 주부들에게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선생님은 미국에서 몇 년간 살다 왔다고 한다. 영어 선생님을 통해 미국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게 된다.

소영은 학과 공부도 좋지만, 선생님이 미국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이야기해 줄 때 더욱 흥미를 느낀다.

역사 시간도 중국 역사와 아울러 베트남 역사 등을 섞어서 얘기해 주니까 중국만 알고 살아왔던 시야가 넓혀지고 있다.

국어는 어렵지만, 꼭 익혀야 할 과목이고, 수학은 그런대로 무난하게 할 수 있다. 그중 기술 과목은 너무 좋다. 살아가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과목이다. 가정생활에 지혜를 주고 사회 제도 등도 배울 수 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그림자에서 나와 밝은 태양을 향해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엔 무게가 실리지만, 서준이를 생각하면 한 줄기 빛이 비친다.

남편이 출근하고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소녀 시절로 돌아가 웃고 떠들며 공부할 수 있다.

친구 밍밍(明明)도 영애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어 선생님과 밍밍이 내 편이 돼 주니, 한국에서의 생활이 외롭지만은 않다. 이래서 남편과의 불행한 일도 버틸 수 있게 됐다.

밍밍은 나보다 먼저 공부를 시작했기에 이번에 검정시험을 치른다고 한다. 나는 내년에나 응시할 생각인데 밍밍과 선생님이 준비가 덜 돼도 자신 있는 과목만 응시하라고 권한다.

학점을 따지 못한 과목은 다음에 응시하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그만큼 공부할 과목이 줄어들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한다.

소영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영어 수학 과학 기술 과목에 원서를 냈고, 다행히 학점을 따게 됐다. 남은 과목은 국어와 역사 과목이다, 2과목만 중점적으로 공부하면 다음에는 꼭 합격할 것 같다.

남편은 공부한다니까 조금은 마음이 풀어지는 듯하다. 애초에 소개한 중매쟁이가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라고 소영이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했기 때문에 소영은 남편에게 거짓말쟁이가 됐다.

처음엔 사기 결혼이라고 소리를 꽥! 지르더니 이젠 체념하는 눈치다. 이번에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니 소영을 무식하다고 무시하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다.

검정고시에 통과하면 통신대를 다닐 수 있다고 했더니,

‘픽~’ 하고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니가 할수 있을까?’라며 멸시하는 마음이 숨어있을 것이다.

학비도 정부에서 지원하니 돈 걱정은 없다고 했다. 남편은 말은 하지 않지만,

‘공부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라는 말을 입안에 감춘 듯하다.

남편의 마음속에는 대학 졸업생이 아니고 겨우 중졸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무시와 멸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드디어 결정적인 말을 뱉어낸다.

“중국인이 한국에서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이냐?”

라며 공공연히 무시한다.

“공부 시작하고 몇 달 안 됐는데, 2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격했어요.”라고 했더니 미안한지 표정이 누그러진다.

다음 주 토요일이 시험일인데 소영은 2과목에 응시 원서를 냈다. 서준이를 맡겨야 하는데….

어찌할까 걱정하고 있는데 마침 손 선생님이 오셨다. 남편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손 선생님이 더 만만하다. 남편은 주로 토요일도 근무하기 때문에 시간도 없을 것이다. 손 선생님께 서준을 맡기고 시험장으로 갔다.

좀 어렵기는 해도 이번에는 통과할 것 같아 문제지를 한국어 선생님께 보여줬더니 70점은 될 것 같다고 한다. 이번 2과목도 통과한다면 고졸 학력을 갖추게 된다.

생각하면 졸업을 1년 앞둔 고2 말에 학교를 나오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처음엔 부모를 원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발병은 아버지의 탓이 아니잖은가?

이 모든 게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니, 희망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운명에 도전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제 내년에 통신대학 원서를 내면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유아교육학과는 비율이 세다는데 합격할지 모르겠다. 검정고시 시험 성적이 좋으니 아마 무난히 합격하리라 믿어 본다.

오늘 검정고시반 공부를 마친 후 소영과 밍밍은 분위기 좋은 카페에 마주 앉았다.

밍밍은 지난번 2번째 검정고시에서 국어 과목을 또 놓쳤기에 이번엔 소영과 같이 시험을 치르게 됐다. 소영은 이번이 2번째인데 놓쳤던 국어와 역사 과목 때문에 응시한 것이다. 그러니 밍밍은 이번이 3번째 응시고 소영은 2번째다. 그래도 소영은 고등학교 2학년 말까지 다닌 적이 있어 영어와 수학 과학 등은 좋은 성적을 얻었다.

소영과 밍밍의 답안지를 가채점한 선생님이 이번엔 두 사람 모두 무난히 통과할 것 같다며, 축하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큰일을 해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두 사람은 아메리카노 커피를 한 잔씩 시켜놓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소영이가 보기엔 밍밍이 어른스럽다. 나이는 한 살 아래인데도 한국에 먼저 와서 그런지 아님, 공부를 먼저 시작해서 인지 한국 사람이 다 된 듯하다.

말도 정확하고, 무엇보다도 자기 일이 있다.

 

밍밍은 청도가 고향이라 한국 사람과 접할 기회가 비교적 많았다. 많은 한국 기업이 이곳에 공장을 이전한 상태기 때문이다.

중학 졸업 후 어느 한국인 봉제 공장에 다니게 됐다. 어린 나이에 공부 대신 일을 손에 잡았으니 그 고생을 짐작할 수 있다.

밍밍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엌살림을 맡아 하며 동생도 돌봐야 했다. 남동생은 누나를 엄마처럼 따르고 의지했다. 그래서 밍밍은 소견이 빨리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완구를 만드는 공장이 집과 가까워 집안일과 동생 돌보기도 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밍밍은 아버지한테도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는 살림 밑천 딸이었다.

처음 중국에 있는 한국 공장에서 봉제를 시작했을 때의 어려움이 지금도 도렷하다.

재봉틀이라고는 보지도 못했는데, 전자동재봉틀을 돌려 천을 재봉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재봉의 정확도가 떨어지면 팀장에게 질책을 당했다.

낮은 임금으로 일을 하지만 가계에 도움이 되니 마다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공장이 다시 베트남으로 떠나면서 밍밍은 일자리를 잃게 됐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밍밍의 성실성을 인정한 팀장이 한국 봉제 공장에 소개해 주었다. 취업 비자를 얻은 밍밍은 대구에 있는 조그마한 의류 공장에서 봉제를 맡게 됐다. 밍밍은 베트남으로는 갈 수 없지만, 그래도 한국은 기회의 땅이니 기꺼이 승낙했다.

밍밍은 한국에는 고급 일자리도 많고, 임금도 많이 준다는 소문에 선뜻 승낙은 했지만, 아버지와 남동생이 걱정되었다.

밍밍의 아버지는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동생도 중학생이고 이전보다는 살만하니 집 걱정은 말고 떠나라.”라고 했다.

밍밍은 한국에서 자리 잡으면 아버지와 동생도 데려가야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소개받은 공장에서 6개월간 일을 했는데,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파업했고, 사용자는 곧 임금을 줄 것이니 파업을 취소하라고 권했다.

밍밍은 한국에 와서 ’파업’이라는 것을 직접 봤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자유 나라는 노동자가 사장에게 대들고, 압박하고! 이래도 되는가?‘ 밍밍은 심한 이질감을 느꼈다.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여기서는 정부를 상대로 반기를 들 수도 있다. 촛불을 들고나와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처음엔 이 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자나 국민이 자유롭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밍밍은 이제 자유주의의 물이 들어 점차 적응하게 됐다.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국민의 권리가 살아있다는 것이리라.

파업으로 생활이 어려운 밍밍은 식당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홀 서빙을 맡았다.

제법 큰 중식당이었는데, 종업원도 7, 8명 되고 영업도 잘 되는듯했다.

밍밍은 당분간은 아르바이트로 만족하지만 이렇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으로 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봉제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언니는 결혼한 기혼자였고, 결혼 전에 익힌 기술이라 꽤 숙련된 기술자로 인정받았다.

중국에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많이 도와줬던 언니이기도 했다. 그 언니는 중국어에 관심이 많아 가끔 밍밍을 만나 중국어를 가르쳐 달라고도 했다.

자기 아들이 중국어에 관심이 많아 중국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다.

언니는 전화로 한번 만나자고 제의했다.

모처럼 분식집에서 만났는데, 언니가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시간과 날짜를 알려주며 “한국에서 혼자는 외로워, 좋은 신랑감이니 한 번 만나봐.”

라며 결혼으로 튼튼히 뿌리 박고 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밍밍도 외국인으로 성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비자가 만료될 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으면 비자 연장이 어렵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이런 어려움은 벗어나게 된다. 결혼 5년 후에는 영구 영주권까지 얻을 수 있으니 유리함을 말할 것도 없다.

신랑감을 팔공산 산장 카페에서 만나게 됐다. 언니는 만남만 주선해 주고는 전적으로 신랑감에게 맡기고 돌아갔다.

그는 자신을 ’이두성‘이라고 소개한다. 나이는 40이라고 했고, 10년 전에 결혼한 사실이 있다고 솔직히 말한다. 밍밍은 좀 실망은 했지만, 언니가 소개할 때는 좋은 자리일 것이라는 믿음이 간다.

이두성은 자신은 건축 기사로 웬만한 아파트는 자신의 손을 거쳐 갔다고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밍밍을 보며 자신 있게 다음 말을 이어간다.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7살이고 지금은 전처가 양육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에 대해서는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한다. 또 가끔 한 번씩 만나는데 그것도 신경 안 쓰게 하겠다고 한다.

밍밍은 머리가 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절할 수도 승낙할 수도 없어 멍하니 있었더니 기혼자답게 밍밍을 리드해 간다.

식사로 황토오리 찜을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 지붕이 버섯 모양으로 생긴 운치 있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전처랑은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서로를 맞추지 못해 많은 갈등을 겪다 헤어졌다고 한다. 전처도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났고, 서로가 존중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란다. 양육비는 한 달에 50만 원씩 보내는데 20세가 되면 임무는 끝난다고 한다. 아직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자기만 믿고 결혼해 준다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다.

한국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알고 따듯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차츰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두성 씨의 차는 고급스럽다. 옆자리에 타라고 한다. 미끄러지듯 승차감이 좋다.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갔는데, 꽤 좋은 아파트였다.

넓은 평수고, 정돈도 잘 돼 있다. 내가 이 집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이렇게 해서 밍밍은 이두성씨와 결혼했고, 6살 된 딸이 하나 있다고 한다.

소영은

”그럼 딸 이름이 뭐니? “

”채은! 이채은이지!”

“나이는?”

“6살이야!”

“어마 우리 서준이보다 한 살 많네!”

“다음 주일에 우리 애 데리고 만나자.”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아이에게 친구를 붙여주는 일도 교육적이지.

두 사람은 조금씩 상대를 알아가고 있다. 이국땅에서 형제보다 더한 우정을 느끼고 있다.

소영과 밍밍은 만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정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검정고시반 수업이 끝났는데도 고향 친구처럼 만나서 차 한잔할 때도 있고, 점심까지 먹을 때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토요일에도 만난다. 소영의 남편이나 밍밍 남편 모두 토요일에도 근무하는지라 이들은 애들을 데리고 만난다.

밍밍의 6살짜리 딸 채은은 서준이보다 한 살 많은데도 어른스럽다.

여자아이는 성숙 속도가 빠른가 보다. 꼭 누나처럼 서준이를 잘 보살펴 준다. 이래서 소영은 더욱더 밍밍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이번 토요일도 소영이가 먼저 전화를 걸어 대구 어린이 대공원에 가자고 제안한다. 밍밍도 좋다고 하며 만나는 데 동의한다.

넓은 부지에 자리 잡은 대공원은 과학체험을 할 수 있는 곳과 어린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곳이 많다.

채은과 서준은 처음 만났는데도 오누이처럼 잘 어울린다. 앞쪽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핫도그랑 샌드위치 등을 사러 갔다. 몇 군데 포장마차가 있는데, 장사가 잘 돼 보이는 곳으로 가서 줄을 선다.

젊은 아줌마와 어머니로 보이는 할머니가 장사하고 있다. 젊은 아줌마는 요리하고 할머니는 돈을 받는다.

젊은 새댁에게 말을 붙여 본다.

“이 장사 시작한 지 얼마나 됐어요?”

“네 2년 조금 넘었어요.”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한국 사람 같지 않다.

“외국인인가요?”

“네 베트남에서 왔어요.”

“그래요, 우리 두 사람은 중국에서 왔어요.”라고 하는데, 할머니가 다가온다. 그렇담 할머니는 시어머니인 것 같다.

고부간에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인다. 나와 시어머니 사이와 비교할 때 많은 차이가 난다. 손님이 줄을 선 걸 보니 돈도 많이 벌 것 같다.

시어머니가 딴 곳으로 갔을 때 물었다.

“돈은 많이 벌고 있나요?”

“그래요, 몸은 좀 피곤하지만, 돈은 좀 벌고 있어요,”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은 것 같네요.”

“우리 자주 만나요. 시간 나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쉬는 날은 없나요?”

“매주 월요일은 쉬고 있어요.”

이때 또 한 무더기의 손님이 몰려온다.

붕어빵, 핫도그, 샌드위치 모두 잘 팔려 나간다. 붕어빵은 굽기가 바쁘다.

소영과 밍밍은 아이들에게 핫도그 하나씩 사 주고 자기들은 샌드위치와 붕어빵을 먹는다. 애들이 뛰어다니며 제 세상 만난 듯이 잘도 논다.

채은은 서준이를 동생처럼 잘 돌보고 있어, 둘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한다.

소영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터라 베트남 신부가 돈벌이하는 모습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자신은 포장집 같은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저들처럼 고부가 손을 맞추면 좋겠지만, 아직 서준이도 어리고 시어머니는 지금 만둣가게를 하고 있다.

