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버릴 수 있는 용기

류귀숙 2014. 5. 23. 16:22

        <버릴 수 있는 용기>

 "난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때 그 말은 생각만 해도 속이 상해. 난 그 모임엔 가지 않을래." 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친구가 한 말이다. 이미 몇 년이 지난 얘기다. 그걸 지금까지 차곡차곡 개켜두었나 보다.

 "얘 훌훌 털어버려. 담아 두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언제 듣고 있었는지 내 말을 뒤따라 낙엽 실은 바람이 비웃으며 다가온다. 이 바람 또한 낙엽 색깔이 되어 울적한 마음을 헤집는다. 훌훌 털어버리라고 친구에게 한 말이 바로 나에게로 달려든다.

 난 바람 앞에서 빈들에 홀로선 나무가 되어 휘청거린다. '넌 땠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반복된 따분한 삶을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채워 놓았던 나의 곳간을 곁눈질 해 본다. 한 중앙을 차지하고 웅크린 욕망의 덩어리가 단연 돋보인다. 그 주위를 에워싼 질투와 시기, 아집들이 성채를 이루며 똘똘 뭉쳐있다. 그 바깥쪽은 허무와 절망과 우울, 원망 등이 서성이고 있다. 그 옛날 타인에게 받은 상처 자국들도 위궤양 환자의 그것처럼 가슴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더러는 곰삭은 감정의 찌꺼기에서 한여름 날의 솔바람처럼 시원한 청량제가 들어있을 것 같다. 그것들을 찾으려 보물찾기 하듯 뒤져본다. 그러나 추억이나 사랑, 감사 등이 차지할 공간이 너무 작으니 어디로 달아나 버린 게 아닐까. 그들에게는 한 치의 자리도 내어 주지 않으니 발붙일 곳이 없지 않았겠나.

 사람의 마음 한구석은 항상 비워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 여백을 통해 좋은 감정인 희망, 용서, 포용 등이 들어와 정착할 것이다. 물이 차면 넘치듯이 차고 넘치는 가슴에는 상대를 품어 안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미련과 애착으로 쓸모없는 것에 매달려 되새김만 한다면 그 얼마나 쓸모없는 일상이 되겠는가.

 채울 수 없는 욕망으로 마음이 답답할 때는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한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좋은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어루만지며 상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이때마다 그 옛날 직장 선배의 이야기를 떠 올린다. 그 직장 선배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삶을 포기하려 생각했다. 그 계획은 수면제를 모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드디어 그 날이 다가오자 그 선배는 떠나기 전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었다. 이불을 세탁해서 예쁘게 꾸며 놓고, 장롱을 정리하고, 신발장 주방 그릇 등을 정리하고, 또 자신의 사후에 흉이 잡힐 것들은 과감히 버렸다. 마지막으로 유서를 쓰고, 물과 약을 옆자리에 놓고는 다시 한 번 살아온 길을 돌아봤다. 그 생과 사의 순간에 뇌리를 스치는 한 생각은 '버리자'라는 것이었단다. 가슴 속에 채워둔 미움과 원망을 버리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자 천지가 밝아지고 애들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평정을 찾은 선배는 돌아온 남편에게 계획을 이루지 못한 일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남편도 자신이 아내에게 준 상처를 그제야 깨닫고 용서를 구했다는 이야기다.

 그 이후  선배 부부는 잉꼬부부가 되어 이혼 직전에 있는 부부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상담을 하게 됐다. 이들 부부는 많은 부부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이혼을 막는 방패가 되어, 오랜 기간 활동을 했다. 몇 년 전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선배는 남편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담고 꿋꿋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먼저 옷장을 열어본다. 옷장 구석진 곳에는 풍만한 내 몸을 거부하는 옷들이 애원하듯 매달려 있다. 보랏빛 원피스를 입어 본다.  반 강제적으로 몸을 밀어 넣어도 거부하며 완강히 버틴다. 이번엔 회색 니트 투피스를 입어본다. 니트는 신축성이 있으니 수월하게 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순간 올챙이를 닮은 생경한 내 모습이 비치는 게 아닌가. 누가 볼까 봐  얼른 벗어던졌다. 이 옷을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했는가를 생각하니 아까워서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날 떠나버린 몸매에 연연하여 현재를 거부했던 욕심을 이제는 내려놓는다. 과감히 이별하려고 마음먹는다. 곳곳에 쌓여있는 포장지와 쇼핑가방도 매만져 본다. 이것들 역시 버리지 못하는 소유의식이 모여서 허섭스레기가 된 것이다. 포장지와 쇼핑 가방을 보면서 추억을 더듬어 본다. 선물을 받았을 때의 설렘, 물건을 사 들였을 때의 뿌듯했던 마음이 어른거린다. 이젠 그 마음만 고이 접어 가슴에 묻어 두고 그것들을 버리기로 했다.

