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비단길의 유혹

류귀숙 2020. 4. 23. 09:00

비단길의 유혹

 

류귀숙

비단길! 실크로드! 이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설렘으로 두근거림으로 비단 길을 걸을 수 있다는 희망에 한 달을 기다렸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비단 길에 대한 아련한 꿈을 꾸어 왔었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더니 이제야 그 통로가 희미하게 보였다.

박물관 대학에 들어가면 실크로드를 답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새벽에 줄을 서야한다는 그 대학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마음 졸였더니, 드디어 성공이라는 행운을 거머쥐게 됐다. 힘차게 내딛은 첫발이기에 힘든 공부를 이겨내고, 졸업장까지 손에 쥐게 됐다. 그리고 한 달 전 실크로드 답사 공고가 나자 번개같이 신청했더니, 그 꿈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보드레한 비단길 옆에는 푸른 초원이 있고, 풀 뜯는 양떼와 피리 부는 목동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낙원! 그 낭만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한 달 기다리기를 설빔 옷 입으려고 설날 기다리는 아이같이 했다. 꿈속에서는 낙타 떼 거느리고 길 떠나는 대상의 행렬에 끼기도 하고, 구도자 따라서 천축 국으로 발길을 옮기기도 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창공을 나를 때는 독수리의 날개 짓 같이 희망만이 앞길을 장식했다. 대원으로는 박물관 대학생 43명과 기사, 현지 가이드, 현지 도우미 등을 포함해서 46명이 대망의 실크로드 '천산 북로' 길을 가게 됐다.

메인 코스인 중국 서안에서 둔황을 거쳐 우루무치로 가는 길은 이미 박물관에서 선배들과 십 수차례 답사한 코스다. 그래서 이번엔 처음으로 어려운 코스인 스텝로드를 택하게 됐다.

"여러분 이번의 스텝로드는 처음으로 가는 어려운 길입니다." 라는 '조 영길'회장님의 말씀 중에서 스텝로드라는 말만 들리고 어렵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 대원 46명은 대한민국 태극기가 그려진 깃발을 높이 든 '조 영길' 대장의 인도 아래 보부도 당당하게 출발했다. 비록 낙타 대신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지만 그 옛날 서역상단의 출발을 방불케 했다.

숨을 죽이며 푸른 초원을 기대했던 우리들의 눈앞엔 말라비틀어진 누리끼리한 풀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사방 천지엔 흙먼지 날리는 누런 벌판 뿐, 초원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5시간을 달려도 누리끼리한 사막은 끝없이 펼쳐진다. 오채 만에 들러 여러 색깔을 나타내는 신기한 돌산을 봤는데도, 초원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대원들의 실망이 눈에 보인다.

우리들은 초원의 길이라는 초원만 생각했지 거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은 생각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타클라마칸 사막은 넓이 만해도 한반도의 1.5배가 되고 길이가 1000Km에 폭이400Km란다. ‘타클라마칸“이란 뜻도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이다. 아차! 이 일을 어쩌나! 이름만 믿고 잘 알아보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비단을 전하려 중국의 비단을 싣고 멀고 먼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가다 더위에, 추위에, 또 목마름에 운명(運命)을 달리한 사람이 얼마던가?

형형색색의 아웃도어에다 올망졸망 배낭을 메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려대던 대원들은 풀기 없는 눈동자로 피로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원들을 독려하는 老대장은 우리를 고무하느라 안간힘이다. "조금만 참아라. 혜초 스님이 낙타타고 가셨던 길이다. 당시 힘들게 이 길을 갔던 대상들을 생각해라."

이렇게 버스만 타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지친 우리들 앞에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초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아시스 마을인 '하미(哈密)에서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양쪽 길옆에 펼쳐진 장대한 목화밭을 본 것이다. 환호성을 지르며 대원들은 목화밭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고 목화를 따 보며, 어린 시절 보았던 목화밭을 떠 올렸다. 그렇게 끝없이 펼쳐진 목화밭을 지나니, 이젠 대추밭이다. 방풍림으로 심어 놓은 임자 없는 대추를 우리 대원들이 우르르 내려서 따 먹고는 마음껏 따서 가방에 넣기도 했다. 어느새 대원들의 얼굴엔 생기가 돈다. 오기를 잘했다고 말하는 얼굴이 대추처럼 발그레하다.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으니 살만한 곳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이제는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도 무섭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 다음에 올 오아시스가 있으니까!

중국에선 이 신장(新疆)지역을 개발하려고 천산 산맥에 있는 만년설을 끌어들이는 수로 공사를 이미 3,500년 전 수나라 때 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5,000m나 된다고 하니, 만리장성에 이어 이것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이곳에 번화한 오아시스 도시를 조성했는데, 그 중 하나의 도시가 하미(哈密)이다. 그 외에도 이리(伊犁), 규톤(奎屯) 투루판(吐魯番)등의 오아시스 도시가 건설돼 있다.