소영은 남편이 던져주는 몇 푼에 목말라하고 있는 자신이 처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 당당하게 서고 싶다. 남편의 돈 몇 푼을 바라고 살다 보니 자존심은 바닥을 치고 있다.

소영은 밍밍에게 우리도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그 얘길 하려던 중이야.”

“너도 돈을 벌 수 있어. 사실은 말이야, 나도 작년부터 화장품 회사에 다니고 있어,”

“그건 점포가 있어야 하잖아?”

소영의 물음에 밍밍이 말한다.

“아니! 요즈음은 그러지 않고도 할 수 있어,”

“화장품 대리점에 출근해서 교육만 받아도 한 달에 20만 원은 주거든.”

“그럼 고작 20만 원을 번다는 거야?”

“아니! 그건 기본이고 판매 실적에 따라 돈을 벌 수 있어.”

“팀을 구성해서 팀끼리 협조해서 화장품을 파는 거야.“

밍밍은 대리점에서 정가의 70%로 가져와서 팔면 20% 정도의 이익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 동생에게 팔기도 하고, SNS에 올려서 팔아도 된다고 희망을 준다.

고객은 얼마든지 만들면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포장집 베트남 신부도 고객으로 하면 어려울 게 없다고 한다.

소영의 표정을 보더니 밍밍은 내일부터라도 서준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 하루 2시간씩 토요일은 쉬고 교육을 받아보자고 한다.

소영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생각이다. 자본이 하나도 안 든다는 게 장점이다. 점포도 이미 있는 것을 이용한다니 이렇게 쉬운 걸 왜 이제야 알았나 싶다.

아침 9시에 화장품 센터로 갔는데, 이미 문 앞에서 밍밍이 기다리고 있다.

밍밍을 따라 5층 건물의 4층에 있는 센터로 들어간다. 신입사원이라도 된 듯이 잔뜩 긴장된다. 몸이 움츠려지고 말도 제대로 안 나올 것 같다. 가뜩이나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데….

주춤주춤 밍밍 뒤에서 어색함을 감추려 하지만 남이 보기엔 촌닭 같지 않겠나?

입은 옷이나 헤어스타일 등 모두 촌뜨기 같은 느낌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니 잔뜩 주눅이 든다.

밍밍이 소개한 팀장은 자신을 박희옥이라 소개한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건넨다.

생각과는 달리 그곳에 웅성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은 소영에게 관심 밖이다. 각자 팀장을 중심으로 팀 원들이 모여 이야기 중이다.

박 팀장도 밍밍과 나를 데리고 자리를 잡더니, 6개월간 교육 기간이 있고, 교육 기간에는 한 달에 20만 원씩 지급한단다. 열심히 출석해서 사업을 잘 배워두면 한 달 천만 원 수입도 문제없다고 말한다.

소영 팀의 팀원은 모두 5명이다. 소영, 밍밍, 박팀장, 그리고 50대의 주부로 팀장의 친구가 있고, 또 40대의 주부가 활동하고 있단다.

공부를 좋아하는 소영은 무슨 교육이든 공부는 모두 좋다.

‘6개월간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도 돈을 벌 수 있다. 그리고 시집 식구들의 무시를 짓뭉개버릴 수 있다.’

마음속에다 든든한 바위 한 덩이 심어둔다. 아무리 모진 바람이 불어도 끄덕 않는 바위를….

처음엔 장황한 회사 소개가 있었다. 다음으로 다른 강사가 나와서 화장품 판매의 비전을 강의한다. 소영과 밍밍은 학생이라도 된 듯이 두 눈과 귀를 여기에 집중한다. 메모지에 적고, 기억창고에도 쌓아둔다.

성공사례 발표를 들으면 자신의 성공을 암시하는 듯하다.

’저렇게 성공한 사람이 많구나!‘

저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돈 버는 일이 무척 쉬워 보인다. 거리에 들끓는 사람들 모두가 고객이 된 것처럼 자신감이 생긴다. 또 한 달 교육비가 20만 원이니 이 돈을 처음 받은 날은 잠시 감동에 젖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내 힘으로 벌어보는 돈이기 때문이다. 이날 밍밍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카페라테를 마시는 재미로 그동안의 시름을 잊는다.

 

처음에는 무척 쉬워 보이던 판매 사업이 점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예로 중국 동생에게 화장품을 보냈는데, 송료도 만만찮고, 물품 대금을 받기가 어렵다. 언니 처지에서 동생에게 화장품값을 달라고 하기엔 너무 야박하다.

동생도 선물인 줄 알고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왔다. 그러면 나름대로 한국에서 판매처를 확보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손가락을 꼽아보지만, 남은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킨다.

맨 먼저 한국어 선생님께 회원 가입을 하고 고객이 되어 달라고 청해본다.

”화장품 회사에 다닌다고?“

“나도 지금 화장품 센터에 출근하고 있어. 쉽지 않을 거야. 정 안되면 교육 기간 끝나고 그만두면 되지.”

한국에는 많은 화장품 센터에다 갖가지 종류의 화장품이 있다. 소영이 판매가 쉽지 않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밍밍은 같은 팀원이라 한 배를 탔기 때문인가? 또 다른 중국 신부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우한에서 왔고, 아이는 아직 없다고 한다. 하는 일을 물었더니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은 보영이란다.

보영은 화장품 기초 세트를 주문했다. 첫 거래인 셈이다.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하며 헤어졌다.

처음으로 실적을 올리게 돼서 자신감이 붙는다.

요즈음 소영은 TV프로 중 ’고부 열전‘이라는 프로를 자주 본다. 외국인 신부들이 한국 가정에 정착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며 자신과 비교하는 시간을 갖는 게 유일한 낙이다.

나라도 다양하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등 많은 나라에서 한국으로 시집 왔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살고 있고, 방송에 나오는 가정은 주로 농촌 지역이다. 시어머니와 농사일을 같이 하며 부딪치고 또 화해하는 모습들이다.

그들 모두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민들레 꽃씨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린 여성들이다.

이 프로그램은 비교적 성공한 가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주 여성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직 서준이가 어리기 때문에 과감히 사회로 나갈 수는 없다. 그러니 그동안 준비를 충분히 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화장품은 소영이 같은 외국인은 인맥이 부족해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무래도 전문직을 가지려면 대학을 나와야 할 것 같다.

통신대학은 아이를 기르면서 마칠 수 있으니 도전해 보려고 다져 본다. 학비도 지원되니 시집에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가 어렵다는데, 어떻게 할까?

소영은 10년 안에 졸업장을 따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해 보려 한다. 학점을 조금씩 따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따야 할 과목이 줄어들 게 아닌가?

등록 기간이 몇 달 남았으니 그동안 독해력을 높이기 위해 한국 소설을 읽고 문학 전집을 읽으면서 한국어 독해력을 높인다.

 

한국 방송대학 유아교육과에 합격했다. 대학 측에 전화했더니 합격이란다.

드디어 내가 대학생이 됐다! 고향의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축하한다고 한다.

“소영! 네가 잘살고 있으니 안심이다. 공부 열심히 하렴, 고등학교 졸업도 못 시켜서 마음에 걸렸는데 아주 잘 됐어.”

두 동생의 축하도 받았다.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신입생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설명이 있을 것 같다.

’어떻게 하지? 서준이를 어디다 맡겨야 하나?‘

어린이집 시간과 맞지 않아 데리고 갔다.

방송통신대학 이란 간판을 붙이고 도도하게 버티고 있는 대학 문으로 살며시 들어간다. 많은 학생이 들어가고 있다. 그중에는 50을 넘겼을 것 같은 학생도 있고, 20대로 보이는 학생 등 다양하다. 강당에는 벌써 많은 학생으로 꽉 찼다. 콩나물시루에 들어앉은 콩나물 머리같이 학생들의 까만 머리와 초롱초롱한 눈빛이 확~ 소영의 눈앞으로 다가온다.

’아이구! 저들과 같이 공부해야 하는데, 해낼 수 있을까?‘

이어서 대학 직원이 나와서 통신대에 관해 설명한다. 비닐 가방을 하나씩 나눠 준다. 거기에는 대학에 대한 설명서가 들어있고, 볼펜까지 들어있어 메모장을 준비하지 않은 나를 안심시킨다.

먼저 이 학교는 컴퓨터를 이용해 수업하는 방식 즉 ’이런닝‘입니다. 컴퓨터에서 자신의 주민번호를 넣고 들어가 로그인을 해야만 대학의 모든 프로그램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작업이 어려운 사람은 자녀의 도움을 받거나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또 우리 대학에서는 멘토링제도가 있습니다. 즉 선배가 멘토가 되고 신입생이 멘티가 되는 겁니다. 이 제도를 이용하고 싶은 사람은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예외로 다문화 가정 학생은 자동적으로 멘토가 정해집니다. 궁금한 일이 있으면 이 멘토에게 문의하십시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이 반이나 된다. 앞으로 어떻게 공부할까? 태산이 앞을 막아선다.

’난 컴퓨터도 없잖아! 애를 데리고 해 낼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마쳤습니다. 과별로 모여서 친목도 도모하고 학습에 도움을 얻었으면 합니다. 또 그룹스터디도 있으니 원하는 분은 다양하게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모쪼록 졸업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기 바랍니다.

앞자리가 어수선하더니 각 학과 대표가 피킷을 들고 자신의 학과 학생을 모으고 있다.

눈을 두리번거리며 난 어디를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유아교육과라는 피킷이 보인다. 나는 서준이 손을 잡고 그쪽으로 향한다. 20명 정도가 우리 학과 피킷 아래 모인다.

우리 과 대표는 우릴 데리고 조용한 교실로 들어간다.

서로 인사하고 자기소개를 간단히 했는데 외국인은 나밖에 없다. 과 대표는 나에게 다가와 힘들지만, 열심히 해 보자고 한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어려우면 연락하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멘토한테서도 전화가 올 것이라 한다. 멘토는 3학년 선배니까 잘 이끌어 줄 것이라 한다.

이 공부는 애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다문화 학생은 학습비도 정부에서 보조해 준다. 이런 혜택을 놓쳐서는 손해다. 그러나 이건 순전히 독학이니까 공부가 어려울 것 같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에게

“나 통신대학에 합격했어요. 어려워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성적이 좋아서 붙었는가 봐요.”

남편은 싫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라는 마음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더니,

“통신대 공부는 무척 어려워! 컴퓨터가 있어야 할 거야. 당장 컴퓨터 사러 가자.”

’이게 무슨 꿈 같은 말이냐! 남편이 변했나?‘

이날 저녁 남편은 나를 데리고 전자제품 판매장으로 갔다. 그 매장에서 가장 비싼 노트북 컴퓨터 한 대를 샀다.

그다음 날은 통신사에 연락해 인터넷을 연결해 주었다. 프린트 기는 다음에 사 준다면서 출력할 게 있으면 복사 집에서 하란다.

이만하면 감지덕지다!

그간 남편은 내가 학력이 부족해서 불만이었던 것 같다. 이제 대학 공부를 하게 된 아내가 남 부럽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라 믿는 것 같다.

이 공부를 해낸다면 내 앞길에 구름 낀 볕 조각이라도 비칠까?

내 마음속엔 두 가지 마음이 자웅을 겨루며 격투 중이다. 해낼 수 있다는 희망적 생각이 솟아나면, 어려워서 못해! 라는 마음이 그 싹을 뭉개고 만다.

’어쨌든 시작해 보는 거야! 시작이 반이라고 했지?‘

먼저 컴퓨터에 들어가 학번으로 홈페이지를 연다. 다음으로 아이디를 정하고 비번을 정해서 로그인한다. 여기까지는 식은 죽 먹기로 해낸다.

로그인과 더불어 나에 대한 정보가 뜬다. 너무 신기해서 이방 저방을 돌며 탐색한다. 자료실에도 들어가 보고 지역대학에 들어가 학습 교재와 학습 시간 등을 꼼꼼히 살핀다.

1학년에 한해서는 튜터라는 지도교수 비슷한 사람이 도움을 주고 있다. 이게 튜터 제도다. 여기다 멘토링제도도 있으니 웬만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튜터에게는 인터넷으로 문의하고 멘토에게는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나의 멘토와도 이미 통화했다.

교육 제도가 너무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 3월 2일부터 학기가 시작되면 인터넷 강의가 열린다. 한 학기에 한 번 3일간 출석 수업도 있다. 그때는 같은 과 학생을 만날 수 있으니 기대된다.

그러나 서준이 문제로 출석 수업이 어려울 것 같다. 출석을 못 하면 시험으로 대체하는 방법도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교재를 사야겠기에 서점을 검색해서 교재를 구하러 갔다. 통신대 교재는 서점에서도 별도로 준비해 두고 팔고 있었다.

교재 6권을 구해왔다. 물론 교재비는 정부 부담이다.

이러닝(e-Iearning) 수업이 진행된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편리한 점이 훨씬 많다. 시간 제약이 없으니 시간 나는 대로 언제든지 수업을 들으면 된다. 이해하기 어려우면 몇 번을 반복해서 들을 수도 있다.

교재를 펴 본다. 이게 얼마 만이야? 1년만 더 공부했으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을 텐데….

이제 그 아쉬움은 뒷걸음쳐 나갔다. 대학교재를 받았으니 난 이미 대학생이 된 것이다. 학생증도 신청해 두었으니 완벽하게 대한민국의 대학생이다.

6권의 교재를 훑어보니 재미있을 것 같다.

사회 복지 개론, 세계의 역사. 아동 관찰 및 행동 연구, 유아교육 개론, 유아발달, 그리고 원격 대학교육의 이해다.

이 중에서 개론이니, 교육의 이해니. 하는 과목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글로 된 문장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낀다. 한 페이지를 읽는데도 뜻을 몰라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한 시간 공부하는데 겨우 2페이지를 했을 뿐이다. 두툼한 게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유아발달과 아동 관찰 및 행동 연구는 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서준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곤 방에 들어박혀 공부만 한다. 책을 읽고 방송을 듣고, 열심을 낸다.