 책상 서랍 속에서는 몇 년을 쓰지 않아 물이 말라버린 볼펜과 사인펜이 또 떡처럼 달라붙은 지우개들이 이미 쓰레기로 변해버렸다. 먼지를 뒤집어쓴 노트도 펼쳐본다. 그 속엔 내가 살아온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시구도 적혀 있고, 여행 시 느낌을 적어 놓은 기행문 비슷한 글도 적혀있다. 성경 구절이며 물건을 구입한 메모장도 있다. 이것들을 보니 10년 전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것들도 버리기로 했다.

 구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장 위 칸과 아래 칸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아직도 새 구두처럼 빛을 내며 내 눈길을 끄는 구두가 있어 손에 올려놓고 찬찬히 뜯어본다. 그 구두를 신었을 때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굽 높은 하이힐도 받힐 수 있는 몸이었는데... 몸이 불어나니 발도 자라나 보다. 지금은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이 커져있다.

 구두 골목에서 큰돈을 지불하고 맞춰 신었던 구두가 아니던가. 그 동안 그 작고 높은 구두를 신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나 보다. 이 구두 역시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는 시간을 보낸 것을 보면...

 한 쪽 구석에서 허리도 못 펴고 쭈그리고 앉은 롱부츠도 보인다. 이 부츠는 내 몸의 역사를 낱낱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옆에는 더러 헌 구두들도 습하게 웅크리고 있다. 그 구두를 신고 다닌 세월만큼 가버린 젊음을 묶어 두기라도 하려는가. 어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구두를 보니 괜히 안쓰럽다.

 굽 높은 자색 구두를 만져 본다. 차마 버리기엔 아직도 미련이 남는다. 검은 색 롱부츠도 지금 신고 나가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이 두 켤레는 딸아이에게 유산으로 남겨 둘까 생각하며 신장 가장 높은 곳에 고이 올려놓는다.

 낡은 모습으로 구석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 켤레 구두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작고 예쁜 운동화에 등산화까지도...

 난 꽤 오래 전부터 '말초순환 장애'라는 병명을 받았다. 이 병은 발가락 같은 말초 부위에 혈액이 통하지 않아 신발을 신을 때면 통증을 느끼는 병이다. 그래서 딱 맞는 신을 신고는 10분도 견딜 수가 없다.

 하이힐이니, 부츠니 하는 것은 이미 내 발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고, 운동화도 사이즈가 큰 것 아니면 안 된다.

 요즈음 나의 패션을 보노라면 바지와 T샤쓰가 나의 대표 패션이 됐다. 이 펑퍼짐한 운동화에 어울리는 유일한 패션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구입한 여러 종류의 단화들도 내 발을 품고 한 시간도 버텨주지 못하니 그들의 신세도 이제 서서히 이곳을 떠나야 하겠지. 하지만 그들도 나처럼  언젠가 찾아 줄 것이라 믿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가.

 발이 나으면 신게 되리라 맘먹고 간직했던 단화와 예쁜 운동화들을 만져 보니 선뜻 내려놓지 못하겠다.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똬리 틀고 있는 욕심이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뚱뚱하고 풍성한 몸집에 제멋대로 넓어진 발을 나의 것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고 되뇌어 본다.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듯이 흘러간  아름다운 추억도 잡을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의 소장품들을 버린다고 해서 내가 살아온 역사나 추억, 순수가 마멸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위로해 본다. 그리고 과감히 버리고 과거에 연연해 하지 말자고 다짐 해 본다. 나에겐 아직도 내일에 대한 꿈이 있지 않은가. 집착과 아집, 이기심을 버려야만 그 빈 공간에 미래가 자리 잡지 않겠나.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런 방법으로나마 버리지 못하는 욕망의 한 모퉁이를 비워 내려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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