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춘설 쌓인 폐교 교정

류귀숙 2013. 11. 12. 16:39

     <춘설 쌓인 폐교 교정>

 삼월 신학기가 시작되면 겨울이 봄을 밀쳐 내려 안간힘을 쓴다.

 떠나지 않으려 떼를 쓰며 병아리 같은 1학년의 입학 길을 찬바람이 먼저 마중한다. 

 모두들 입 모아 봄을 시새움하는 추위니 꽃샘추위라 이름 지어주면서 아량으로 봐주자는 눈치다.

 봄의 앞길을 막는 손님이 또 있다. 겨울엔 목 빼고 기다려도 오지 않던 눈이 삼월이 되면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려고 한다. 아마 입학하는 새내기들의 가슴 속에 추억으로 남길 바라는 것인가?

 이 날도 삼월 하고도 세 째 날인데, 눈보라의 위세가 마지막 맹위를 떨치더니, 산과 들을 휘돌아 소복이 눈을 쌓아놓고 갔다.

 남편이 경북의 최 북쪽 봉화로 발령이 나서 간단한 가재도구 챙겨 그 곳으로 가는데 겨울에 왔던 바람보다 더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교감 승진의 기쁨을 가지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 간 그 곳에서, 환영하는 거센 봄바람 때문에 호된 신고식을 치른 것이다.

 내 어릴 적 자랐던 시골보다 더 시골스러운 그 곳에서 사택을 배정 받아 간 곳이 아이들 떠나버려 빈

  둥지 된 폐교다.

 간판 떨어진 교문 앞에 섰다. 00초등학교인데 앞의 두 글자는 떨어져 나가고, 양 쪽으로 시멘트로 만든 두 기둥만 우뚝하다.

 하얗게 눈 쌓인 운동장엔 고요가 흐르고, 현관 입구엔 눈을 뒤집어쓴 이순신장군이 부릅뜬 눈으로 지키고 있다.

 국기 걸리지 않은 국기 게양대가 하늘을 찌르고, 그 옛날 창공에 펄럭이던 태극기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다.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방송에서 흘러나오는"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 합니다." 격양된 성우의 목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어, 나도 모르게 충성을 다짐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었다.

 교무실로 보이는 교실 앞에 다가갔다. 학교 종을 울리던 소사 아저씨가 떠오른다. 종소리 따라 우르르 몰려나오고 들어가던 어린이들이 보인다.

 방송실에서 울려 나오던 재건 체조 음악에 맞춘 구령 소리도 들린다.

 그 옛날의 초등학생이 되어, 내가 배정받은 2층의 5호실 205호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니 복도 바깥 유리창문은 옛날 그대로인데, 교실 쪽 유리는 실내가 보이지 않게 막혀있어 조금씩 살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출입문도 아파트 현관문 같은 철문으로 닫혀 있었는데 205호라고 쓰인 곳 앞에 섰다.

 아이들이 꽉 들어앉아 공부하고 떠들던 모습을 상상하며 조심스럽게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곳엔 아이들 대신 싱크대와 안방이, 화장실이, 그리고 보일러 실 등의 생활공간이 나를 맞는다.

 얼른 앞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운동장가엔 은행나무들이 눈을 이고 죽 늘어서 있었다. 

 눈이 오면 개구쟁이들이 눈싸움하며 왁자지껄 떠들던 그 교정은 틀림없으나, 아이 하나 보이지 않고 적막만이 지키고 있다. 덩달아 뛰고 쫄랑거리던 개들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느티나무 꼭대기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푸드덕 날면서 적막을 깬다.

 햇빛에 눈이 녹으니, 양지바른 곳에 있던 화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단에는 이 학교를 빛낸 모씨(某氏)의 비석이 허망한 웃음을 머금고, 그 옆에는 000의 기념식수라는 팻말도 보인다.

 오늘이 신입생 입학식일 텐데......

 코흘리개 1학년들이 손수건 왼쪽가슴에 달고, 줄지어 선 모습과 대견하고 사랑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며 죽 늘어 선 학부모들도 보인다.

 6학년들의 모습은 오늘따라 어른이 다된 듯 의젓해 보였고, 2학년이 된 보송이 얼굴들은 이제 자신들이  언니 되었다고 어깨를 들썩인다.

 운동장이 떠나갈듯 질러대던 그 함성 사라지고 적막한 운동장엔 춘설이 쌓였다.

 운동장 구석에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제기 차기하던 남자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지금은 중년이 됐겠지.

 나무그늘에서 고무 뛰고, 공치고, 소꿉 살았던 계집아이들이 그립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축구하느라 죽을힘을 다해 내달리던 개구쟁이들이 떠나 버리니, 모교가  무너지고 있다. 잇달아 농촌이 무너지고 있다.

 고향 떠난 그들은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가?  다시 돌아올 계획이나 세웠는가?

 폐교된 교정엔 주인은 떠나고 나그네만 남았다.

 교육청에선 폐교를 개조해서 교원사택으로 만든 것이다. 아이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던 초등학교 교정엔 음식 냄새, 자가용 시동소리 하늘을 가른다.

 내가 누워있는 205호 사택은 아마 고학년 교실이었을 거야. 2층은 주로 고학년 교실이었으니까. 싱크대가 놓여있던 자리에는 칠판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녹색 칠판에 분필로 글씨를 써놓은 것을 당번이 칠판지우개로 지우면 하얀 먼지가 눈발처럼 날랐다. 창밖을 향해 칠판지우개 두개를 맞대어 탁탁 두드려서 분필 가루를 털 때면 하얀 분필가루는 교실로 되돌아오고, 지우게 터는 아이가 온몸으로 막아내니, 얼굴이며 머리에 온통 흰 가루를 뒤집어썼다.

 방 뒷벽은 작품난이 있었던 자리 같다. 여기에 내 그림이 붙었던 날은 온 세상을 얻은 듯 어깨가 올라갔었지. 작품난 아래 진열대에 진열된 찰흙 작품은 개구쟁이들이 만지고 또 만져서 다리 떨어진 고양이와 머리 떨어진 강아지가 되어 늘어 서 있었다.

 이제 농촌이 비어가고 폐교가 늘어나자, 폐교는 공장으로, 도예 공방으로 화가들의 작업장으로 또 내가 살았던 그런 사택으로 용도 변경된 곳이 많아졌다.

 아이들이 줄어들고, 젊은이가 농촌을 떠나니, 폐교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농촌 학교가 모두 사라질 위기에 있다.

 봄만 되면 그 폐교에서 살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언제 쯤 그때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콧등이 시큰해 진다.

 내가 다녔던 시골 학교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간문제다.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찾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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