퇴근한 남편에게는 적당히 대하고 하던 공부를 계속한다. 이런 일이 잦아지니 남편의 표정이 또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한다.

“공부는 혼자 있을 때 하는 거야. 집은 귀신같이 해 놓고 공부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니?”

이번엔 남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봐도 너무하다. 잠시 내 신분을 잊고 있었다. 이렇게 공부하다간 한 달도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다.

공부시간을 오전으로 정한다. 오후에는 집안 정리정돈과 반찬거리도 준비해 놓는다

모처럼 남편이 마음을 열어줬는데, 화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각보다 공부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대학 학보도 나의 나침반이 되어 나를 인도한다. 여기에 중간시험 날짜가 공고되고, 과제물이 시야로 확 들어온다.

’이걸 어떻게 하지?‘

멘토에게 전화해서 문의했더니, 과제물이 점수 따기가 쉽단다. 과제물은 정해졌으니 주위의 도움을 받아 제출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원격대학교육은 한번 인터넷에서 읽어내려가면 통과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과제물 2과목은 멘토 선배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고, 한 과목은 한국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제출에 성공했다. 그다음은 출석 수업이 2과목이고, 1과목은 중간 시험날 시험을 봐야 한다,

출석 수업이 늦게 끝나므로 서준이를 맡길 데가 없어 데리고 갔다. 처음엔 과자와 장난감으로 달랐으나, 오후부터는 칭얼대기 시작했다.

결국, 수업 도중에 나오고 말았다. 그다음 날도 출석은 했으나 수업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과 대표가 출석 시험 범위를 알려 주고 집에서 공부하라고 한다.

’난감하다.‘

어려운 공부에 서준이까지 혹이 되니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배가 된다.

악전고투, 고군분투의 시간도 세월에 밀려 주춤주춤 물러나고 만다. 세월은 2학기를 마치고 겨울로 접어든다.

내 앞에 떨어진 성적표는 참담하다. 1학기에 이미 3과목이 탈락했다. 그러면 이번 2학기는?

‘설마’ 했는데, 이번엔 4과목이 과락이다. 통과한 과목은 1학기처럼 2과목이다.

1학기교재 중 ‘원격 대학교육의 이해’라는 과목은 읽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다. 그 과목은 학점에는 관계없는 과목이다. 이래서 1학기에는 3과목이 과락이다. 없는 집에 외상값 밀리듯 과락한 과목이 쌓여간다. 이들 과목의 학점 재신청은 내년 1학기와 2학기에 할 수 있다. 재신청한다고 학점을 모두 딸 수 있다는 보증도 없다. 그러면 2학년 공부는 또 어떻게 하지? 이러다가는 1학년만 몇 년을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처음 먹었던 희망이 소나기에 흙덩이 쓸려가듯 다 쓸려나가고 절망의 고랑만 깊이 패인다.

소영은 또다시 낭떠러지 앞에 선다. 진퇴양난이다.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바보였던가?’

때맞춰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소영을 깨우쳐 현실의 고삐를 단단히 잡으라 아우성이다.

전화기 저쪽에서 멘토 언니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소영을 위로한다. 만나서 차라도 한 잔 마시잖다. 그간 전화 통화는 여러 번 했지만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소영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 2호인 멘토 언니를 만나러 나간다. 고마운 사람 1호는 단연 한국어 선생님인 손 선생님이시다. 그분은 포근한 친정어머니 같다. 마음속에 2호로 정한 이 언니도 친언니같이 다정하다.

고마움을 어떤 식으로든 표시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에 만나서 내가 차를 사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간다.

언니가 먼저 와 있다. 4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아직 아가씨같이 풋풋하다. 세련된 몸매와 옷차림은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언니는 결혼 생활이 여의치 않아 작년에 이혼했다고 한다. 딸이 하나 있는데, 이미 고등학생이고, 학비랑 양육비는 전남편한테서 받는다고 한다.

언니는 지금 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이번 통신대학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나면 어린이집을 설립하는 것이 꿈이란다. 언니는 3학년 학점을 무난히 통과했으니 1년 후에 자격증이 나오면 처음엔 어린이집 교사로 경험을 쌓은 후 50살이 넘으면 어린이집 원장이 될 것이란다. 그때 내가 자격증을 따게 된다면 직원으로 채용하겠단다.

“소영씨! 학점 놓쳤다고 실망하지 마라. 통신대는 원래 4년 만에 순탄하게 졸업하기는 어려워. 한 10년은 잡아야 할 거야.”

이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로가 된다.

‘한국 사람도 하기 힘든 공부라고 하잖아! 그럼 내 머리가 특별히 나쁜 건 아닐 수도 있어.’

언니를 만난 후 소영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래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지. 또 너무 급히 서두른 점도 있어. 이제 천천히 쉬어가면서 공부하자.’

그날 이후 언니랑은 가까운 사이가 됐다. 언니는 우리 집을 알려 달래서 찾아오기도 했다. 서준이 먹을 과자랑 치킨을 들고 와서 서준에게 인기를 얻었다.

통신대학에서 성적은 바닥을 쳤지만 좋은 언니를 얻게 됐으니 공부 못지않은 소득을 얻었다.

이래서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나보다.

2학년은 휴학하기로 마음먹는다. 과락 과목만 쌓여가는 꼴을 보면 못 견딜 것 같다. 살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무모한 도전이었다. 대학 공부를 떡 먹듯 그렇게 쉽게만 생각했던 게 잘못이다.

누군가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지. 돈이 많으니까? 그냥 등록해 놓고 세월만 보내면 졸업장을 받겠지.’ 이런 생각들로 꽉 차 있었는가 보다. 그들을 보면 왠지 모를 질투심과 위화감만 생겼다.

지금 내가 당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힘들게 버틴 결과였다. 더군다나 통신대학은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지니 더욱 그렇다. 통신대학 졸업생이 위대해 보인다.

한국말도 그렇다. 말을 좀 한다고 학문으로 섣불리 들어갔다는 생각이다. 한국어는 깊이 들어갈수록 어렵다. 모든 외국어가 다 어렵겠지만 한국어의 민감한 표현을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게 외국인의 한계점이 아닐까?

한 일 년쯤 공부를 더 해보고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럼 남편에게는 뭐라고 설명하지? 컴퓨터까지 사 주고 나름대로는 지원을 했다고 생각할 텐데….

내년에 서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그 뒷바라지를 잘 하면 남편 앞에서 체면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서준이는 중국어를 제법 잘한다.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물론 서준이의 총명함도 한몫했다.

한 번은 중국 동생과 통화하는데 서준이가 얼핏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중국말을 어떻게 알아듣겠어. 라고 생각하고 장시간 통화했다.

세상에나! 이야기 내용을 거의 다 알아들은 게 아닌가!

“엄마! 대학 공부 그만뒀어? 중국 할머니가 많이 아픈가요? 아빠가 돈을 조금 줘요?”

내가 했던 말을 거의 다 알아듣고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천재가 아닐까?‘

이제 서준이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겠다. 아들이 이렇게 자랐으니 교육과 육아에 신경 써야겠다. 중국어 공부도 박차를 가하고 영어도 가르쳐야겠다. 사실 나의 영어 실력은 아들을 가르칠 수준은 아니지만, 교재가 잘 나오고 있으니 그걸 가지고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 같다.

 

 밍밍의 전화를 받았는데, 화장품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고 한다. 나보다 끈기 있게 잘 버티는 것 같다. 중국의 아버지와 동생을 생각해서 더욱 힘을 내는가 보다.

이제 단골도 생겨서 수입이 괜찮은 편이라 한다.

주말에 서준이 데리고 밍밍과 그 딸 채은을 만났다. 두 아이는 훌쩍 자라있었다.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대화도 잘 되고 있다. 애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듯 우방랜드 자유 이용권을 끊어 하루를 봉사한다. 두 아이는 남매처럼 잘 어울려 논다. 나도 밍밍이 남 같지 않게 느껴진다.

통신대는 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어려워서 도전을 선뜻 못하겠다고 한다. 밍밍은 나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치밀한 성격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밍밍을 보면서 나의 무모했던 도전을 반성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학문의 열망과 대학생에 대한 부러움이 한꺼번에 솟아올랐던 것이리라.

밍밍과 채은이가 곁에 있어 행복하다. 실컷 떠들고, 향수도 함께 나누고 나니,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

“소영아! 서준이가 내년에 입학하지? 학교생활에 신경을 써야 할 거야. 자칫 외국인 엄마라고 무시당할 수도 있어. 한국 애들에게 밀리면 안 돼. 학습 준비물 등 꼼꼼히 챙겨줘야 해.”

밍밍의 충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마음속의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잡아당겨야 한다.

서준이는 유치원에서 어떤 여자아이를 때렸다고 항의받은 적이 있다. 자신은 그 애가 좋아서 같이 놀자고 끌어당겼다는데, 서준의 거친 동작이 그 애의 마음을 상하게 한 듯하다.

’이게 제 아빠 탓인가? 늘 나에게 거칠게 대하고, 욕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야.‘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아닐 거야!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럴 거야! 이제 자랐으니 학교에서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채은이와 사이좋게 놀고 있는 서준을 보며 도리질을 한다.

’이렇게 똑똑하고 잘 생긴 아들이 그럴 리 없지! 지금도 저렇게 잘 놀고 있잖아.‘

 

 멘토 언니가 만나자고 한다. 이번엔 서준이도 데려오란다. 이번 토요일도 남편은 근무한다고 나갔다. 난 마음 편하게 서준이를 데리고 멘토 언니와 약속한 곳으로 갔다. 언니는 서준이 데리고 만둣집으로 가잖다. 서준이에게 만두랑 먹고 싶은 것을 사 주고 싶다나!

언니는 서준에게 돈을 만원 쥐여주며 과자 사 먹으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분식집에서 만두랑 김밥, 떡볶이 등 여러 가지를 시킨다. 고맙고 미안해서 도리어 불편하다. 또 서준이가 먹을 것을 포장해 달래서 서준이에게 준다.

고맙다고 인사했더니

“오늘 한 사람 소개하려고 하는데, 아주 좋은 사람이야!”라며 나를 사무실 비슷한 곳으로 안내한다.

누구의 사무실인지는 몰라도 칸막이가 군데군데 처져 있고, 조용한 게 비밀회담하기에 알맞은 장소 같다.

조금 있으니, 중년 부인 한 사람이 들어온다. 자신을 전도사라고 소개하며,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단다.

나는 공부라면 무슨 공부든 일단 받아들인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그만두게 됐을 때의 실망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검정시험에 도전했고, 통신대학에도 무모하게 도전한 것이다.

태산같이 높은 통신대에 들어가 겨우 1년 만에 손들고 나온 것에 대해서도 늘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의 이런 마음을 멘토 언니는 짐작했으리라.

’배움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고? 그게 성경공부라!’

성경을 배우는 게 무슨 공부가 되냐고 물었더니

“성경을 알면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내생에서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어.”

“이보다 더 귀한 공부가 어디 있니?”

전도사라고 소개한 사람이 나에게 성경책 한 권을 선물하겠다고 한다.

“이 책 얼마예요? 내가 낼게요.”라고 했더니 공부만 열심히 하면 책값은 문제없다고 한다.

“소영씨! 친구가 있으면 소개해요. 같이 배우면 좋잖아요.”

“네. 알겠어요. 담에 친구 한 명 데려올게요.”

소영은 이게 기회인가? 세상살이에서 몇 번의 기회가 온다는데, 이번 기회는 좋은 기회이길 빈다.

서준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 소영은 밍밍과 약속 장소로 갔다. 전도사님과 약속대로 그 사무실에서 멘토 언니와 밍밍, 이렇게 네 사람이 만나게 됐다.

전도사님은 밍밍에게도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내민다. 밍밍과는 검정시험 반에서 같이 공부한 바 있어 동급생처럼 친숙하다.

이제는 성경공부를 한단다. 중국에서는 들어 보지도 못한 말인데 귀를 즐겁게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귀하게 태어난 존재다.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죽은 후에는 영생을 얻는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다.

‘뭐? 내생이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은 희망적이다.’

밍밍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공부할게요. 대신에 한국에 와서 어려웠던 점을 얘기해 봐요. 뭐든지 돕고 싶어요.”라고 전도사님이 화제를 꺼낸다.

한 걸음 가까워진 마음으로 전도사님을 믿고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낸다. 나의 이야기를 듣던 전도사님은 중간중간에

“힘들었겠다. 이제는 걱정하지 말아요,” 라고 추임새를 넣는다. 옆에 있던 멘토 언니도 우리 같이 힘을 모아 잘살아 보자고 한다.

마치고 밍밍과 차 한잔을 하며 얘기했는데, 밍밍은 전도사님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눈치다.

“밍밍! 내생이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어?”

“응! 난 전도사님이 거룩해 보여. 우릴 도우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그분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알 수 있어.”

“소영아! 우리 열심히 해 보자.”

밍밍 얘기를 들은 소영은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도 꼭 도깨비에게 홀린 듯이 멍때리기만 하고 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집안은 더욱 제멋대로다. 집안 정리며 부엌 정리도 최악을 향해 나가고 있으니 남편의 핀잔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준 아빠의 퇴근 시간만 되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는데, 그게 좀 해소된 것 같다. 그러니까 간이 커졌다는 얘기가 된다.

위대한 능력을 갖춘 자가 내 주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느낌이다.

‘내 주위에도 나를 돕는 사람이 있다. 혼자가 아니다. 특히 그들은 강한 힘을 가졌어.’

입속에서 이 말을 굴려 본다.

2번째로 전도사님을 만나러 간다. 이번엔 멘토 언니는 오지 않고 전도사님과 밍밍 이렇게 세 사람이 마주 보고 정답게 앉는다. 만날 때마다 전도사님은 밥을 사고 커피도 사고 살뜰하게 챙긴다.

“외국 생활이 힘들지 않으냐? 시집과의 관계는 어떠냐?” 등 사생활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이렇게 친절하고 고마울 수가!’

