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엄지손가락에 얌전히 붙어 앉은 손톱 뿌리가 까맣게 변했다. 손톱을 보호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손톱 아랫부분의 피부도 온통 새까맣다. 언제 , 어디서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겠다. 신체의 중요한 부위가 손상을 입었는데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바쁜 생활이었던가? 자문해 본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조금씩 균형을 잃을 때가 더러 있다. 걸핏하면 넘어지고, 손이 둔해 물이나 국을 엎지르기도 하고, 운동하다가도 부딪치기 일쑤다. 그러니 넘어지면서 둔탁한 물건에 의해 짓이겨진 것 같다. 단단히 한 방 먹었으니 이 상처가 쉬 없어질 것 같지 않다.
오른 손 손바닥을 펴 보니 손바닥 위쪽에도 쌀알 만 한 굳은살이 박혀있다. 이 흉터는 내 손안에 들어온 지가 꽤 오래됐다. 자세히 보니 불룩하게 조금씩 자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언젠가 작은 가시가 박힌 걸 뽑지 않고 두었더니 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또렷하게 노려보고 있다. 수시로 이 굳은살을 물어뜯고 핀셋으로 들쑤셔도 보지만 까칠한 느낌으로 독을 품고 있다. 아마 이 흉터는 평생을 갈지도 모르겠다. 얼핏 보면 잘 드러나지 않으나 가시 자국은 이미 내 살점을 파고 들어가 흉터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이게 온전히 나을 줄 알았는데 그 속에서 이상 세포가 되어 까칠하게 돋아나 있다.
손톱이 까맣게 물든 부분은 반달 모양의 까만 점이 선명하게 보여 상처가 큰 것 같지만 별로 겁내지 않아도 된다. 반달 모양의 까만 점은 몇 달이 지나면 손톱이 길어질 것이고 자르고 또 자른다면 결국 없어지지 않겠나.
어릴 적 여름에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이곤 했다. 이 꽃물이 여름이 가고 겨울이오면 아주 작은 손톱 달 모양으로 빨간 자국이 손톱 끝에 남아 있었다. 이 붉은 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니 내 손톱의 까만 멍 자국도 이번 겨울을 맞으면 없어지게 되겠지.
흉터는 손뿐만 아니라 무릎, 발바닥 그리고 발가락 곳곳에 굳은살로 남아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 모든 흉터는 나의 부주의가, 아니면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리라.
흉터가 어디 보이는 곳에만 있겠는가. 가슴에 옹이 박힌 흉터는 그 얼마겠는가! 삶의 바다에서 찢겨진 마음들이 상처가 됐고 결국은 흉터로 남아있다. 날카로운 비수로 찔러대는 말들이 가슴으로 날아와 박힌 것이다. 어떨 때는 바닥에 가라앉았던 상처가 갑자기 얼굴을 드러내며 괴롭힐 때도 있었다. 그때 그 힘들었던 사간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크린을 타고 스쳐간다.
손때 묻은 흔적들, 얼룩과 먼지 묻은 긴 사연들이 달궈진 냄비에서 콩 튀듯 튀어나온다.
두 손바닥이 닳아빠지도록 드리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슴 치는 울분과 피멍든 절규를 속으로 삼켰던 우리네 어머니들을 생각하며 상처들을 성찰의 시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오만 애간장 다 태운 후 곶감처럼 깊게 파인 주름이 됐다. 이 주름들을 한데 모아 저무는 해를 담아 본다.
가시에 찔렸던 굳은살을 왼손 엄지와 검지로 집어 뜯어보고 또 이빨로 물어뜯어 본다. 그리고 나보다 더 큰 상처로 평생을 살아왔던 그분들의 흉터를 살짝 엿본다.
가난이 두려워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무방비 상태였던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 길이 어디든 황국시민이 되어 배부르게 살 수 있다기에 고향을 떠났다. 그때 그 발걸음이 고향과 가족에게 영원히 등을 보이게 될 줄은 몰랐었다. 이팔청춘 피지 못한 꽃봉오리들은 무수한 군화 발에 짓밟혔다. 국권을 침탈한 그들은 어린 소녀들까지 성 노예로 삼았다. 꽃다운 어린 소녀들의 가슴 속에서 상처는 이미 내가 되고 강물 되어 흘렀다. 그 강물 속에 보태진 눈물이 또 얼마겠는가! 얼마나 애타게 엄마를 불렀을까! 또 힘없는 조국을 원망하며 울었을까!
때때옷 차려 입고 세배 갔던 그 길을 밟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리라. 설움과 한이 언덕을 이루고 산을 이루었지만 모진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억울해서라도 살아서 그 만행의 증인이 되어야했다. 젊은 날의 설움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품에 안겨 목 놓아 울고 싶었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쩔룩이며 찾아온 고향이다. 그러나 달라진 몸과 같이 고향 인심 또한 변해 있었다. 피붙이들까지도 빗나간 시선으로 외면하기까지 했으니 그 슬픔이 얼마겠는가? 측은을 넘어 터부시하는 이웃의 눈길들 또한 돌팔매질로 다가왔다. 고향에서 받은 더 큰 상처는 흉터의 강물에 바윗돌로 자리 잡았다.
이 분들의 찢겨진 마음에 새싹이 돋아날 때는 언제인가?
정신대(挺身隊), 위안부(慰安婦) 이름 한 번 그럴싸하다. 정신대란 몸을 곧게 세우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나가는 대원들이라는 뜻이고, 위안부는 위로하고 평안을 주는 여인 이라는 뜻이다. 그건 비단 같은 아름다운 포장지로 포장한 구린내 나고 추악한 오물 덩어리다. 그 오물을 우리의 어린 소녀들에게 퍼부어 댔다. 그로 인해 십대의 꽃다운 소녀들이 조락(凋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용케도 살아남은 소녀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차마 고향에 돌아갈 수 없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고 한다. 겨우 용기를 내서 고향으로 돌아온 자들도 가슴 깊이 박힌 상처를 쉬 치료할 수가 없었다. 상처를 제공한 자가 사죄를 하고, 또 주위 사람들이 따뜻이 상처를 싸매 준다면 그 상처는 작은 흉터로 남을 것이다.
광복 70년이 됐지만 아직도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분들에게는 우리들의 무능함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될 것이다. 생존자들에게는 하루 속히 상처가 치유되게 도와야 한다.
군화 발에 짓밟힌 자리에 사랑의 꽃씨를 뿌리자. 색동 옷 곱게 입고 세배 갔던 아름다운 일만 생각나게 손잡아 드리자.
손톱 밑 까만 자국을 보며 숯덩이처럼 검게 탄 할머니들의 상처를 맞대어 본다. 검은 흉터가 흰 색으로 변할 때까지 쉼 없이 관심을 가진다면 그 흉터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옅어지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