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민들레

류귀숙 2014. 7. 31. 19:10

   민들레

 담벼락 밑으로 스멀거리며 내려오던 햇살이 이젠 땅위에 드러누웠다. 햇살 따라  내려온 봄기운도 온천지에 멍석처럼 깔려있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 한 자락이 '훅' 하고 들어오더니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 바람은 내 속에 잠자던 뛰고 싶은 욕망을 살짝 건드리고 달아난다.

 겨울 액자 속에 갇혀있던 나의 날개가 퍼덕인다. 바퀴달린 신발이라도 신은 듯 내 발이 미끄러지듯 밖으로 내닫는다.

 엷은 초록이 물감 번지듯 땅 위를 덮고 있는 봄날 오후다. 포근한 태양을 올려다보고, 또 조잘대는 연두 빛 봄풀들과 눈 맞춤을 해본다. 풀들이 제 세상 만난 듯 우쭐대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보도블록 틈새에서 나를 부르는 강한손짓에 눈길이 멈췄다. 샛노란 저고리 받쳐 입은 민들레 한 송이다. 새색시의 수줍음 같은 미소를 한입 가득 물고 있다. 길 가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피워 올린 한 송이 장한 꽃이 아닌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안쓰럽다. 고향은 어디였을까? 형제들은 다 어디가고 혼자만 이곳을 찾았을까? 하필이면 뿌리내린 곳이 이 좁은 틈새였을까? 잎에는 밟힌 자국들로 군데군데 찢겨져 있다.

 어릴 적부터 친숙하게 보아왔던 민들레를 그동안 관심밖에 두었던 것이 미안하다. 민들레는 척박한 땅이든 비옥한 땅이든 가리지 않는다. 또 기를 쓰고 발돋움하여 다른 풀의 생장에 그늘을 주지 않는다. 다만 어느 곳에서나 귀여운 모습으로 피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할 뿐이다.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의 홀대를 받으며 빛나는 꽃을 피워 올린  민들레에게 박수를 보낸다.

 따지고 보면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민들레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달아준 날개로 비상해서 지금의 이곳까지 날아온 게 아닌가? 정든 고향과 부모를 떠나 이곳에 뿌리내리고 산지도 30년이 넘는다. 마침 자양분 있는 땅을 만나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온 것에 감사드린다.

 민들레를 보고 있자니 혹시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남에게 그늘을 드리운 적이 있었는가? 남보다 더 빨리 자라려다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지나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나처럼 고향 땅이 바라다 보이는 가까운 곳에 뿌리 내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찬 날개 짓으로 태평양을 건너고, 인도양을 건너 타국으로 날아간 씨앗들도 있다.

 나는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면서 뉴질랜드 여행길에서 만났던 가이드를 생각해 본다. 그 가이드의 가녀린 어깨와 우수에 가득 찬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그는 20대 초반의 푸른 나이에 푸른 꿈을 안고 그곳 뉴질랜드까지 날아갔단다. 그의 꿈은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의치 않은 환경이 발목을 잡아 그 꿈을 접고 호구책으로 가이드를 시작했다고 하는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땅거미처럼 내려 앉아있었다. 이제 불혹의 강을 건너고 보니 푸른 꿈은 빛바랜 사진첩이 되어 후회와 아쉬움만 남았다고 한다. 돌이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라고 말해 듣는 우리들은 마음이 무거웠다. 동생 같고 자식 같은 아들의 시린 어깨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날은 남 섬 관광코스 중 하이라이트인 코스였다. 알프스를 방불케 하는 '밀포드 사운드'협곡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이른 새벽 우리 대원들을 태운 차는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서서히 신비의 협곡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영혼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가이드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가슴 밑바닥을 훑어 내렸다. 타향살이의 애환을 가득담은 노래 소리는 그 신비의 협곡에서 안개와 함께 떠돌았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던 '연가'라는 마오리족 민요인데 우리들에게 익숙한 빠른 템포가 아니라 마오리 족이 부르는 그대로의 느린 템포로 또 마오리 언어로 노래했다.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며 감동해마지 않았다.

 그 노래 속에는 지금까지 비옥한 땅을 찾지 못해 방황했던 고뇌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흠뻑 젖어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들의 앙코르 요청에 한 곡을 더 부르게 됐는데, 마침 찬란히 떠오른 태양을 보며 '오솔레미오'를 열창했다. 그 노래를 들으니 앞날의 희망이 보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머나먼 타국으로 날아가 무수히 짓밟히고 찢겨 피지 못한 싹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그래도 민들레의 끈질긴 집념으로 머지않아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워 올릴 것이라 믿는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끊임없이 바다를 건너고 있다. 또 먼 하늘아래 있던 젊은이들도 이제 우리 땅으로 날아와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들도 모두 민들레 씨앗처럼 힘찬 날개 짓으로 날아와  빛나는 꽃 한 송이 피우는 것이 최종 목표다.

 우리 막내도 틈만 나면 먼 곳으로 날아가려 한다. 서른을 넘긴 나이인데도 못미더워서 고삐를 움켜쥐고 앞길을 막고 있다. 자칫 척박한 땅에 떨어진 민들레 씨앗처럼 밟히고 찢길까봐 지레 겁을 먹고 있다.

  어려움을 딛고 꽃 한 송이 피워 올린 후 다시 한 번 가벼운 씨로 화하여 거듭 피어나는 민들레를 본다. 씨앗 맺는 모습도 다른 식물과는 독특한 모습이다. 민들레는 노란 꽃 못지않은 씨 꽃으로 거듭난다. 민들레는 그렇게 어려움 속에서 맺은 씨앗일지라도 붙들어 두지 않는다. 가벼운 날개를 달아주어 마음껏 떠나게 도와준다. 이런 민들레의 차원 높은 자식 사랑을 본받지 못하고 걱정 근심을 보물인양 붙들고 있는 좁은 가슴을 탓해 본다.

 옹졸한 어미로 인해 날지 못하는 막내는 얼마나 날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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