전도사님은 성경책을 펴 보라고 하더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구절에 줄을 긋고 설명을 시작한다. 소영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자신은 항상 슬프고 불안했으니까….

기쁨이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상일 뿐, 현실은 늘 우리 집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기도하는 법을 알려 줄게요.”

“매일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즉 희망 사항이나 억울한 일을 하나님께 아뢰면 해결해 줄 거예요. 그러니 항상 기뻐하고 기도해야 행복이 오는 거예요.”

이 말씀은 천국에서 떨어진 말씀 같다.

‘기뻐하고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네!’

감동의 물결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이게 종교의 힘이구나! 정말 사실일까? 기도하면 이루어질까?’ 이 부분은 자신이 없지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아주 좋은 말씀인 것 같다.

우울하고 불안에 떨던 내 마음을 기쁨으로, 빛의 세계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림자 속에서 밝은 빛으로 나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 같다.

이후 밍밍과 나는 전도사님과 만나 몇 번 더 공부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 외에 내 마음에 화살처럼 꽂히는 말씀은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성경엔 정말 좋은 말씀이 가득 들어있구나! 내 앞에 신천지가 열리는 기분이다.

밍밍도 나와 똑같이 감동했다고 한다.

전도사님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또 멘토 언니는 전도사님을 소개했고, 옳은 길로 인도해준 은인이다전도사님이 밍밍을 태우고 우리 집 앞에 왔다고 문자로 알려 왔다. 나는 얼른 뛰어나가 전도사님을 맞는다.

“전도사님 안으로 들어오세요. 중국 차 한잔 타 드릴게요.”

“아니! 빨리 타세요.”

“어느 정도 기초 공부는 했으니 더 큰 곳으로 가서 공부할 거예요. 여러분처럼 수업을 듣고 있는 분들이 많은 곳에서 공부할 거예요.”

전도사님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빨리 차에 오르라고 채근한다.

전도사님이 이끄는 대로 밍밍과 소영이 따라간 곳은 밖에서 봤을 땐 무슨 건물인지 간판도 없는 건물이었다. 위치도 잘 모르겠다. 밍밍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겠단다.

계단을 오르고 어둑한 복도를 지나간다. 내가 늘 숨어 지내던 그림자 속 같다.

좁은 복도를 지나 어느 방문 앞에 섰는데, 안이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여니 TV에서 본 교회 같다.

아!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질서 정연하게 앉아있다. 의자도 없이 땅바닥에 빽빽이 들어차 있다.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도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고 앉아있는 모습도 질서정연하다.

입구에서 가입 신청서를 작성한다. 주소 나이 직업 주민등록번호 등 신상을 적으라고 해서 좀 내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거절할 수 없다.

전도사님이 우리 둘을 어느 구간으로 인도한다. 거기엔 외국인들의 구역인 것 같다.

간단하게 소개하고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이 많은 사람이 벼 논의 모처럼 줄을 맞춰 질서를 지키며 앉아있다. 아마 팀끼리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다.

“여기가 성경공부 하는 곳이에요?”라고 물었더니

“신도 자격을 따려면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우리 둘은 짐짝 버려지듯 이곳에 버려졌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밍밍은 마치면 전도사님이 데리러 올 것이라고 한다.

우리 전도사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분 같은 사람이 나와서 우리에게 환영한다고 처음 말문을 연다. 대부분은 처음이 아닌 듯 익숙해 보인다.

손뼉 치고 노래 부르고, 또 성경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부르고, ’할렐루야‘ ’아멘‘ 이런 생소한 언어들이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그래도 전도사님을 믿고 공부해 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밍밍은 별 거부감이 없는 듯하다.

프린트물을 나눠주며

“열심히 공부해서 내일까지 모두 외워야 해요.”

그분은 진도를 나가려면 매일매일 나눠주는 과제물을 점검받아야 한다고 한다.

설교자가 바뀌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죽은 후에는 신천지가 열리고, 거기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한다.

학습을 통과하면 지도자가 되어 뭍 백성을 지도하게 될 것이라 한다.

설교 도중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라는 말을 반복해서 한다.

’죽으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는 것인지? 아님! 성경공부를 잘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말들만 머리 위에 쏟아진다. 그중에서 내 마음에 딱 꽂히는 말은

’인간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돈도 명예도 그리고 부모도 자식도….‘

이 말은 내가 인정할 수가 없다. 부모는 이미 버리고 떠났지만, 자식도 필요 없다는 말은 납득 할 수 없다.

나의 희망이 바로 아들 서준인데, 필요 없다니?

시계도 없는데, 휴대폰을 켜지 못하니 시간을 모르겠다.

서준이가 돌아올 시간이잖아! 큰일이다!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위치를 몰라 무조건 택시를 잡고

“북구청 부근으로 가 주세요.”라고 했더니 한참 만에 데려다준다.

별로 먼 곳은 아닌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머리가 혼란스럽다. 새 하늘 새 땅에서 살아가려면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도 같고, 여기서 멈춰야 할 것도 같다.

밍밍한테 전화했더니, 자신은 끝까지 공부해 보고 싶다고 한다.

’그럼 내 생각이 틀렸단 말인가!‘

좀 더 공부해 보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전도사님께 얘기해서 서준이가 오는 시간을 조정해 달라고 부탁한다.

“소영씨 그 점은 염려 말아요. 서준이는 소영씨가 늦으면 내가 데려와서 돌볼게요.”

이 말을 들으니 과연 전도사님은 훌륭한 분이구나! 내가 섣불리 판단했다는 생각이다.

마음을 다잡고 성경공부에 열심을 낸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또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만 가득하다.

어제 받은 숙제를 하기 위해 프린트물을 들여다보니 암기가 되지 않는다. 특히 내생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믿어지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생소한 이야기지만 귀가 번쩍 열리는 이야기도 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과 항상 기뻐하면 이 땅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은 처음 접하는지라 신선하다. 그 외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면 우리 신도들은 그들의 지배자가 된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오늘도 밍밍과 같이 교육장으로 가서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팀장이 오더니 어제 과제물을 점검한다. 나는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밍밍은 통과할 정도로 열심히 했는지, 칭찬이 돌아온다. 나는 다시 공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합동 강의 시간이다. 모두 두 손 들고 ’아멘‘ ’아멘‘ 하며 신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이 많은 사람이 매일 여기 모여 이러고 있으면 누가 돈을 벌고 누가 가정 살림을 하나? 또 자식도 부모도 필요 없다니? 이 말도 수긍할 수 없다.‘

합동 강의 시간에 강의한 강사는 청중을 향해서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믿습니다.” 청중의 우렁찬 답변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손을 드세요.”

어느새 내 팔이 번쩍 들렸다. 청중의 눈초리가 나를 이상한 동물 보듯 한다.

곧바로 팀장이 나에게로 득달같이 달라붙는다.

“염 소영씨! 이쪽으로 오세요.”

팀장은 나를 별실로 데려가 특별교육을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매님! 선포되는 말씀은 모두 믿어야 해요. 기도와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열심히 하면 해결될 문제에요.”

팀장은 성경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요한계시록’에 모두 적혀있는 말씀이니 진리의 말씀이며 우리가 꼭 믿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한다.

나는 별실을 나와 다시 합동 실로 돌아갔다. 그래도 내 머릿속엔 의문만 남는다.

다음 날은 전도사님이 나와 밍밍을 팔공산으로 데려갔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으니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바람을 쐬고 맛있는 음식도 먹잖다.

내가 믿지 못하겠다고 했으니 나를 특별히 관리하는 듯하다.

이럭저럭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한국어 손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소영씨! 요즈음 전화도 안 받고 무슨 일 있어요?”

“선생님! 지금 시간 있으면 우리 집으로 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

모처럼 손 선생님과 그간의 밀린 이야기를 하며 행복을 느낀다. 점심으로 콩나물밥도 해 먹었다. 또 소영은 만두를 빚어 손 선생님께 대접한다. 특히 손 선생님은 서준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올 때마다 서준이와 놀아주신다.

“선생님 저 그동안 성경 공부했어요.”

“뭐라고? 성경공부를 했다고? 어디서? 누구랑?” 선생님의 질문은 소나기 같다. 소영을 향해 질문 공세를 편다. 소영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니! 선생님! 무섭게 왜 그러세요?”

그때야 선생님도 정신을 가다듬고

“놀랐다면 미안해. 내가 집히는 데가 있어서 그래.“

”혹시? 신천지라는 말은 없었니?“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어요. 설교 중간마다 그런 말이 많이 나왔는데,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손 선생님은 각오를 단단히 한 듯 말을 잇는다.

”소영씨! 내 말 잘 들어요. “라고 이어지는 선생님의 설명은

한국은 자유 나라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도 있어요. 그래서 사이비 종교도 많이 있어요. 그걸 구별하기가 소영 씨에게는 힘들 거야.

”선생님 사이비가 뭐예요?“

그때 선생님은 ‘似而非’(사이비)라고 한자로 써서 설명한다. ‘같은 것 같으나 다르다.’라는 뜻이지. 또 異端(이단) 이라고도 해. 즉 끝이 다르다는 뜻이지.

한 마디로 풀이하면 이런 종교는 처음에는 기존 종교와 같은 것처럼 접근하지만, 결국에는 무서운 범죄 집단이라는 것이다.

손 선생님의 지인 중에는 신천지에 빠져서 가정을 버린 사람도 있다고 한다.

”소영 씨가 공부한 그 집단이 신천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 짐작은 맞는 것 같아.“

의심되거든 인터넷에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을 검색해 보면 알게 될 것이야.“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그럼 내가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말인가!‘

’만약에 그게 맞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손 선생이 돌아간 후 소영은 재빨리 ’신천지‘를 검색한다.

어쩜 내가 당한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당했던 사람의 글이 올라와 있다. 그들의 수법은 다양했다.

가장 먼저 대상자를 물색하고, 은근히 접근해서 그 사람의 신상과 처한 위치, 추구하는 이상 등을 소상히 파악한다.

다음 단계는 이를 보고 받은 본부에서 지침이 내려온다. 첫 번째 방법이 바로 성경공부다. 친절하게 베풀면서 상대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해서 성경공부가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학습장으로 데려간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바로 소영과 밍밍이 당한 과정이다.

인터넷에서는 소영처럼 처음엔 모르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사연을 기록한 것도 있고, 가족 중 신천지에 빠진 걸 알고 그곳에서 빼내려 해도 본인이 절대 나오질 않겠다고 해서 걱정이 많다는 글도 올려놨다.

소영은

’내가 무시무시한 집단에 빠졌구나!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라는 생각으로 마음엔 온통 먹구름이다.

멘토 언니에게 먼저 전화한다.

”언니! 나 이제 성경공부 못하겠어요.“

”뭐라고? 왜 그래?“

”어쨌든 내일부터는 공부하러 안 갈래요.“

”뭐가 이런 물건이 있어? 내가 그만큼 잘해 줬는데, 그동안 책 주고, 공부 가르쳐 주고, 밥도 사 주고 공을 들였는데 배은망덕한 인간이네!“

”지금 당장 나와!”라며 뒤에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퍼붓는다. 아마 욕인 것 같다.

소영은 갑자기 몸에서 소름이 확 돋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나도 밀려서는 안 되겠다. ‘라는 오기가 생긴다.

“이렇게 욕하고 협박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이렇게 세게 나오니까 조금은 수그러들면서

“한 번 만나서 얘기해야 하잖아.”

소영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손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한다.

바쁜 일을 미루고 찾아온 손 선생님이 고맙고, 지금은 나를 건져줄 구세주다.

“신천지가 확실하지?”

“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나 내가 당한 게 똑같아요.”

이 말은 들은 손 선생님은 차분하게 대처할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무슨 말을 하든 그들과 만나서는 안 된다. 멘토, 전도사, 심지어 밍밍까지도….

둘째, 당분간 집 밖으로 혼자서는 나가지 말 것,

셋째, 일단 전화가 오면 받아서 녹음할 것. 그래야 증거가 확보되니까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도 안 되면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을 소개해 줄게. 그 방면에 능통한 목사님을 소개해 줄 수 있어.

“소영씨!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직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는 것이야. 당사자가 빠져나올 의지가 강하니까 됐어.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성공할 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들은 폭력은 쓰지 않는가 보더라.”

소영은 당장 밍밍에게 전화한다.

“밍밍! 큰일 났어! 우리가 성경 공부한 집단이 신천지라는 이단이래.”

“그래? 난 이미 알고 있어. 세상 사람들은 이단이라지만 그건 가짜야. 너도 흔들리지 마.”

“너 인터넷을 찾아봐. 신천지의 실상이 낱낱이 나와 있어.”

소영의 말을 듣고 있던 밍밍은 조용히 소영을 설득하려 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한때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파룬궁(法輪功), 즉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알고 있을 거야. 정부에서 이 집단을 탄압하니까 국민은 이들이 몹시 나쁜 짓을 하는 집단인 줄 알았어. 그러나 실제로는 진(眞), 선(善), 인(忍)을 원리로 하는 중국 전통적인 심신 수련법이야.

중국 정부에서는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탄압하기에 이르고, 결국은 국 외로 추방했지.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들을 옹호하고 나섰어.

신천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야. 너도 공부해봤지만 얼마나 좋은 말이 많아.

밍밍은 완전히 세뇌된 것 같다. 소영은 마음이 아프다. 한국에 와서 친형제처럼 마음을 주고받으며 지내왔는데, 이제 이별을 고해야겠다.

“밍밍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 네가 거기서 빠져나온다면 이전의 관계를 회복하겠지만, 그러지 못하겠다면 연락하지 마라.”

전화를 끊고 난 소영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모처럼 소리 내어 통곡한다. 또 한고비의 태산을 넘는다.

’밍밍과 같이 신천지에 들어갔듯이 같이 빠져나오면 힘이 될 텐데….‘

’들어갈 때는 내 말을 잘 듣더니만 이제 빠져나올 때는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구나! 그렇담 나 혼자라도 빠져나와야지.‘

’이 구릉에서 빠져나오려면?‘

먼저 전화번호를 바꿔버릴까? 아무래도 집을 옮겨야 할 것 같다. 우리 집을 알고 있으니 얼마든지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또 남편이 알면 어떻게 하지?

