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딸
산과 들이 가을 물에 젖어든다. 결 고운 빛살을 받아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어 가고 있다.
단풍놀이 가자는 손짓도 여기저기서 마음 밭을 휘젓는다. '또 한해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하니 허허로움이 앞을 가린다. 철새처럼 떠나가는 세월을 갈고랑쇠로 당겨 붙들고 싶지만 세월은 어느새 갈고리 사이로 빠져나간다. 빈손을 휘저어 허공을 잡으려 애쓰다 놓쳐버린 허전함에 맥을 놓고 있을 때였다. 때 맞춰 전화벨 소리가 햇살 가득한 거실 안을 뛰어다닌다. 바쁜 시간이라 동동 걸음으로 달려가 ' 또 스팸 전화겠지.' 하며 신경질 묻은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화면 가득 반가운 얼굴이 손아귀에 잡힌다. 중국 딸 핑핑의 얼굴이다. 너무 반가워 헛손질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진 전화기도 반가워 부르르 떨고 있다. 얼른 주워 말을 하려는데 입술도 파르르 떨린다.
"언마. 나 돌아왔어요." 정겨운 목소리에 생기가 묻어있다.
"그래, 비자가 나왔니?" "정말 한국에 돌아 온 거니?"
쉴새없이 내 말만 퍼붓고는 대답도 듣지 않았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발목을 잡던 비자가 이제야 나왔단다. 지금까지는 학생 비자 3년에 구직 비자 1년까지 포함해서 4년은 걱정 없이 보냈는데, 그 후는 취업을 해야만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에 머무를 수 있다. 석사 학위를 받고도 취업 비자의 문턱은 높았다. 일자리 구하려 그렇게도 애를 태우더니. 이제 그 직장을 얻었단다. 구미에 있는 전자 회사에서 해외(중국) 마케팅을 맡게 됐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희망이 넘쳤다.
당장 버선발로 달려가 얼싸안고 싶었는데, 주말에도 인천으로 출장가야 하고 일정이 빡빡하단다. 그건 좋은 일이다. 일이 있다는 것은 그 애와 내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야 가을이 품에 안긴다.
땡볕을 짊어진 벼들의 고개 숙임도, 가로수에 내려앉은 노랑 병아리 같은 은행잎도, 불타는 단풍나무 잎도 나를 부른다. 기뻐 뛰며 달려가리라. 탐스럽게 영근 과일들도 옹골차게 앉아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지난여름의 땡볕과 비바람의 수고를 뒤돌아본다.
핑핑을 만난 지도 올해로 4년이 돼 간다. 그 애가 나의 딸이 되어 기쁨과 희망을 준 게 얼마든가!
찬란한 태양 빛이 되어 내 노년의 인생에 젊음을 불어 넣었지. 그러나 간간이 불어 닥친 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석사학위 논문의 고비를 넘을 때는 진땀깨나 흘렸다. 짧은 한글 실력으로 A4용지 70매 분량의 석사 논문은 태산준령이었다.
학사 과정에서 A4용지 10매 이내의 리포트를 써 본 게 고작인 나와, 한국어 실력이 바닥인 딸애는 비익조처럼 함께 날아야 했다. 그 애가 중국말 반 한국말 반 섞어 설명하면 내가 한글로 조금씩 써 내려 갔다. 같은 집에 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E메일로 해결했다.
천신만고 끝에 논문이 통과됐다는 연락을 받고 졸업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소식은 논문 표절로 졸업이 취소 됐단다. 아마 그 중 몇 페이지는 선배 논문을 베껴 썼던 모양이다. 그 때 그 실망감과 낭패감이라니! 한 학기 더 노력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 애는 "언마 걱정 마세요, 난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며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한 학기 동안 수정 보완을 거쳐 드디어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한 고비 넘고 나니 또 다시 앞을 막는 장벽은 취업 이었다. 취업 비자를 받아야만 한국에 머무를 수 있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들고 취업의 문을 두드렸으나, 철옹성 같은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한 중 교류를 통한 '한 중 무역'이 자신의 꿈인 이애는 작은 여행사에 취직이 됐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5인 이상의 작업장이 아니면 비자를 낼 수 없단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비자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지리한 장마가 그치고 태양이 비춰 주기를 기다리며 주춤거릴 때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구직비자 1년이란 시간이 소진되기 직전이라 불안불안 했다.
춘향이 이 도령 기다리듯 길게 목 빼고 비자를 기다렸는데 갑자기 소식이 뚝 끊어졌다. 문자로 음성으로 E메일로 무수히 소리쳤지만 메아리만 허공을 나른다.
그 애가 떠난 빈자리엔 후회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 들어찼다.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 막힌 변기처럼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비자 만기로 고향인 난주로 돌아갔다는데 왜 소식이 없을까? 가슴이 숯덩이가 된다. 이대로 영영 이별이 아닐까? 불안이 스멀거린다. 이렇게 연락 안할 애가 아닌데….
믿었던 마음이 허물어져 내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세상의 많은 약속들이 어떻게 버림받고 스러져가는가를….
오늘 아침의 전화 한 통화는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이제는 이 가을을 결실의 계절로 맞아 한국에 있는 동안 그 애와 내가 아름다운 추억을 빈 함지박에 가득 채울 것이다.
미련 없이 후회 없이 소중한 인연을 차곡차곡 쌓아 갈 것이다. 훗날 그 애가 내 곁을 떠난 후에도 지난 날 기뻤던 일들과 행복했던 시간들을 곶감 빼 먹듯 하나하나 꺼내 먹을 것이다.
서산대사께서는 '눈 덮인 들길을 걸어 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걷는 행적이 뒤에 오는 사람의 어정표가 된다.'고 했다.
나의 바른 행동이 그에게 이정표가 돼서 두고두고 나를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 애를 만난 기쁨으로 아름다운 추억들을 함지박 가득 채우고, 나중에 후회를 남길 일은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핑핑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사랑스런 그 애의 얼굴을 떠 올리며 이 만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말 나의 생각들이 더 넓은 중국 땅으로 퍼져 갈 것을 생각하니 두려움도 생긴다. 또 나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이미지도 좋은 모습으로 비쳤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