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짝패

류귀숙 2015. 7. 24. 08:42

           짝패

 동 동, 당 당, 톡 톡, 탁 탁 아침을 가르는 경쾌한 도마질 소리다. 도마 위에 푸성귀를 올려놓고 칼질을 한다. 깍둑깍둑 깍둑썰기, 가늘고 길게 채썰기, 가루처럼 잘게 다지기를 한다. 동 동, 당 당의 리듬은 작은 북의 동당거림이며  여명을 걷고 열리는 오케스트라다. 때로는 꽁꽁 언 생선을 놓고 일격에 내리치기도 하는데 그 소리 또한 화음에 어긋나지 않는다. 탁! 탁! 울리는 둔탁한 소리는 아침잠을 깨운다. 꼭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처럼 잠든 사람을 깜짝 놀라 깨어나게 한다. 

 추운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워 아침을 외면할 때도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어김없이 아침잠을 걷어갔다. 이렇게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는 꽁꽁 언 겨울을 녹였으며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어릴 적의 겨울 아침은 요즈음과는 비교가 안된다. 문고리에 손이 철썩 달라붙는 일은 예사고 윗목에 놓아둔 자리끼가 얼어붙기도 했다. 따뜻한 아랫목을 향해 형제들의 다리가 부채 살이 몰리듯 몰려들었고 이불은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눈꺼풀은 왜 그렇게도  무겁든지….  덕지덕지 눌러 붙은 아침잠을 걷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냈던 그 그리운 도마질 소리를 나도 흉내 내며  침묵 속에 잠겨있는 가족들을 일으켜 세운다.

 언제 부턴가 도마질 소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틱, 틱, 둔탁한 소리와 함께 픽, 휙 하는 빗나간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도마의 등짝에서 한바탕 칼바람이 일어난다. 거북 등처럼 펑퍼짐한 등짝에다 난도질을 해 댄다. 무수한 칼금들이 손금처럼 좌우 전후로 잔금을 긋기 시작한다. 이어서 사근사근 연하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도마와 칼의 짝패가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된다. 잘게 잘려지고 예쁘게 썰리던 식재료들이 단번에 절단되지 않아 들쭉날쭉 삐뚤삐뚤해진다.

 급기야 무디어진 칼로 움푹 파인 도마의 상처를 향해 팔에 힘을 실어 내리치면 칼날도 군데군데 이가 빠져 나간다.

 남편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난 뒤 애꿎은 도마에다 무딘 칼을 휘둘러 칼금을 그어댔다.

 푸르던 시절 남편과 내가 짝패를 이룰 때 도마와 칼도 함께 짝패를 이루었다. 신혼시절의 아침은 현악 4중주의 감미로움과 혼성 4중창의 조화로 행복의 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던 그 화음이 세월의 폭풍에 휩쓸리더니 일순간에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아마 내 안에 도사린 미움의 벽이 한 겹 한 겹  쌓여갔을 때였으리라. 그때부터 도마는 상처만 깊어지고 고운 소리를 내지 못했다. 깊어진 도마의 상처로 칼날이 부러지는 아픔까지 맛봐야 했다.

 가끔은 화가 치밀어 서슬 퍼렇게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 보지만 그 상처가 오히려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결과를 낳게 됐다. 상처가 상처를 만들고 성벽이 성벽을 쌓아가던 어느 날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가 그리워졌다. 