불안하다. 두렵기까지 하다.

퇴근한 남편에게

“아파트는 언제 입주해요?”

“곧 갈 거야! 조금만 참아!”

“이제 전자제품이랑 주방 기구 등을 다시 사야 할 거야.“

소영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래! 전화번호를 바꾸고, 집을 옮긴다면 그들인들 어찌 나를 찾아낼 수 있겠나?‘

우리가 이사하려는 아파트는 대구시가 아닌 인근의 경산시다.‘

 

T.V 메인뉴스에 코로나 19라고 뜬다. 생소한 말이다. 아주 무서운 전염병이란다. 전파력이 강하고 자칫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단다. 국내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다. 세계 각국으로 퍼져 사망률을 높이고 있다.

그 병이 중국 우한에서 발병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내 조국이 그 무서운 병균의 진원지란 말이다.

환자 발병 순서대로 번호를 붙이고 있다. 진원지가 중국이라고 하니, 중국 사람을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2020년 2월 18일 드디어 31번 환자가 발생했단다. 이 환자의 접촉 경로가 복잡하다.

놀랍게도 대구 신천지 교인이라는 판명이 났다.

T,V에서는 대구 신천지교회의 집단 예배 장면이 나오고, 놀라운 보도가 나온다. 신천지의 비리가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어느 방송사에서는 신천지에 대해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신천지 교주인 이만희 회장에 관한 내용을 방송사마다 앞다투어 방영하고 있다.

감염자는 대부분 신천지 예배에 참석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날이 갈수록 신천지를 중심으로 코로나 환자가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다.

대구를 우한처럼 봉쇄해야 한다고도 한다. 다른 지방에서는 대구에 살거나 대구에 다녀왔다고 해도 벌레 보듯 한다.

가게 문이 닫히고 학교는 휴교령이 내리고,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금하게 됐다.

이건 전쟁보다도 더 무서운 바이러스라는 것이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이 작은 것이 사람 몸에 들어오면 사람을 죽이고 치명타를 입힌다.

나에게는 대구라는 굴레 외에 중국인이라는 굴레와 또 나만 알고 있는 신천지라는 굴레가 쇠사슬처럼 내 몸을 칭칭 감고 있다.

정부에서는 신천지 신도의 명단을 제출하란다.

그러면 나에게도 조사가 들어올 것이고, 남편이 알게 된다면….

제대로 숨쉬기가 어렵다.

’나도 신천지 명단에 들어있을까? 신상을 기록하긴 했는데, 만약 발각된다면!‘

불안해서 손 선생님께 전화해 본다. 손 선생님은 나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 애쓰신다.

”소영씬 아직 정식 신도가 아니고 교육생일 거예요. 중도에 나왔으니까….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그들과 접촉했잖아. 보건소에 전화해서 PCR 검사를 받아봐요. 남편 몰래 할 수 있잖아.“

그렇지! 그게 문제지!

용기를 내서 보건소에 전화했다.

”신천지 교인과 접촉했는데, 어쩌면 좋아요? “라고 했더니 검사받으러 나오란다.

서준이를 데려가는 게 겁나서 손 선생님께 잠깐 맡기고 가까운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 문자를 받기까지 초주검 상태다. 입맛도 없고 정신도 없다. 다만 무사하기를 하나님께 빌어본다.

’염소영씨의 코로나 검사결과는 음성입니다. ‘라는 문자를 받고는 안도의 숨을 쉬어본다.

정말 다행이다. 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코로나로 인해 신천지교회에 풍랑이 몰아쳤으니, 대부분 신자는 지하로 숨어들게 됐다. 그래서 전도도 하지 않고 신도끼리도 연락하지 않는단다.

나는 비로소 신천지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기분이다. 소식에 따르면 나처럼 멋모르고 발을 디밀었던 사람 중에는 신천지의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돼서 그곳을 빠져나오게 됐다고 한다.

모처럼 밍밍에게 전화해 본다. 밍밍도 신천지의 실상이 밝혀졌으니 나와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밍밍 그동안 잘 지냈어? 신천지가 어떤 곳인지 이제 알게 됐지? 인제 그만 그곳에서 나와 이전처럼 우리 잘 지내보자.“

그런데 밍밍의 대답은 뜻밖이다.

”난 말이야 우리 신천지교회가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 집단의 세력이 커지니까 우릴 모함하고 있어.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시니 금방 회복될 거야.“

정말 기가 찬 일이다.

무엇이 그들의 뇌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일까?

마음을 주고받았던 유일한 친구 밍밍이 신천지의 소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자유민주주의 나라의 단점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중국 같았으면 정부가 개입해서 이들을 추방하거나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막았을 텐데….

이런 자유주의 나라에서는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임무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할 것 같다.

 

한고비 넘기니 이제 모처럼 마음이 안정되고, 가정에도 평화가 왔다. 남편은 입주 준비에 몸과 마음이 바쁘다.

입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남편이 해야 하니, 그럴 것이다.

입주일을 정하고 이삿짐센터에도 제날짜에 예약해야 한다. 그 외 가전제품과 주방 기구도 새것으로 바꿔준다니 기쁜 일이다. 내 마음에도 봄 아지랑이처럼 희망이 아롱아롱 솟아오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사할 집은 멘토 언니나 전도사님이 몰랐으면 좋겠다. 아니? 몰라야 한다. 처음 신천지교회에 발을 들이밀 때, 구주소를 적어놨기 때문에 나를 찾을 수 없다. 주소는 유일하게 손 선생님만 알고 계신다.

이제 홀가분하게 무거운 짐 벗어 던지고 새 출발 해야 한다.

 

소영은 중국에서 그려보던 이상향으로 한 걸음 더 들어오고 있다. 바로 새 아파트 입주다.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 집이야? 한국으로 시집왔을 때 3년만 살면 새 아파트로 이사할 것이니 조금만 참으라는 말을 한지가 벌써 6년이 흘렀다. 아파트 입주는 자꾸만 뒷걸음질 치더니 이제야 그 꿈을 실현하게 됐다.

시집올 때 시어머니가 마련해주신 가구며 부엌살림은 모두 버리고 이제 새 물건으로 새 아파트에 채워 넣는다. 단지 이삿짐 반열에 끼일 수 있는 것은 서준의 책이랑 장난감밖에 없다.

꽤 넓은 아파트다. 아마 30평은 되는 듯하다. 위치, 층수 모두 좋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위해, 이 좋은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많이 노력했을 것이다.

안방에는 2인용 침대와 화장대, 서랍장을 채워 넣었다. 큰방 안쪽으로 드레스룸이 있어 장롱은 필요 없게 됐다. 드레스룸은 길쭉한 방으로 돼 있다 거기에는 각종 수납공간이 있고 대형 행거에 옷을 얼마든지 걸 수 있다. 거기에 대형 거울도 있으니 여기서 마음대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서준이 방은 붙박이장이 있어서 옷장은 필요 없다. 침대도 원목으로 만들어져서 아주 튼튼하다. 문제는 서준의 책인데, 그동안 사 둔 책이 예상 밖으로 많다. 양 벽으로 2개의 대형 책장을 샀는데, 거기에 꽂히지 못한 책도 많다.

남편은 필요 없는 책은 버리라고 하지만 그 말은 들을 수 없다.

서준이 책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도 많고 해외 직구로 구입한 책도 많아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남은 방 하나는 내 방으로 꾸민다. 싱글침대를 들여놓고 서랍장과 책장 하나를 들여놓는다. 여기에 서준의 남은 책을 꽂을 작정이다.

시어머니는 서준이를 위해 피아노 한 대를 선물하셨다. 밖으로는 강하게 보이지만 속정은 깊은 분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소영은 남편과 다툼 이후 남편과 잠자리를 피해 왔다. 정이 떨어지니 서먹했다. 어떤 날 술을 먹고 들어와 집안을 뒤집어 놓을 때는 벌레를 본 듯 징그럽기까지 했다.

손 선생은 이제 새집으로 이사 왔으니 남편에게 정을 쏟으며 다정한 부부로 사랑하며 살아보라고 주문한다. 그래도 소영은 뭔가 어색해서 안방에는 가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꾸며놓은 곳에서 생활했다.

남편으로서는 그간 자신이 아내에게 패악을 저지른 것이 있으니 선뜻 자존심 꺾고 아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처음처럼 살갑게 안기기만 바라고 있다. 두 사람은 자존심이 벽이 돼서 한 걸음 다가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 여성은 한국여성보다 더 자존심이 강하고 남편에게 굽히기를 싫어한다. 손 선생이 한 번씩 조언해도 소영은 듣지 않는다. 심지어 남편에게 애교부리는 모습을 리얼하게 연기까지 해 보인다. 그래도 소영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아집은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것을 거부했다. 소영은 순전히 남편이 다가와 베풀기만을 바라고 있다.

소영은 자신의 임무는 아들을 교육하는 거로 생각하고 이 일에만 매달린다.

서준에게는 피아노 학원과 영어 학원에 등록해서 서준의 지적 능력 향상과 음악성을 키워주고 있다. 틈틈이 중국어도 가르치니 서준은 명실공히 3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다음으로 요리를 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남편 입맛을 맞출 수 없다. 워낙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그것을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처음엔 새 아파트에 새 가구로 꾸며놓은 꿈같은 집에 감격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감동은 무디어지고 전과 같이 청소도 게을리하고 정리정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서준의 책은 큰 방을 제외하곤 거실과 두 방을 점령하고 주방까지도 넘본다. 여기저기 흩어진 책들은 갈 곳을 몰라 방치돼 있다.

사람 마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다. 새집으로 이사만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고, 신천지의 소굴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신이 처한 불행을 탓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손 선생님과도 멀리 떨어지니 전과 같이 왕래하기가 쉽지 않다. 또 여긴 경북 경산시라 대구에서 받았던 혜택이나 이용하던 시설들과 멀어지고 있다.

단지 헌집 대신 새집을 얻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서준이도 내년엔 여기서 입학해야 한다. 그나마 몇 명 있는 친구까지 멀어졌으니 적응할지도 의문이다. 특히 밍밍의 딸 채은이는 서준이가 좋아하는 유일한 친구였는데, 그도 헤어지게 됐다. 서준은 가끔 채은이한테 놀러 가자고 조른다. 소영은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착찹하다. 자신이 불러서 신천지의 소굴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가슴 아프다.

이것저것 마음이 심란하다. 그때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어쩐 일로?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서준 아빠가 전화했네.

”오늘 친구 부부를 초대했어. 8명쯤 될 거야. 자꾸만 새집을 보고 싶다네. 음식 준비 좀 해줘 저녁 시간에 갈게.“

”어머! 어떻게 해요? 뭘 해야 하지? “라고 했더니 버럭 화를 내며

”아직도 그 모양이야!”라며 전화를 뚝 끊는다.

소영은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멍때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가까운 마트로 간다.

우선 닭고기와 쇠고기를 고른다. 다음엔 뭘 하지? 생선을 구울까? 손 선생이 가르쳐 준 콩나물을 할까? 감자를 조릴까? 궁리 끝에 콩나물 한 봉지와 감자를 골라 넣는다.

’내가 가장 잘 하는 만두를 빚으면 최고의 요리라고 칭찬받을 거야.‘

소영은 과일을 조금 더 사고는 집으로 향한다. 마음이 급하다. 만두를 만들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만두 빚느라 여기저기 허연 밀가루를 식탁과 자신의 옷에도 묻히고 있는데 띵똥~ 초인종 소리가 난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부부 한 쌍이 도착했다.

“어머! 새집이라 좋아요! 위치도 좋고, 뭘 도울 게 없어요?”라며 주방으로 들어온다.

시간이 있기에 도우려고 일찍 왔다고 한다. 이때 준비된 음식은 콩나물무침과 감자조림 그리고 닭고기를 중국식으로 볶은 요리가 전부다.

친구 부인은 냉장고 문을 열고, 밑반찬을 꺼낸다. 시어머니가 담아준 김치와 멸치 볶음을 접시에 담아 상 위에 올린다.

연이어 다른 부부들이 도착하고 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 귓전을 스친다.

“청소가 엉망이네.”

“새집이 어느새 헌집이 됐구먼!”

“중국 사람이라 지저분한가 봐.”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는 말들이 더러는 귓속으로 파고들고, 또 어떤 말들은 뜻을 알 수 없으니 귓전으로 지나간다.

드디어 남편이 들어온다.

“준비 다 됐어? 아이구! 집이 엉망이네.”

눈꼬리가 올라간다. 당장 무슨 일을 낼 것 같다.

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밥상이 차려지고 음식이 상 위에 오른다.

밥상을 받은 남편의 눈에 핏발이 선다. 이를 눈치챈 친구 부부들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겨우 김치 조각에 밥 한술 떠 넣고 입만 오물거린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친구 한 명이 술잔을 돌린다.

“이렇게 좋은 집을 샀으니 새집에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내가 건배사를 할 테니까 모두 잔을 듭시다.”

“서준네의 행복을 위하여! 건배!”

“건배! 건배!“

밥상이 인기를 얻지 못하자 소영은 과일을 가져간다. 마트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가지 수도 다양하게 준비했다.

친구 부인 한 명이 자기가 과일을 깎겠다고 나선다.

그 부인이 깎은 사과는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서준 아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일까? 밥숟갈을 놓자마자 일어선다. 좀 놀다 가라니까 모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돌아가려고 한다.

소영은 밥상에 그대로 남아있는 음식을 보며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한다. 그다음에 올 폭풍을 감지하며 불안해한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친구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는 밥상을 뒤엎는다.