자두만한하게 큰 왕대추의 달콤한 맛에 취해 있을 때, 우리 앞에는 거대한 모래사막이 펼쳐졌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바람에 몰려온 모래들이 쌓이고 쌓인 거대한 모래성이 거기에 있었다.

모래사막 가운데 우둑 선 '마귀 성(密雅丹)'이라는 거대한 모래성은 오랜 시간의 풍화 과정을 거쳐 모래가 기묘한 돌로 변한 곳이다. 여러 형태의 바위들이 장관을 이룬 이 성에 '마귀 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바람이 불면 귀신 소리가 나기 때문이란다.

자연의 조화가 우리 인간이 미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자연에 비하면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인가를 느낄 수 있다. 풀 한 포기의 생명체도 허용하지 않는 모래사막의 거대함이, 마귀 성의 경이로움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웬일일까? 아마 나도 이 거대한 자연에 동화된 것이리라.

지루한 길에 그래도 위안을 주는 장면이 종종 나타났다. 창밖으로 탐스럽게 매달린 빨간 고추가 우릴 맞이한다. 고추 말리는 풍경도 장관이다. 길바닥을 가득 메운 고추 무더기가 산을 이룬다. 넓게 펼쳐진 옥수수 밭과 누렇게 산을 이룬 말린 옥수수 무더기도 볼거리다. 또 투루판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그 품질이 우수하다고 한다. 특히 건포도는 나무에 달린 채 건조되기 때문에 건조기에서 말린 건포도와 달리 비타민 함량이 많고 당도도 높다고 한다. 포도가 결실이 되면 사막이라 비가 오지 않으므로 수로에서 공급되는 물만 끊으면 포도나무는 자신이 말라 죽지 않으려고 열매에서 수분을 빼앗아 자신이 살아남는다고 한다. 또 오는 길에 반면(拌面)이라고 하는 비빔 면을 사 먹었는데 손으로 짜장면의 면을 뽑듯이 반면용 면을 뽑는 장면을 봤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수타면의 방식과는 달랐고 맛도 괜찮았다.

13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 간 곳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요, 우리가 그려오던 꿈의 초원 나라티 공원이다. 전 날 밤 새벽에 도착해서 몸을 풀고, 아침을 맞이한 우리들의 눈앞에 별천지가 펼쳐졌다.

이곳 나라티는 해발 3000m의 공중(空中)초원으로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물이 흘러 모인 곳엔 아담한 호수가 만들어졌다. 산 중턱엔 양떼들이 말들과 사이좋게 풀을 뜯고 있었고, 유목민들의 주거지 빠오(게르)가 드문드문 보이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장삿속에 빠른 유목민 중에는 말을 대여해 주었고(1시간에 80위안) 양 꼬치를 구워 파는 위구르족도 있었다.

이 초원은 봄이 더 아름답단다. 봄에는 곳곳에 자생하고 있는 사과 꽃이 만발하기 때문에 꽃동산을 이룬단다. 여름엔 푸른 초원이, 가을엔 단풍과 호수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이루며, 겨울의 설산까지 장관이니,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다.

유목민들은 대부분 위구르족, 카자흐족, 몽고족 등이다. 이런 곳에 한족을 인위적으로 배치해서 소수민족들의 단결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한 족이 40%를 넘는다고 한다.

규톤(奎屯)이라는 오아시스 도시는 정부가 한족 병단(兵團)을 만들어서 배치한 계획된 도시다. 이들은 농사를 지어도 정부에서 월급을 받기 때문에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다 유사시에는 국방의 의무를 하게 된단다. 장족, 티베트족 등은 호시탐탐 독립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들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 바로 코앞에 병사들을 주둔시킨 것이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호텔 입구에는 사복한 병사가 주둔해 있었다. 또 로비에는 총과 몽둥이가 비치돼있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느낌을 주면 바로 군대가 출동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 험한 천산 산맥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과한 것이다.

그 옛날에는 대상들이 낙타 200마리 이상과 300명이 넘는 인원으로 상단을 꾸려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낙타 떼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장관을 이루며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우리들은 바로 그들이 지났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 46명의 대원들은 그 길을 따라가며 오아시스의 물을 마시고, 풍성한 과일 맛도 보면서 사막을 넘어갔다.

저 멀리 설산을 바라보며 비단보다 더 포근한 마음으로 자연에 안겨보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 이번 답사의 보람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우리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모든 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낙타가 아닌 자동차를 타고 이 길을 가고 있지만, 그 옛날 구도의 길을 떠났던 고승들의 고뇌가, 비단을 싣고 부자의 꿈을 꾸었던 대상들의 고통이 마음에 와 닿는다.

죽음의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또 설산을 주시니, 인간은 설산의 물을 사막으로 끌어들이는 기적을 낳게 했다.

사막과 같은 험난한 인생 여정에서도 참고 견디면 오아시스 같은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자만하면 오아시스 뒤에 오는 참혹한 모래바람에 의해 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길은 인내를, 겸손을, 순응을 배우게 하는 길라잡이가 됐다.

비단보다 더 포근함을 전해주는 인생길이 돼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이미 석양이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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