 우리 집엔 파란 색 청석으로 만들어진 반질반질한 다듬잇돌이 있었다. 여기에 미끈하게 잘 생긴 방망이와 짝패를 이루며 빨랫감을 매만졌다. 알맞게 풀 먹인 빨랫감에 적당히 물을 뿌려 꼭꼭 밟아준다. 이렇게 골고루 습기가 퍼져 부드러워지면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작은 북을 치듯 드럼을 두드리듯 팔에 신명을 붙여 두드린다. 동당동당 일정한 소리는 멀리서 들을수록 더 정감이 갔다. 지금도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만 생각하면 어린 날로 돌아가 추억에 젖곤 한다. 다듬이질은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풀어주는 해방의 깃발이 되어 여인네들의 가슴속에 바람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다듬이 방망이에 겹겹이 쌓였던 분노와 원망을 실어 보냈다. 다듬이질을 하는 동안에는 생활의 시름을 잊었고, 가난의 짐을 벗어 던졌으며, 뒤이어 가슴엔 신바람이 일어났다. 방망이를 거머쥔 팔에 힘이 가해지면서 다듬이 소리는 점점 더 크게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가 만취해서 들어오시는 날이면 그 불만과 불안감을 다듬이질로 풀어 나갔다. 빨랫감을 향해 끊임없이 응징하고 처단하며 단죄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어머니는 이 시간에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동시대를 살아온 당시의 여인들은 다듬잇돌에다 스트레스를 부려 놓고 한 숨 돌리는 시간을 가진 것 같다. 다듬이질을 마친 어머니는 언제나 한결같이 단아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의 동백기름 촉촉이 바른 흑단 머리가 떠오른다. 정 중앙에 하얀 가르마 곧게 가르고 쪽을 찐 정결한 조선 여인의 모습이….

 무수히 칼집을 내던 도마와 칼을 햇볕 좋은 날 해바라기를 시켰다. 햇볕 잘 드는 베란다 벽에 붙여 놓고 햇살을 불러 들였다. 햇살이 비칠 때마다 훤히 드러나는 칼금과 내리 찍힌 상처들은 깊은 골을 만들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 놓았다.

 칼날이 가한 무수한 상처의 흔적들을 보면서 내가 박은 못과 휘두른 칼날들을 생각해 본다. 아집으로 뭉쳐진 자아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게 된 것도 그 도마의 상흔을 본 뒤부터다.

 상대를 향해 휘둘렀던 칼날들이 튕겨져 나갔다. 그 칼날들이 모두 모여서 나를 향해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또 나 자신을 향해 단죄의 칼을 휘둘러도 역시 튕겨져 나가 상대를 겨루게 됐다. 결국 짝패는 가장 가까이 있으므로 상처를 공유하게 된다. 가까이 있다고 또 만만하다고 폭군처럼 휘둘러댔던 칼자국들은 모두가 우리 부부를 향해  비웃고 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 인연의 끈으로 작패를 맺은 이상 인연의 줄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 인연은 자연의 순리요 신의 뜻이다. 그 뜻을 무시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바퀴 돌아서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짝패의 인연이 거스를 수 없는 불변의 진리라면 어리석은 인간이 어찌 거스르려고만 했을까! 스스로를 달래는 방법이 있는데 엉뚱하게 빗나간 길을 달렸다는 자각을 했다.

 내 안에 도사린 미움의 벽을 과감히 허물고 내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겉돌았던 많은 시간들을 고이 접어 장롱 속에 감추고 첫 만남의 설레던 시간을 찾아 나섰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인연의 짝패가 아닌가? 이제 귀밑머리까지 하얀색으로 물이 들면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려 주고 있다.

 두 눈 크게 뜨고 주위를 돌아보니 환상의 콤비들이 눈에 뜨인다. 바늘과 실, 절구와 절구 공이, 다듬잇돌과 방망이들이 인연의 끈을 잡고 묵묵히 임무를 다하고 있지 않은가?

 무딘 칼을 숫돌에 갈아 도마 위에 얹힌 재료들을 썰어본다. 예쁜 모양으로 썰어서 남편의 밥상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볼까? 성찬의 밥상 앞에 앉은 환상의 콤비를 그려 본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범인은 누구인가?  (0) 2015.08.11
나도 이맘때쯤엔  (0) 2015.08.07
  (0) 2015.07.20
번데기의 꿈  (0) 2015.07.17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0) 201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