”너 같은 바보는 처음이야! 지금까지 뭘 보고 배웠어?“

씩씩대며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물건을 끄집어내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냉장고에 들어앉았던 반찬과 식재료가 불려 나오고, 책꽂이에 들쭉날쭉 꽂혀있던 서준이 책이 무참히 짓밟힌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옷가지도 모두 끄집어낸다. 어느새 끌려 나온 옷들로 산더미를 이룬다. 삭히지 못한 화가 머리끝으로 올라가더니 입으로 쏟아진다. 입으로 할 수 있는 악담을 바가지로 퍼붓는다. 대부분은 소영이나 외국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욕지거리다. 급기야 소영의 손을 낚아채고 문밖으로 밀어낸다.

”니가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뭘 할 줄 알아? “라며 씩씩댄다.

”빈둥빈둥 놀기만 하지 말고 요리라도 배워두라고 했지? “라며 고래고래 악을 쓴다.

놀란 서준이 자지러지게 울며 제 어미를 따라나선다.

모자는 꽤 쌀쌀한 저녁 시간에 밖으로 쫓겨났다.

이 낯선 곳에서 이들 모자를 오라는 곳은 없다. 비 맞은 생쥐처럼 쪼그리고 아파트 입구의 화단 가에 앉아있다. 행여나 안으로 불러들일까? 하는 생각으로 기다려 본다.

밤은 깊어가고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올려다보니 방안에는 이미 전깃불이 꺼졌다.

이러다간 서준이가 감기 걸릴 것 같다. 어떻게든 해 봐야 한다. 어디론가 움직여야 한다.

’경찰에 신고할까?‘

지난번에 경찰에 신고했다가 시어머니의 무마로 흐지부지된 일이 생각난다.

’맞아!”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잖아! 여긴 대구가 아니고 경산시다.‘

비상번호로 경찰에 신고한다. 곧이어 경찰차가 와서 소영네 모자를 싣고 간다.

경찰서는 생각보다 아늑하다. 소영이와 같은 처지의 다문화 가정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에 대비해 담당자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마침 담당 여경이 오더니 상황을 설명하란다. 소영은 여기밖에는 기댈 데가 없으므로 간곡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남편과의 상황을 알린다.

”그러면 휴대폰부터 내놓으세요. 남편과의 연락을 차단해야 해요. 다음 일은 우리 경찰에게 맡기세요.“

소영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오늘 밤은 정해진 시설에서 자게 될 거예요. 일단 쉬었다가 내일 다시 얘기해요. “라며 모자를 데리고 간 곳은 한적한 곳의 2층 건물로 나와 같은 처지의 다문화 신부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여긴 완전히 수용시설 같다. 젊은 신부들이 생활하고 있는데, 주로 아이를 두고 나왔는지 혼자서 이곳을 찾은 것 같다. 그들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동류의식은 가질 수 있어 불안한 마음은 많이 가셨다.

어떤 사람은 1년째 여기서 생활하고 있기도 하다. 거실과 방 3개인 구조로 방에서 몇 명씩 생활하고 복잡할 때는 거실에서 자기도 한다. 입주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들쭉날쭉하다.

그중 나와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된 베트남 신부는 ’타잉‘이라고 하며 베트남 하노이에서 약 30Km 떨어진 시골 마을인 ’고지엔‘에서 왔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 4년 차고 베트남에 남편과 아이가 둘이나 있다고 귀띔한다.

”남편과 아이까지 있는데 어떻게 한국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요?“

”그건 쉬워요. 돈만 주면 유부녀도 처녀로 바꿀 수 있어요. 완전히 신분을 세탁하는 거죠?“

소영은 그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남편과 아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니 더욱 이해가 안 간다. 돈만 벌어오면 모든 허물이 정당화된단다. 참! 세상은 요지경이구나!

”그럼 왜 집에서 나왔어요?“

그건…

”나는 식당에서 서빙을 맡고 있어요. 그러니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아요. 또 수입 모두를 베트남으로 보내고 있으니 남편과 시어머니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어요.”

타잉의 시어머니와 남편은 이유 있는 탄압을 하는 것 같다. 타잉은 그 표정이니 행동이 너무도 당당하다. 베트남 여인의 강인함을 보게 됐다.

“얼마 전에 시어머니가 드디어 불만을 터뜨렸어요. ‘넌 결혼한 지 4년이나 됐는데, 애는 왜? 낳지 않니? 밤늦게 다니며 남자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는가 본데, 그러려면 뭣 하러 결혼했어’라며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했어요.”

“그럼 타잉은 어쩔 생각이에요?”

“어쩌긴! 여기서 버텨야죠. 아직 돈을 더 벌어야 해요. 하노이에 빌딩 하나 살 때까지는 참고 지내야죠.”

타잉의 말은 여기서는 숙식이 제공되니까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서 직장 생활을 하면 문제없다고 한다. 그리고 5년이 지나면 남편을 꾀어서 영주권을 얻어내고 베트남에 있는 진짜 남편을 데려온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그동안 소영은 베트남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몹시 나쁜 인성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 저녁 소영은 타잉과 밤늦도록 얘기했다. 소영의 머릿속은 회전판 위에 있는 듯 빙그르르 돈다.

세상에 이런 생각도 있구나! 지금까지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선 상대를 속이고 온갖 불법이나 비도덕도 용서된다는 타잉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다.

소영은 자신이 처한 이 난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밤을 꼬박 새우며 생각의 늪을 헤맨다.

서준은 우유가 먹고 싶다고 한다. 빵과 과자도 찾는다.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다. 그동안 생활비가 터무니없이 적다고 저축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손 선생은

“소영씨! 돈을 조금씩 모아야 해요. 아무리 적은 생활비라도 조금씩 모이면 큰돈이 될 수 있어요. 소영씨는 돈을 너무 낭비해요. 식품도 조금씩 사면 되고, 남편에게 애교를 부리면 필요한 물품도 얻을 수 있잖아요.”

소영은 이 귀한 충고가 듣기 싫었다. 바른말은 입에 쓰다는 말이 있듯이 소영은 바른 충고를 귓전으로 흘려보내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왔다. 지금 와서 그 말을 되새기며, 후회하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손 선생에게도 손을 벌릴 수 없다.

남편이 찾아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 몰라도 이번엔 섣불리 굽히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의지나 자존심을 허물어뜨리려고 혀를 날름대며 조롱한다.

소영은 당장 돈이 필요해서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생각 하나를 끄집어낸다.

대문 비번을 알고 있으니 집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과 돈이 될 유일한 물건인 애기 돌 반지와 목걸이를 가져오려고 생각한다.

남편이 출근한 시간을 이용해 출입 허가를 받고 집으로 향한다. 이 시설에 수용되면 통제를 받는다. 외부와의 소통은 철저히 차단된다. 물론 수용자의 보호 차원이겠지만 소영의 처지에서 보면 자유를 빼앗긴 듯하다.

겨우 한 시간을 허락받고 서준이가 유치원에 간 사이 아파트로 들어간다.

‘혹시? 비번을 바꿨으면 어떻게 하지?’

손에 익은 번호를 누른다. 문은 쉽게 ‘띵~’하고 경쾌하게 소영을 맞는다.

한 달 넘게 살았던 집인데 남의 집같이 생경한 느낌을 준다. 거기서 나를 거부하는 찬바람이 일어난다.

거실 한 가운데는 장롱과 서랍 속에서 불려 나온 옷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주방으로 들어가 본다. 여기는 시궁창에서 나던 그 지독한 냄새가 마치 누군가를 저주하는 듯하다. 또 서준이 방이랑 소영이 거처하던 방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흩어져 갈 바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서준이 책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자신이 저질러 놓은 패악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이대로 내버려 둔 것이다.

‘어찌 이를 인간이라 할 수 있겠나?’

그래도 소영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도 물거품이 된 듯하다.

‘이렇게 귀신 집처럼 어질러진 곳에서 며칠 동안 생활했다는 말인가? 아님, 아예 집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단 말인가?’

남편 방인 큰 방으로 들어가 보니, 거긴 깨끗하다. 남편이 그간 혼자서라도 집에 와서 생활한 흔적을 찾아보지만 찾을 수 없다. 단지 그날 그렇게 난리 쳤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을 보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어디서 숙식을 해결했을까?’

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어머니한테 갔겠지! 온갖 험담으로 모자가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소영은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서준이 돌 반지와 목걸이, 팔찌를 찾아낸다.

서준이가 첫돌을 맞았을 때의 감동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첫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하시던 어머니. 그리고 기쁨을 속으로 감추다 삐죽이 웃음을 내민 남편.

남편은 웃음은 감출 수가 없었나 보다. 그저 싱글거리며 어깨를 추켜올리던 모습도 눈앞에 선하다.

그때 첫돌 잔치를 호텔에서 제법 고급스럽게 했었다. 선물도 많이 받았고….

돈이 궁할 때마다 결혼 때 받은 반지와 목걸이 그리고 서준이 돌 반지까지 팔아서 용돈으로 썼다. 이제 남은 금붙이를 모두 긁어모은다,

돌 반지 2개, 아이 팔찌 1개(서 돈 짜리), 아이 목걸이 (두 돈짜리), 이렇게 모두 7돈이다. 팔 때는 조금 싸게 팔릴 것이다.

금방으로 들어가 가져온 물건을 내놓으니 돋보기 같은 것으로 감정을 해 보더니 별 말 없이 한 돈에 15만 원을 주겠단다. 시세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105만 원을 손에 쥐고 나온다.

갑자기 이러면 완전 끝장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른다.

‘그래도 최대 위기를 맞은 지금은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한다.

보호센터로 돌아오니 상담자라는 부인 한 분이 기다리고 있다. 그분은 소영과 남편 사이의 매듭을 원활하게 풀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LIAN XIAO YING 리엔 시아오잉)씨 인가요? 남편과 만나서 얘기 많이 했어요.”

“그래요? 남편이 뭐라고 하던가요?”

시아오잉(소영)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남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자신이 잘못했으니 사과하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다. 그러면 소영은 마지못한 척 체면을 세우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고 있었다.

타잉도 자기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타잉에 비하면 나에게는 서준이도 있고, 타잉처럼 친정에 돈을 보내지 않으니 훨씬 좋은 조건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소영은 남편에게 그 정도는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이어서 상담사는 소영의 의견을 묻는다.

“난 서준이와 같이 살 수 있게 방을 한 칸 얻어 주고 생활비만 주면 만족해요.” 라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한다.

상담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너무 그렇게 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아이를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판단을 잘 해야 해요.”

“제가 제안한 방법이 아이를 위하는 길인데요.”라고 소영은 대답한다.

“그게 아니지! 아이가 아빠 떨어져 외국인 엄마와 사는 것은 아주 불행해요.”라고 상담사는 소영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이건 이혼을 기정사실화 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서준이 아빠한테 무슨 부탁을 받았을까? ‘완전히 객관성을 잃은 것 같다.

“그러면 남편이 뭐라고 말했어요?” 했더니

“이혼하고 깨끗하게 정리하자고 그러네요.”

소영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기분이다. 지난번 시어머니 집에서 다투다가 경찰을 부르고 난리 쳤을 때. 시어머니와 시누이, 남편 모두가 나를 나가라고 했다.

그래도 그 이후엔 정상을 회복했기에 그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나와 헤어지기를 원하는구나!‘

소영은 벼랑 끝에 선 기분이다.

이혼하게 되면 엄마는 외국인이고 직장이 없으니 양육권은 아버지 쪽에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담 나는 서준이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건 아니다. 난 죽어도 서준이와 헤어질 수 없다! 혹시 남편 쪽에서 나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말 아닐까?’

다시 말하면 자존심상 들어오라는 말 대신에 ‘헤어지자.’ 그럼 아이는 포기해야 한다. 는 말인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 아닐까?

상담받고 돌아가는 길에 손 선생님께 상담사의 전화기를 빌려서 전화했더니,

“소영 씨! 아이 두고 이혼하고 나와서 새 출발 하는 게 좋겠어. 아직 나이도 젊고 예쁘잖아. 무슨 일이든 아이만 없으면 할 수 있어.”

‘이제부터는 손 선생님의 조언도 받기 싫다. 아이와 나를 떼 놓으려는 수작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난 아이와 떨어질 수는 없고, 또 아이는 나의 희망이자 방패가 되니까 더욱 헤어지기 싫다.’

어떤 이유든 서준과는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바꿀 수 없다. 그러면 결과는 남편에게로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남편에게로의 회귀는 생활의 안정은 물론이고, 자식과 붙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나를 거부하는 남자와 같이 살며 잠자리까지 담당해야 하는 일은 죽기보다 더 싫다.

일단 시간을 끌면서 직장을 알아보자.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면 나를 무시하진 않겠지. 또 여차하면 아들 데리고 나가 살면 되니까.

저녁 늦게 돌아온 타잉에게 의논했더니,

“시아오잉! 나 같으면 아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독립하겠어. 자기는 이미 영주권을 획득했잖아. 혼자라야 돈을 벌 수 있고 자유로워. 아들은 나중에 만나면 돼. 남편과 시어머니가 기르면 문제없잖아!”

“이혼하고 나와서 나랑 같이 일하자. 돈을 모아서 가게도 차릴 수 있고….

한국에서는 기회가 많아. 열심히만 하면 돈을 벌 방법도 많지.“

소영은 잠은 오지 않고 앞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불안하다. 손 선생이나 타잉, 그리고 상담자도 나의 이혼을 원하고 있다. 모두가 남편 편인 것 같고 자신은 거대한 벽에 갇혀있는 기분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서 판단하고 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소영은 자신의 길을 마음속으로 굳히기 시작한다.

서준과 헤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 그로 인해 남편의 손아귀로 들어가더라도 할 수 없다. 다음으로 경제활동을 시도해 보는 거다. 몇 달 후는 서준이가 1학년에 입학하므로 오후엔 학원에 보내면 웬만한 직장에는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이혼하지 않고 적당한 장소에 방을 하나 얻어 서준이와 살면서 직장에 다닌다면 일거양득인 셈이다. 그렇게만 되다면 남편의 이혼 요구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편 근처에 어물쩍 붙어 있으면 이혼 사유를 찾지 못한 남편이 이혼 포기 선언을 하지 않을까? 속마음을 감춘 소영은 상담자에게

”저는 절대로 이혼은 안 합니다. 그렇게 전하세요. “라고 단호히 잘라 말한다.

