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생님>
난 봄이 되면 어김없이 향수병을 앓는다.
부모님, 친구들, 뛰놀던 고향 산천 ......
고향에 대한 그리움 중에서는 '고향'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가슴속에 거대한 바윗돌로 다가오는 분이 계신다.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는 그 분은 바로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시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유난히 몸집이 작고, 지적 능력이 떨어진 나는 늘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그저 그런 존재였다. 오죽하면 어머니께서 한해 꿉으려고( 한해 유급시키는 일. 예전엔 나이가 어리거나 공부가 미치지 못한 아이에게 가끔 있는 일) 했을까!
그런 나에게 구세주로 나타나신 분이 6학년 담임이신 '이 종영' 선생님이시다. 그분은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신 분으로 열정이 대단하셨다. 그분이 나에게 다가오시어 "넌 노력하면 잘 할 수 있어" 하시는 칭찬 한마디가 나에겐 복음으로 들렸다.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다. 모든 책들을 읽고, 또 읽고, 밤 시간엔 호롱불 밑에서 공부했고, 새벽 종소리(교회 종)와 함께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공부했다.여름엔 날아드는 모기를 쫓기도 했고, 겨울엔 이불 뒤집어쓰고, 언 손을 호호 불며 공부했다.
그러나 기초가 부족한 난 혼자 힘으론 한계를 느꼈다. 산수가 걸렸다.
생각을 거듭한 나는 동네를 돌며 보충 수업을 받기로 했다. 주말을 택해 외지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오빠 집을 찾아가 산수 문제를 배웠고 평시에는 내가 보기에 지식인이라 생각되면 어김없이 산수 문제를 들이댔다.
그 중에는 학교에서 일하시는 소사아저씨, 심지어 우리 집 머슴아저씨도 있었다. 그때 그 소사아저씨는 리어카를 끌고가시다 산수 문제를 가르쳐주셨다. 일본에서 공부하신 분으로 두뇌가 명석하여 어려운 6학년 산수문제를 풀어주셨다. 지금 생각하니 '비례식'으로 푸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머슴 아저씨는 내가 잘못 짚었다. 아저씨는 자신의 무지를 나타내지 않으려 오히려 나에게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만 주었다.
꼭 양주동 박사님의 학습법 같다. 지금도 그렇게만 공부한다면 고시도 패스할 것 같다.
고군분투의 노력은 곧바로 성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학교 선생님들은 나를 '혜성'같은 아이라 했다.
담임선생님의 기쁨도 커서, 한번은 아버지를 찾아오셔서 나를 대구에 있는 경북여중에 지원해보라고 권하셨다. 시골에 두기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어린 게 객지에서 어찌 사노?" 하시며 한마디로 거절하셨다.
당시는 중학교도 입시가 있어, 교육열이 높은 집에서는 도시로 진학을 시켰다.
우리의 선생님께서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방과 후 보충수업을 하셨고, 밤에는 외지로 진학하는 5명에게 그룹 과외를 하셨는데, 그 속에 나를 끼워주셨다. 명분은 읍내 중학교 입시에 1등 시키려는 것이란다.
물론 무보수로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부모님들이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선생님의 노고를 몰랐던 것 같다. 우리 어머니께서 감을 딸 때는 감을 갖다드리고, 떡을 하면 조금 드렸을 뿐이다.
돈으로 모든 대가를 매기는 이 시점에서 보면 그때의 선생님이 참 스승이시며 참 사랑을 실천한 분이시다.
알뜰한 가르침 덕분에 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됐고 예능이 뒤지기 쉬운 시골에서 예능 이론까지 완벽히 가르쳐 주신 덕을 톡톡히 봤다.
당시 시골 중학교에는 학급 수가 적어(전교6학급) 예능 전공 교사가 없었다. 그래서 여선생님이라는 이유로 국어 선생님이 음악과 무용까지 가르쳤으니, 그 수업 또한 볼만했다. 오르간도 칠 수 없는 선생님이 '봄 처녀'노래를 선창하면 우리가 따라했다. 미술은 또 어떻고? 사회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쳤는데 미술 시간만 되면 '자유롭게 그려라.'가 수업의 전부였다. 여선생님이면 전공과는 상관없이 가정을 가르쳤는데 독학으로 해도 무리가 없는 과목이지만 수예나 요리는 한 시간도 배우지 못한 게 아쉽다.
이런 형편에서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예능 이론은 빛을 발했다.
장조를 붙일 때는(사 라 가 마 나 바)를 외워라. 으뜸음을 찾을 때는 '다. 라. 마. 바. 사. 가. 나'를 꼭 알아야 한다. 또 악상 기호를 외워라. 등의 주입식 이론수업 덕분에 전공교사 없는 중학교 예능 공부였지만, 독학으로도 대구에 있는 일류 여고에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도 6학년 때 외운 시구며, 역사 연대표, 음악의 장조 붙이기, 으뜸음 찾기, 조옮김하기 등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또 선생님께서 자상하게 베풀어 주신 은혜도 생각난다.
시골 촌뜨기를 데리고 20시간이나 걸리는 완행열차로 서울에 수학여행간 일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는 전란 후라 재정이 빈곤하여 5학년 때까지 3학급 이였었는데 교실 부족, 교사 부족으로 2반으로 만들어 한 반에 80명이 넘었다.
선생님께서는 두 반을 선두에서 인솔하셨고, 다른 반 선생님은 그 해 초임 발령받은 선생님이라 보조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학년 부장인 셈이다.
선생님께서 여행비를 들고 차표를 끊으시는 동안 초임이시던 1반 선생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셨는데 요령 부족이었는지 애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도에서 여행 온 학생과 싸움이 붙어 난리도 아니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기차표를 끊고 난 잔금을 모두 날치기 당했단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 우리들은 멋도 모르고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우리들은 멋모르고 천방지축 날뛰었다. 선생님의 자상하신 배려로 무사히 여행을 할 수 있었다지만,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얼마나 당황했겠으며 또 여행 경비를 어떻게 조달하셨는지 그게 지금도 궁금하다.
당시는 카드도 없었고, 예매도 없었으니까 현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찌됐던 우리들은 계획대로 여행을 잘 했는데, 모두가 선생님의 기지와, 수고와, 사랑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쯤 백발이 성성하실 선생님은 무얼 하실까? 뵙고 싶습니다. 소식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스승 찾기 사이트를 찾을까? 생각하다 그만 둡니다. 혹시...? 하는 두려움에 그저 마음속에서 젊고 패기 넘치는 그 모습의 선생님을 가슴 속에 간직하렵니다.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선생님을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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