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8

민들레 꽃씨 되어

(소설)민들레 꽃씨 되어 언제부턴가 밝음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밝음을 피해 그 반대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를 끌어안게 됐다. 불안하고 답답한 가슴이 그래도 그림자 속에 들어서면 숨쉬기가 수월했다. 그림자 속에는 지난날의 그리움이 오롯이 숨어있다. 그림자 속에는 미래의 꿈도 날갯짓하고 있다. 현실에서 누리고자 하는 욕망은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자 또한 햇살 아래서만 존재하니 햇살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하루해가 긴 그림자를 남기며 자취를 감추려는 시간이 오면 얼른 햇살을 붙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린다. 그림자가 아닌 완전한 어둠은 내 의지를 삼켜버린다. 어둠이 세상의 왕이 되어 지배의 채찍을 내리치기 때문이다. 소영은 밤이 오면 빈 깡통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신세..

소설 2022.06.12

부평초 날다

(소설) 부평초 날다“핑핑! 한국어 공부한다며?”“일상 회화는 가능하겠지?” S 교수가 부르기에 갔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다. 한국어 공부는 평소에 꾸준히 하고 있던 터라 자신 있게 대답한다.“네,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요.”언제부턴가 한국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 중 무역을 통해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한 중 문화교류에 일익을 담당하고 싶었다.대학에서 무역학과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운동과 겸해야 하는 실정이라 깊은 공부는 할 수 없었다. 기회만 된다면 한국으로 유학 가고 싶은 마음도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많은 한국 유학생을 만나게 됐고, 인터넷으로도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어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내 머릿속에서 용트림하고 있는 한국은 작지만..

소설 2022.05.10

(소설) 인연

(소설) 인연 장작불 같은 뜨거운 햇살이 모래를 볶아댄다. 맨발로 서면 껍질이 벗겨질 것 같다. 눈앞엔 검푸른 물결이 멍석말이로 몰려와 바닷가 모래밭을 때리고 간다. 쏴아~ 쏴아~ 물결이 바람을 일으키며 바람 소리를 낸다. 사각의 틀 안에서 손발이 묶였던 아이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며 해변을 질주한다. 더러는 바닷물에 첨벙 몸을 담그기도 한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어른들은 불안하다. 텐트 안에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우여곡절 끝에 수련회 장소로 동해안 해수욕장인 이곳으로 정했다. 한창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중학생이라,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라고 데려오긴 했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아이들의 안전은? 수영 실력이 남다르다는 중등부 담당 전도사님과 중등부 부장 집사가 매의 눈으로 지켜보..

소설 2022.03.16

그리움

(소설) 그리움 모진 세월도 흘러가면 그리움이 되는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10년을 7번이나 갈아 챘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그리움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목을 조른다. 때로는 울컥 솟아올라 눈물바다를 이룬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서둘러 세상을 하직한 아버지!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사흘째 되는 날 천둥 번개를 일으키며 내 곁을 떠난 어머니! 두 분의 얼굴은 물론 목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다. 나와 추억 한 점 남긴 적이 없건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다. 유복녀라는 딱지를 붙여준 아버지! 자식 버리고 떠난 매정한 어머니! 이 두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가을이 짙어지면서 그리움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한 잎 두 잎 자식을 버리듯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의 생존을 ..

소설 2022.02.04

아직도 진행 중

아직도 진행 중 길가에 버려진 나뭇등걸 같은 몸을 담요 한 장으로 감싼다. 좁은 병원 간이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인다. 잠은 자꾸만 저쪽으로 도망질한다. 빼꼼히 눈을 내밀어 쳐다본 천정에는 홍시같이 불그레한 전등 몇 개가 나를 감시하는 듯하다. 6개의 침대에는 팔을 결박당한 채 죄수처럼 누워있는 암 환자들이 가쁜 숨을 뱉어내고 있다. 더러는 통증을 참는 듯한 억눌린 신음이 잠을 쫓아내고 있다. 조금 전 간호사를 불러 떨어지는 수액의 양을 병아리 눈물만큼 줄여달라고 했다. 보호자는 링거에서 떨어지는 수액의 양을 점검해야 하고, 약이 다 떨어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조금 전에 간호사가 확인했으니 한숨 푹 자면 좋으련만 그 잠이라는 친구는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지려 한다. 남편이 누운 침대를 올려다보니 잠..

소설 2022.01.21

4자매의 남편버리기

11월이 한 해의 끝자락을 잡고 달랑거린다. 흐릿한 날씨에 스산한 바람까지 옷깃을 스쳐 간다. 호반 카페에 앉은 4자매의 시선이 창밖을 향한다. 호수 주위를 둘러싼 단풍잎이 번개시장에 남은 물건처럼 초라하다. 한 달 전엔 장밋빛보다 더 붉은 단풍잎이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며 우쭐댔는데…. 더러는 호수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고, 또 더러는 마지막 순간도 오솔길에 내려앉아 레드카펫처럼 길바닥을 온통 붉게 장식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닥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생명 줄 부여잡고 나무에 붙어 있는 빛바랜 단풍잎이 눈앞에 알짱댄다. 이를 보고 한마디씩 툭 툭 던진다. “꽃이든 단풍이든 시든 모습은 참 추하네.” “맞아 우리 모습과 비슷하지.” “한때는 요염한 자태를 뽐내더니 이젠 시든 배춧잎같이 쭈글쭈글하다..

소설 202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