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
땅이 쿵쿵 울린다.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가파른 계곡에서 토해내는 힘찬 물줄기 같은 북소리가 신명을 부른다. 세월을 물레질하던 시골 아낙네의 가슴이 북소리 따라 일어난다. 하늘을 우러르며 가슴 풀어 호소하던 청상과부의 한숨 소리도 북소리 따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어릴 적 고향 동네에서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사물놀이패들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한바탕 놀이판을 벌였다. 또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밟기'라는 것도 했다. 이는 집안 곳곳에 있는 잡신을 쫓아내는 행사다. 이때는 술과 떡을 대접 받고, 찬조금도 받았다. 물론 받은 찬조금은 동네를 위해 요긴하게 쓰였다. 이 날은 동네잔치로 동네 사람들이 하나 되어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어느 집 결혼 잔치나 환갑잔치보다 더 규모가 컸으며 참석 인원도 가장 많았다. 또 동네 강아지나 고양이들 까지도 사람들 틈에 끼어 돌아다녔다. 여기에다 신명까지 덧붙이니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고 꽹과리, 장구, 징이 하나로 어울려 한껏 흥을 돋운다.
가난에 절어 허리도 못 펴던 동네 사람들이 구름떼 몰리듯 몰려든다. 꼬부랑 할머니는 잇몸만 남은 입으로 하회탈처럼 배시시 웃는다. 점잖 빼느라 두루마기에 갓까지 눌러쓴 늙수레한 어르신들도 장죽을 꼬나물고 어슬렁댄다. 이 때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떼처럼 이리 저리 몰려다니며 고샅을 내달린다. 사물놀이패들이 움직일 때마다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춤추고, 흉내 내고, 신이 났다. 여기에 새색시나 처녀들도 빠질 수는 없다. 수줍음에 몸은 담 뒤로 감추고 귀와 눈은 놀이판을 향한다.
무명 저고리 위에 북통을 단단히 동여맨 북재비가 손을 높이 들어 허공을 가른다.
어느새 놀이판이 무르익고 북소리도 장군의 기개처럼 늠름하다. 우렁찬 목소리로 천하를 호령하듯 북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진다. 북재비는 발로 땅을 힘차게 구르며 북채 쥔 손에 힘을 가한다. 북소리는 온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구름위로 둥실 떠오른다.
그 옛날 그때의 우렁찬 북소리가 듣고 싶다. 지금처럼 신명이 그리워질 때면 그 북소리가 생각난다. 북은 어느 곳에서나 앞장서서 소리를 잡아주는 악기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시작을 알리며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선다.
'고무(鼓舞)하다.'라는 말의 뜻은 '힘을 내도록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우다.'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이 말은 북, 고(鼓)와 춤출, 무(舞)가 합쳐서 된 말이다. 그러니 옛날에도 북을 이용해서 춤을 추며 사람들의 마음을 추켜올렸다는 말이 된다.
가뭄에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저수지의 물이 바닥을 치고 있다. 거기다 그 물들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른빛으로 변했다. 한강물이 변하고, 낙동강물이 변했다. 우리가 먹을 물이 당장 걱정이다. 그때의 북소리가 이곳에도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북소리를 들으면 힘이 솟고 용기가 생길 것 같다. 혹시 아는가? 둥 둥 울리는 북소리 듣고 힘센 바람이 비구름을 몰고 올지….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을 때가 언제였던가? 이 삭막한 도시에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북소리가 울리는 날이 올까?
어린 시절의 향수가 그리움이 되어 목구멍에 차오른다. 이렇게 답답할 때 북을 쳐서 신명을 불러들이고 싶다.
요즈음은 뉴스시간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메르스'가 찍어내는 숫자판을 보며 답답하게 한숨만 내 쉰다. 오늘은 추가 환자가 몇 명일까? 사망자는? 또 격리 자 수는?
메르스란 놈이 이 땅을 강타한 지가 벌써 한 달을 훌쩍 넘기고 두 달이 다 돼 간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치근댄다. 이들은 물러 설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지독하게 버티고 있다. 여기다 한 술 더 떠서 중국 길림성에 있는 지안(集安)시에서 우리 공무원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단다. 우리 조상들의 기개가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이 아니던가? 유적지를 돌아보고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며 애국심을 한 아름 안아 보고 싶었는데….
아까운 목숨을 잃은 공무원이 9명이고 부상자가 16명이란다.
범같은 기상으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의 조상님들이 아닌가! 그 조상님들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후손들에게 분노의 채찍을 휘두른 것인가?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는 추상같은 조상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금은 남의 땅, 남에게 빼앗긴 땅이 된 고구려, 발해의 옛 땅. 여기에는 일제 강점기에 살길을 찾아 떠났던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남의 땅이 됐지만 우리 민족이 살고 있고, 우리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우리 공무원들을 태운 차가 완전히 뒤집혀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는 사고 소식에 놀라고 또 놀랐다. 엎친 데 덮친 재앙을 맞고도 정치한다는 지도자들은 북은 울리지 않고 주문만 외고 있다. 중얼 중얼 우리들은 알아듣지 못할 주문만 외고 있으니 국민들은 답답하다.
둥 둥 둥 북을 치면 백만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난다. 큰 칼 높이든 장군이 질풍 같이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한다. 그 장군의 기개를 그려본다. 범같이 포효하며 독수리 같이 차고 오르는 그 기상이 그립다.
지금이 바로 북을 울릴 때다. 온 국민이 일어나야할 때다. 북소리에 오천만이 일제히 일어나 적군을 무찌르듯 부정과 비리, 시기, 다툼, 헛된 욕망을 물리쳐야 한다. 이 외에도 적군 같은 존재가 도처에 널려 있다. 북을 울리자. 그래서 축 쳐진 어깨를 끌어올리자. 얽힌 실타래 같은 국민들의 마음을 북소리에 모아보자. 덩실덩실 신바람을 불러 모아 두 팔 걷고 일어서자.
지금은 북재비가 필요할 때다. 북통을 허리에 단단히 동여매고 팔은 높이 휘둘러 북을 치는 북재비가 필요하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벼랑을 거슬러 올라가 하늘을 우러러보자. 용이 승천하듯 맹수가 포효하듯 우렁찬 목소리를 북소리에 실어 보자.
가장 먼저 정치판에서 북재비가 나와 북을 쳐야 한다. 욕심의 돛을 내려놓고 잡음을 날려 보내고, 한 목소리를 찾게 해야 한다. 그 옛날 독립 만세소리가 한반도를 뒤집었던 그때를 바라보자. 그렇게 될 때 사회 곳곳에서 북재비가 나올 것이고 가장이 북을 들고 나올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더듬이 끊어진 곤충처럼 방향을 잃고 살아왔다. 생의 목표도 흐릿한 안개 속에 덮여
있었다. 나부터 일어나 북을 메고 흐릿한 인생길을 밝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