그 뒷날부터 센터에 구직활동차 나간다고 알리고 근처에 있는 노동청엘 들린다. 자신에게 알맞은 직장을 소개해 달랬더니,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

”어린이집이나 사회 시설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쪽은 보수가 너무 적어요. 중요한 것은 자격증이 있어야 하니, 먼저 자격증을 따도록 해 봅시다.“

”유치원 교사 자격은 유아교육과를 졸업해야 하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요양보호사 교육을 신청해 보세요.“

소영은 이곳에서도 원하는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유치원교사 자격증 때문에 통신대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손들고 나왔고, 요양보호사는 너무 힘든 일이라 내키지 않는다. 타잉과 같이 식당일을 하려면 서준이를 돌볼 수 없다. 밤늦은 시간에 귀가하면 남편과의 불협화음에 부채질한 꼴이 될 것이다.

애 데리고 직장 생활한다는 일은 너무 힘들다.

이곳 센터 생활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돼가고 있다. 이곳의 생활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아들과 같이 좁은 방에서 생활해야 하니, 다른 사람의 빈축을 사고 있다.

서준이도 이제 지쳤는지 집으로 돌아가자고 조른다. 집에 가면 장난감이 많이 있느니, 책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왜 돌아가지 않느냐니 하면서 졸라댄다.

소영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눈 딱 감고 들어가나? 그럼 애초에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내 발로 나왔다가 내 발로 들어가는 건 자존심이 하락하지 않는다.

또다시 찾아온 상담자는

”소영씨 의사를 남편에게 알렸어요. 남편은 이혼해야 할 이유를 찾고 있어요. 이 모든 일이 아내의 탓이라고 하네요. 자칫 정신병자로 몰릴 수도 있겠어요. 그러니 하루속히 이혼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이 상담자는 남편의 하수인이구나! 남편의 사주를 받고 어떻게 하든 나의 허물을 캐내어 위자료 없이 나를 빈 몸으로 쫓아내려 하는구나! 소영은 남편의 하수인이 된 이들의 음모를 이제야 알아차린다.

내가 외국인이라 모든 한국인은 자신의 나라 사람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 만약 법적으로 처리한다고 해도 모두 저들의 편을 들것 아닌가?

거대 중국 국민이 이 작은 나라에 와서 미물같이 작은 존재로 추락하고 있음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젠 돌이키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수중에는 서준이 돌 때 받은 반지랑 금붙이를 판 돈이 몇십만 원 남아있을 뿐이다.

나 혼자서 나를 지키고 아들을 지키는 방법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경찰까지도 남편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제 이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소영의 마음속에는 남편에게 있는 양심과 동정심에라도 호소하고 싶다. 한 달 동안 아들을 보지 못했으니, 억지 사과라도 하면서 아들을 부를 것 같다. 그러면 그나마 무너진 소영의 자존심이 설 것 같다.

기대했던 남편의 사과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없다. 구겨진 자존심을 더욱 밟아 깊숙이 심연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담! 실리적으로 판단해서 유리한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자존심을 던져 버려야 한다.

소영은 각오를 단단히 다진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본다.

’오직 나와 아들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어! ‘라며 최면을 건다.

”서준아! 아빠 보고 싶니? 우리 집에 들어갈까?“

서준이는 좋아서 콩닥 춤을 춘다. 아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더는 망설일 게 없다.

가방을 챙기는 소영을 향해 타잉이 한 마디 던진다.

”아이가 네 인생을 살아주는 게 아니야! 돈을 버는 일이 더 중요해. 들어가서 생각이 바뀌면 나에게 연락해. “라고 한다.

센터에 연락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그동안 잘 지냈다는 인사를 끝으로 센터를 나와 집으로 향한다.

 

 ’깨끗이 정비된 이 새 아파트가 보금자리였구나! 이런 곳을 버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한 달 동안 고생한 것을 생각하며 다음부터는 섣불리 집을 나가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마음속을 지배한다.

손가락이 낯익을 번호를 터치하자 가볍게 현관문이 열린다. 나를 환영하는 듯해서 용기가 생긴다. 들어서는데, 낯익은 풍경이 눈앞에 막아선다. 산더미로 쌓아놓은 옷가지가 한 달 전 그대로 쌓여있다. 주방도 그대로다. 썩을 대로 썩은 식재료들이 냄새를 풍기며 나를 거부하고 있다. 서준이는 들어서자마자 그립던 장난감과 책을 대하고 함박 웃을 꽃을 피워낸다.

소영은 머리를 굴려 남편의 심리 상태를 점검해 본다. 다툼 현장을 증명하는 쓰레기와 옷가지들을 치우지 않은 남편은 나의 귀가를 바라는 행동일까? 아닐까?

‘만약 나를 완전히 밀어내려고 마음먹었다면 나와 관련된 물건을 모두 버리고 깨끗이 정리한 뒤 현관 번호를 바꾸지 않았을까? 그럼 이 상황은 나를 받아들인다는 암시인가?’

소영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한다. 남편이 들어왔을 때 깜짝 선물을 주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일어난다. 그렇게도 깨끗하게 정리된 집을 원하는 남편의 뜻을 거스른 것을 후회한다.

창문을 모두 열어젖힌다. 종량제 봉투를 이용해 냄새나는 것들은 밖으로 내밀고, 옷가지와 책들을 정리한다. 청소기를 사용하고 걸레를 이용해 바닥을 반짝거리게 닦는다. 주방 살림을 정리하고 그릇들 대부분을 끓는 물로 소독해 낸다. 또 수세미로 냄비를 닦고 프라이팬의 기름때를 따듯한 물에 베이킹소다를 풀어 씻어낸다.

내가 봐도 기분이 좋다. 남편은 이런 집을 원했을 것이다.

다음 코스는 음식 준비다. 손 선생님께 배운 콩나물무침과 시금치 무침과 된장국을 준비할 것이고 여기에 고등어구이를 곁들이면 남편이 먹을까?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몸이 굳어오며 입술도 바싹 마른다. 센터에서는 상담사를 통해 이미 남편에게 나의 귀가를 알렸을 것이다.

시계의 초침 따라 심장이 뜀박질한다.

”아 참! 나의 무기가 있지!‘

“서준아! 아빠가 오시면 반갑게 인사해야 해.”라고 하자 서준도 아빠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빠 언제 와요?”

“조금 있으면 오실 거야. 아빠 보고 싶었어요. 라고 인사하는 거야.”

서준은 아빠라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아빠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야지.”라며 방방 뛴다.

고을 원님이라도 맞는 듯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소영은 가볍게 화장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서준이도 목욕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얼마 전 남편에게 쫓겨나다시피 내몰렸던 일은 잠시 미루기로 한다.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띠~ 띠~ 띠~

소영은 서준의 손을 잡고 현관 쪽으로 눈을 고정한다.

문이 열리자 서준은 아빠 품에 가서 와락~ 안긴다. 아마 아빠가 몹시 그리웠나 보다.

서준 아빠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준을 안고 안으로 들어온다. 엉거주춤 서 있는 소영을 향해

“집 나가 사니까 좋았어?”

이 말을 듣고는 안도의 숨을 쉰다. 그동안 상담자를 시켜 이혼하자고 했던 일은 소영을 겁주려는 방편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도 모질게 굴더니, 그 속마음엔 약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특히 깨끗하게 정리된 집을 보는 순간 마음이 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남편이 말을 걸어왔으니 대하기가 편해진다.

“밥 차려놓았어요. 된장이랑 콩나물 그리고 고등어도 구워 놓았어요.”라며 식탁에 반찬을 차려놓는다.

서준이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던 남편은 서준이와 한참 동안 이야기하는 듯하다. 제 어미의 화살이 되고 방패가 된 서준이는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한참 만에 주방으로 나온 부자는 식탁에 앉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와 같은 모습이다.

이일을 어찌 이해해야 하나? 잡아먹을 듯이 밖으로 내몰았던 남편이다. 시설에서는 상담자를 시켜 이혼을 강요하다시피 하지 않았나? 도저히 그 심리를 모르겠다.

갈수록 서준 아빠에 대한 미스테리를 풀 길이 없다.

오늘은 꼭 나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 이도 나의 착각인가?

소영은 일단 밖으로 쫓겨나지도 이혼을 강요당하지도 않을 것 같은 확신이 선다.

남편은 비교적 안정된 모습으로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남편은 소영에게는 서준의 교육에 관해 묻는다. 피아노 학원에 다녀야 하지 않겠나? 피아노는 할머니가 사 준 것이다. 남편은 어물쩍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영과 말을 섞으려 애쓰고 있다. 소영은 자신을 밀어낼 때의 모습이 떠올라 몸서리치다가 도리질을 한다.

다 잊기로 했는데, 왜 그 생각이 마음속을 헤집나?

소영은 나쁜 감정을 뼛속 깊이 밀어 넣는다.

부자간에는 핏줄로 이어졌으니 무난하게 봉합되는 것 같다. 그럼 부부 관계는?

이도 칼로 물 베기 같다고 하니 배 한 척 지나간 바다같이 잔잔할 수 있을까?

남편이 지금은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하게 굴지만, 그 속에 잠자고 있을 폭풍이 무섭다.

어느 순간 별것 아닌데도 천둥 벼락이 몰아치듯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눈에 핏발이 서면 공격성이 불같이 일어난다.

입에는 욕설! 저주!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수는 폭군으로 변해버린다. 내 한 몸으론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회오리를 피해 한 달간 유배 생활을 했건만, 사과나 변명 한마디 없다.

멀쩡한 얼굴로 아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아내에게는 한 마디 툭 던져 놓더니 투명인간처럼 데면데면하게 대한다.

소영은 그래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안정을 찾는다. 의, 식, 주라는 기본 문제는 확보되니까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서준이가 모처럼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들어있다. 소영은 이불을 곱게 덮어주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면서 안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 살펴본다. 조용하길래 잠들었나 싶어 문밖에서 숨소리라도 들어보려고 귀를 갖다 댄다.

소영의 마음은 두 갈래다. 자존심 죽이고 남편에게 나아가느냐? 아니면 모른 척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치느냐가 관건이다.

소영은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첫 번째 방법으로 당분간 나가보기로 한다.

남편 몸에 좋은 생강차 한잔에 꿀을 듬뿍 넣는다. 머리를 쓰다듬고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안방 문을 노크한다.

“들어와!”

아주 부드럽고 순한 소리다. 아마 속으로는 반성하고 있는 듯하다. 남편은 강한 것 같지만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다. 만사에 용기가 없고 열등감과 자존감이 팽팽히 두 줄기를 이루고 있다.

이 시점에서 소영도 자신을 반성한다. 좀 더 나긋나긋하게 굴며 애교를 부려야 했는데,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살며시 문을 연다. 남편은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나며

“남의 집이니?”

한마디 툭~ 던지는 게 멋대가리가 없다.

소영은 의자에 앉으며

“생강차 한잔 마셔요. 그동안 어머니 집에서 식사했어요?”

“아니! 엄마는 우리 일을 모르고 있어. 괜히 일이 커지잖아.”

소영은 궁금한 말을 뱉어낸다.

“상담한다고 어떤 여자가 왔던데, 당신이 보냈어요? 이혼하려고요?”

그 말에는 대답이 없다. 또 사과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도 없다.

“화가 나니까 그렇지.”

이 남자의 수준이다! 화가 나면 나가라! 이혼하자!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럼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한마디 때문에 상처받는 마음은 생각도 못 한다.

이쯤에서 한마디 다정한 말! 위로의 말을 해 주면 좋으련만 도리어 자기가 위로받으려고 한다.

’좋아! 통 큰 내가 양보하지 뭐!‘

“나도 잘못한 게 많아요. 손님 접대를 못 해서 당신이 화가 났을 때 집을 나가서 미안해요.”

남편은 차 한 잔을 마시더니,

“생강차를 마시니 목이 트이는군. 이리 와서 자야지. 그동안 편한 잠을 못 잤지?”

부부는 모처럼 한 침대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이래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는가 보다.

“우리 이번 주말에 외식하자. 당신 샤브샤브 좋아하지?”

이래서 이번 일은 일단락 짓게 됐다.

 

 서준이가 입학하는 날이다. 새로 산 옷에 가방에 신발에, 잘생긴 얼굴까지 한몫하니 서준이 몸에서 빛이 난다.

소영은 서준을 보며 그동안 힘들었던 일을 목구멍으로 게워낸다. 기쁨의 눈물이 흐른다. 서준은 어둠에서 한 줄기 빛이 되어 집안을 비추고 있다. 나아가서는 이 나라를 더 나아가 중국과 세계를 빛내는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민들레 꽃씨 하나 회오리바람 타고 날아와 온갖 고생을 다 했다. 이제 그 꽃씨가 어둠을 헤치고 드디어 발아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날 한 송이 찬란한 꽃을 피우리라.

소영에게 있어서 서준은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할 구세주며 무기며 방패다.

어린 씨앗이 싹트기 위해 갖은 고난을 받을 때 서준은 물이 되고 자양분이 돼 주었다.

입학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예전보다 학생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저출산이라 한다. 중국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중국에서는 인구 억제 정책으로 한 자녀 낳기를 법으로 정해놓고 실천했다. 만약 이것을 어기면 적잖은 벌금을 물게 된다. 그러나 중국도 지금은 인구 감소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 규정을 많이 완화했다. 즉 부모가 한 자녀인 가정은 자녀를 한 명 더 낳아도 되고, 소수 민족에게도 한 자녀의 규정을 완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녀를 적게 출산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 중국도 머잖아 한국과 같은 현상을 맞을 것이다.

서준이 담임은 여선생님이다. 연세가 좀 있어 보여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한 번 만나서 선생님과 서준에 대해 상담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서준 아빠라도 관심을 보이면 좋을 텐데, 아빠의 역할을 알기는 하는지 전혀 반응이 없다.

