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이삿짐을 싸며

류귀숙 2013. 11. 7. 21:38

   <이삿짐을 싸며>

 이삿날을 받아놓고 하나 둘 짐 정리를 한다. 먼저 두 벽면에 가득 꽂혀있는 책부터 정리한다. 하얗게 뒤집어 쓴 먼지를 털고,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골라낸다.

 아이들이 즐겨 읽었던 동화책을 펼쳐보니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꿈을 읽던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큰아이는 위인전  등의 전집류를 즐겨 읽더니 반듯한 청년으로 자라 2세 교육에 힘쓰고 있다.

 둘째는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모든 책을 섭렵하는 형이라 그 아이의 어릴 적 소원은 책 속에 묻혀서 하루 종일 책만 읽는 것이었다. 그때 읽은 책들이 거름이 돼서 지금은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막내는 역사, 지리, 등의 사회계통의 책들을 좋아해서 역사나 지리 관련 서적들을 즐겨 읽었다. 특히 '먼 나라 이웃 나라'는 막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라 이 책만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이 책에 감동 받은 막내는 지금도 해외여행을 좋아하며 외국에 살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많은 책들을 사기위해 할부금을 감당하느라 힘겨웠는데 그래도 책 읽기를 즐기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동도서관에서 빌려주기도 하고, 이웃 아이들과 바꿔 읽히기도 했다.

 거금을 주고 들여놓았던 백과사전도 이제는 이별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되었으니 이 책들은 이웃 아이들에게 나눠줘야겠다. 손자들에게 물려 줄 것만 약간 남기고 모두가 책장을 떠났다.

 이 책들을 사줬을 때 기뻐하던 아이 둘은 이미 새 둥지를 틀었다. 이미 출가한 두 딸의 뒤를 따라 그 애들이 애독하던 책과도 이별해야겠다.

 다음으로 남편 책장으로 갔다. 남편이 시인인 관계로 주로 기증 받은 시집, 시조집, 문학잡지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지만 이제는 과감히 버리고 모든 짐들을 줄여야겠다.

 남편 작품들이 실린 책들을 찾아내어 책장을 펼쳐보았다. 주옥같은 글귀들이 책 밖으로 튀어나와 살아온 인생길 주저리주저리 엮는다. 잊고 살았던 지난 30여년의 역사가 남편의 글귀 속에서 숨 쉬고 있다. 빛바랜 책들을 한 권 한 권 뽑아내어 젊음의  순간들을 펼쳐본다.

 책마다 소복소복 담겨있는 옛이야기, 도란도란 들려주는 힘들었던 젊은 날도 아름다운 추억이여라! 

 남편 작품 실린 것 빼고는 절반 이상을 도서관에 기증하려고 현관 입구에 쌓아두었더니, 이웃들이 다투어 가져가고 몇 권 남지 않았다. 모처럼 책 잔치를 벌인 셈이다.  요즈음 책을 읽지 않는 인터넷 세상에서 그래도 책을 읽겠다고 가져가는 걸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손길 닿는 물건마다 아기자기한 사연들이 묻어 있다.

 아이들 물건 챙기며 애들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일기장, 성적표 앙증스런 모습이 담긴 사진첩들과 상장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니 어느 듯 한나절이 다갔다.

 친정아버지께서 하셨던 대로 세 아이들의 상장을 파일에 차곡차곡 끼워두었다. 세 아이 모두 상장 파일만 두툼한 걸로 2권씩이다.  이 상장을 받던 날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 우등상, 개근상, 백일장에서 장원이 되어 상금까지 받았던 장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래도 욕심에 못 미쳐 안달 하며 애들 목을  조여 대었다. 그때가 후회로 다가온다.

 이제는 이것들도 애들에게 돌려 줘야겠다. 이미 새 둥지를 튼 두 아이는 집이 복잡하다고 새 집 사면 가져가겠단다. 언제든지 자신의 둥지로 가져갈 수 있게 그것들은 따로 박스에 담아두었다.

 전자제품, 가구들,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한 건 없다. 내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 주었던 애정 깃든 물건들이다. 그것들과도 이제 과감히 이별할 때가 왔다.

 나와 10년, 20년, 어떤 것들은 30년 넘게 같이한 물건들이다. 그러니 이별하는 게  어찌 아쉬움이 없겠냐마는 이제는 미련 없이 외면하기로 했다.

 그래 인생은 어차피 이별 연습인 것인데....

 이 아파트에서 애정을 쏟고 살아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을 땐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구석구석 닦고 가꾸었는데, 이별은 이렇게 우연히 오는가. 이 세상 이별도 이와 같을 것이니 미리 연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싱크대 높은 곳에 고이 아껴둔 접시를 꺼내본다. 이것들은 시집 올 때 가져온 것으로 처음엔 아까워서 못썼고, 다음엔 번거롭고 귀찮아서 손에 닿는 그릇들만 사용했었는데 이것들과도 이별이구나!

 20대 처녀시절에 이 그릇들을 차곡차곡 사 모으면서 신혼의 핑크빛을 꿈꾸었는데......

 내 마음 날개 달고 신혼으로 돌아간다. 지금 생각하면 어쩜 그렇게도 뭘 모를 수가  있었을까? 

 연탄불에 밥을 해 먹으려고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며 연탄불을 피웠던 일이 생각난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다. 아마 그리운 것은 싱그러운 젊음이 아니었을까?

 싱크대 구석을 들춰내니 어머니가 주신 놋그릇 한 벌이 보인다. 그것은 원망의 눈빛으로 시퍼렇게 독이 올라있다. 내가 어릴 때 담아 먹었던 그릇이라고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마지막 정리하면서 가져다 준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친구가 그걸 달라기에 어머니께는 미안하지만 요긴히 쓸 것을 믿기에 시퍼런 얼굴 닦아 주지도 못한 채 떠나보냈다.

 정든 이웃들과도 이별 할 것을 생각하니 너른 집으로 이사하는 게 좋지만은 않다.

 이별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좀 더 좋은 집으로 간다는 설렘으로 허전함을 달래보지만 이별의 무게가 어깨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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