전화기가 울린다. 시어머니다. 가게 문을 잠깐 닫고 서준이랑 점심을 같이 먹겠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시어머니께도 서준은 빛 같은 존재다. 물론 남편에게는 태양 같은 존재일 것이고….

시어머니가 잠깐 집에 들렀다. 뒤이어 아빠가 들어온다. 모두 서준을 축하해주기 위한 발걸음이다. 서준은 기분이 좋은지 우쭐댄다.

4식구는 서준 아빠의 차에 올라 서준이가 좋아하는 불고기 식당으로 들어간다.

서준 아빠도 기분이 좋은지 마음껏 고기를 시켜 먹으라고 한다.

시어머니도 고정된 무서운 얼굴을 풀고 활짝 웃으며 서준의 입학을 축하해주고 있다. 뒤이어 지갑을 열어 새 돈 5만 원짜리로 100만 원을 서준에게 쥐어준다.

서준으로 인해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소영의 마음속엔 기쁨 뒤에 감춰진 불행이 자신 가까이 올까 봐 불안한 마음도 살짝 일어난다.

’서준이가 학교에서 잘 적응해야 할 텐데…. 다문화 가정이라 무시 받지는 않을까?‘

소영은 서준이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유치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학습을 도와야 하고 준비물이나 과제도 챙겨야 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서준에게

“학교에 가니 좋아? 선생님이 서준이를 예뻐해 주는 거야? 친구는 사귀었어?”

소영은 걱정하고 있던 문제를 알고 싶어 이것저것 꼼꼼하게 물어본다. 서준은 엄마의 물음은 귓등으로 넘기고 자신이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에 빠진다. 쌓기를 하고 끼우기 놀이도 한다. 여러 모양의 플라스틱 조각들을 이어서 갖가지 모양을 창작한다. 이때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엄마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스스로 싫증이 나야만 장난감 놀이를 끝낸다.

소영은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을 만나 서준의 학교생활을 문의 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혹시!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에 서준에 관해 물어보는 것이 두렵다.

아침마다 소영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일어나지 않으려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서준을 깨우려 온갖 감언이설을 동원해야 한다.

“학교에 잘 갔다 오면 주말에 놀이공원 가게 해 줄게.”

“어서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하자. 그러면 주말에 불고기 사 먹으러 가지.” 그러면 서준은

“학교는 재미없어. 안 가면 안 돼?”

“나 집에서 그림 그릴 거야.”

이 말을 들으니 하늘이 무너진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퇴근한 남편에게 서준이에 관해 얘기했더니 불같이 화를 낸다.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애 하나도 제대로 못 다루니?”

“모든 게 너 때문이야! 교육한다고 책 사고 장난감 사고 하더니 애만 망쳐놨네!”

소영은 눈앞이 깜깜하다. 애를 잘 키워보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았는데, 이게 뭐람!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겠지. 총명한 아들에게 별문제야 있겠어?

잘 달래고 잘 타이르면 알아들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주말에 서준을 데리고 우방랜드로 갔다. 이때 밍밍의 딸 채은이랑 함께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번에는 채은과 같이 놀아서 좋았는데, 지금은 서준이 혼자서 외로워 보인다.

모자가 놀이공원에서 탈것을 선택한다. 선택권은 전적으로 서준에게 넘긴다. 모처럼 활짝 웃으며 놀이기구 서너 개를 골라 탄다. 서준은 전망대로 올라가 망원경에 비친 대구 시내를 보는 것을 신기해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준의 마음을 탐색한다.

“서준아! 학교는 왜? 가기 싫은데?”

“몰라 난 학교는 싫어. 내 마음대로 못 하잖아?”라고 겨우 입을 연다.

“학교에는 친구들이 많아서 좋잖아?”

“나를 좋아하는 친구가 없어.”

소영은 대충 원인을 파악했다.

’서준은 사회성이 부족하구나! ‘이건 자신의 탓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늘 중국어 영어 등 어학 공부시키고, 장난감 가지고 놀고, 그림 그리고, 이렇게 혼자서 공부하고 또 혼자서 놀았다.

친구와 어울리며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 후회로 다가온다.

손 선생님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소영씨 애들은 집단에 어울리는 것이 중요해. 서준이가 고립되지 않게 교회 주일학교를 보내보는 게 어때?”

그때는 그 말을 무시했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똑똑한데, 내가 이렇게 자식 교육을 잘 하고 있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 뭘 안다고…

이사 오기 전엔 바로 우리 집 뒤에 교회가 있었다. 몇 발짝 떼면 교회학교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가까운 교회를 찾아볼까? 라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접는다.

신천지 때문에 놀란 가슴이라 솥뚜껑도 무섭다.

날이 가고 서준이가 자라면 차츰 나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로 일단 걱정을 접기로 한다. 멀쩡한 애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 것 같기도 하다.

서준이가 입학하고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서준이 어머니세요, 전 1학년 2반 담임입니다. 서준이 문제로 상담할 게 있습니다. 내일 학교로 나와 주세요.”

이제야 올 것이 왔다. 그렇게도 걱정했던 일인데 나를 피해가지 않는가 보다.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부딪쳐 보자. 선생님은 어떤 진단을 내렸을까?

오전 수업을 마칠 때쯤 학교를 찾는다. 서준이가 친구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하기 때문이다.

서준이 교실 입구에서 애들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조금 있으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나온다. 제비처럼 참새처럼 지저귀며 종 종 종 병아리 걸음으로 나온다.

무더기로 나오는 아이 속에 서준이는 없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본다. 한 무더기가 지나가고 서준이는 맨 뒤에서 혼자 걸어오고 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억장이 무너진다.

“서준아! 여기서 조금 기다리고 있어, 엄마는 선생님과 얘기 좀 하고 나올게.”

서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이 없다.

“엄마가 나올 때까지 미끄럼타고 있어, 집에 가지 말고, 아이스크림 사 줄게.”

서준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서준이 선생님은 자그마한 몸매에 성격이 차분한 것 같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서준이 엄마입니다.”

“네! 거기 좀 앉으세요.”

가슴은 방망이질하고 손발은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가볍게 떨린다.

“서준이가 폭력적이에요.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물건을 던지고, 여학생을 때린 적도 있어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려고 불렀어요.”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씀은 서준이가 자폐증인지 아니면 다른 결핍이 있는지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엄마를 만나보니 엄마 탓보다 아빠한테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니 아빠를 한번 만나고 싶네요. 수일 내로 두 분이 같이 나오세요.”

소영은 솔직히 남편에 대해 말했다. 폭력성과 사회성 부족을, 그리고 가출까지 하게 된 이유를….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이 직접 서준 아빠를 학교로 불러 주세요,”

남편은 자신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과 서준의 부족함을 모두 아내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문제를 상담하러 오라면 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렸다.

선생님은 소영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 제가 서준 아빠를 불러 볼게요.”

서준이를 생각하며 한껏 희망에 부풀었었는데, 이제는 그 희망이 넝마조각이 되어 너덜거린다. 서준이 교육은 아빠의 협조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서준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반성하게 된다. 모든 게 남편이 가해자고 자신은 피해자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자신도 가해자가 돼 있었다.

출근 준비하던 남편이

“오늘은 서준이 반에서 아빠들이 모여 자녀 교육에 대해 의논한다고 나도 오라네, 좀 일찍 마치고 학교에 다녀올게.”

담임 선생님이 사람을 잘 다루는구나! 과연 교사다운 교사다! 라고 소영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남편과 선생님의 대화가 잘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담임을 만나고 돌아온 남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덮여 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소영은 담임의 말에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남편이 도와준다면 서준이는 회복될 것이다.

며칠 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준 어머니! 서준 아빠와는 얘기가 잘 됐습니다. 서준이를 위해서는 뭐든지 협조하겠다고 했어요.”

상담 전문가를 섭외해 두었습니다. 두 분이 가셔서 상담을 받아보세요. 비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귀한 분이니 시간 잘 지키도록 하세요.“

 

서준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놓고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사무실이 아담하고 깨끗하게 꾸며져 있다. 책꽂이에는 심리에 관계되는 두툼한 책들이 꽂혀있다.

녹차 한 잔씩을 앞에 놓고 상담을 진행한다.

먼저 상담 선생님이 자신을 소개한다.

”현대사회에서 청소년 비행이 늘어가고 있어요. 이로 인해 범죄도 점차 악랄해 지고 있고요. 저는 이를 막을 방법을 생각했어요. 결론은 그 청소년 비행은 유전적인 요소도 있지만 대부분 환경요인입니다. 첫 번째가 가정이고, 다음이 학교, 그리고 사회로 이어집니다.“

”가장 쉽게 치유하는 방법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좋고, 가정환경을 먼저 바꾸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남편은 상담사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 같다.

”아이에 대한 상황은 담임 선생님께 들었습니다. 이 시간 숨김없이 자신의 마음과 억눌린 생각을 풀어내야 합니다. 부모의 생각이 발라야 아이를 바른길로 이끌 수 있어요. 가정이 불화하면 아이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되지요.“

한 사람씩 따로 상담을 시작한다. 먼저 남편을 옆방으로 가라고 하고 소영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다.

질문지는 아이의 폭력성과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엄마로서 미친 영향을 말하라고 한다.

”저는 지금까지 공부를 가르치려고 온 힘을 아이에게 쏟았어요. 중국어, 일어 그림 등을 가르쳐서 다른 아이보다 나은 위치에 오르게 하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했어요. 남편과 불화하면서도 모두 남편 탓으로만 돌리고 나 자신의 자존심만 생각했어요. 저는 이 점을 고칠 것입니다.“

선생님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의 정성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됐습니다.“

이번엔 소영을 옆 방으로 보내고 남편을 부른다.

소영은 귀를 합판 칸막이에 갖다 대고 옆방을 주시한다. 온통 남편의 목소리를 잡으려 귀를 한껏 열어놓는다.

선생님은 폭력의 원인을 남편에게서 찾으려는 것 같다. 근본적인 원인이 남편에게 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남편의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갑자기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난다.

’아! 남편 목소리다!‘

끊어질 듯 들리는 소리를 종합해 보면, 자신도 폭력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고백한다. 아버지에게 매 맞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다고 한다.

아! 그랬구나! 갑자기 남편이 불쌍해진다.

그다음 말들은 울먹이느라 잘 들리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남편도 어릴 적에 가정 폭력을 보면서 자랐고, 아들 서준도 아빠의 폭력을 보면서 자신도 공격적으로 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선생님이 나도 부른다. 우리 부부를 앉혀 놓고 단호히 선언한다.

”폭력의 고리를 여기서 끊어야 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강한 의지가 없으면 폭력은 대를 이어갈 것입니다. 벌써 3대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몰라서 그렇지 그 윗대에서도 폭력 가장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죠.“

두 사람은 선생님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두 사람이 힘을 합칠 것을 약속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오늘을 계기로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행동 강령을 적어 놓고 실천하기로 한다. 만약 어기게 되면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 할 것을 약속한다.

모처럼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된다. 머리를 맞대고 부부가 지켜야 할 점을 적어 본다.

 

첫째: 아이 보는 데서 스킨십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다정한 부부 모습 보이기)

둘째: 상냥한 말투만 사용할 것(폭력적인 언어에서 부드러운 언어로 전환)

셋째: 아이 교육은 부모가 함께한다. (아버지의 교육 참여로 아이에게 관심 두기)

넷째: 일주일에 한 번은 야외로 나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화목한 가정, 함께하는 가정)

다섯째: 주일학교에 등록하고, 방학을 이용해 수련회에 참석시켜서 단체생활의 경험을 쌓게 한다. (단체생활로 사회성 기르기)

이 5가지 지킬 일을 프린트기로 출력해서 코팅한다. 벽에도 붙여두고 작게 만든 것은 액자에 넣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지켜나갈 일을 확인한다.

다음 날 소영은 코팅한 부부의 행동 강령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찾아간다. 소영의 생각엔 부부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할머니도 이 일에 협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며느리를 의아한 눈으로 본다.

”어머니 그동안 잘 계셨어요. 장사 하시느라 힘드시지요?“

어머니는 소영의 공손한 행동에 몸 둘 바를 모른다.

”네가 웬일이니?“

  소영은 지금까지 서준 때문에 일어났던 일을 말한다. 학교에 부부가 불려가고, 상담을 받은 일을 모두 말한다.

서준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떠 올리기 싫었던 과거가 눈앞에 환하게 다가온다.

내가 어렸을 때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말은 과거를 불러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제주도의 평범한 가정에서 2 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게 공교롭게도 남매 쌍둥이였다. 당시에는 남매 쌍둥이를 금기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속설 때문에 아들을 살리고자 딸은 희생시켰다. 이 와중에 서준 할머니는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마침 딸이 필요한 사람이 기르게 됐는데, 그 가정 또한 딸은 식모처럼 부리기만 하고 공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평생 문맹으로 살아야 했다.

여기서 할머니는 울음을 그치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어나갔다.

박복한 년이 남편복까지 없어 백수건달에 걸핏하면 아내에게 손찌검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두게 됐다.

집안일은 뒷전이고 술 먹고, 노름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아내를 만나면 돈 달라고 아우성이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무능한 남편이니 할머니가 리어카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의 매 맞는 모습을 보고자란 서준 아빠 정석은 아버지가 들어오면 숨죽이고 숨어서 어머니의 매 맞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루는 정석씨가

”엄마! 매 맞지 말고 도망가요. “라고 말했단다.

여기까지 말한 시어머니가 갑자기 소영의 손을 잡고는

”아가야! 불쌍한 우리 정석이 좀 봐주면 안 되겠니?“

”나도 지금까지 너에게 잘 못 한 게 많아. 용서해줘.“

”미안하다. 너를 무시해서. 이제보니 넌 훌륭한 며느리구나!“

고부간 마주 잡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마침 창밖에서 빛 한줄기가  들어와 그들의 어깨 위에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