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실로 오랫만에 그를 만났다. 산골 어느 마을의 폐가에서다. 마당 한가운데서 장승처럼 우뚝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엔 지나온 세월만큼 사연 깊은 몸때를 덕지덕지 달고 있었다.
주인 떠난 빈 집에서 그를 만나니 죽마고우를 만난 것 같이 반가웠다. 마침 고목이 다 된 감나무가 그 옛날의 역사를 증언이나 하듯이 풋감들을 달고 서있었다. 그 푸른 풋감들 사이에서 벌레먹은 빨간 홍시 몇 알이 외로웠던 내색을 한다.
초가삼간이었던 위채가 있고 아래채에는 사랑방이었을 방 하나에 외양간이 아직도 그 형체가 남아있다. 방안 가득 아이들의 웃음소리 들리고 외양간에서는 황소 울음소리 들린다. 또 사랑방에서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들리고 부엌에선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도 들린다.
사라진 소리들이 펌프 소리를 중심으로 우르르 모여들어 빈집 가득 소리로 차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 펌프의 정수리에 물 한 바가지를 퍼 부어 사라진 소리들을 불러 모우고 싶다. 우물가에 바싹 마른 몸으로 버티고 선 봉숭아, 백일홍, 분꽃에게도 시원한 생수를 뿌려주고 싶다.
어린 시절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먹다가 그것을 처음 봤을 땐 정말 신기했다. 이상한 괴물 같이 생긴 것의 입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제법 살림살이가 넉넉했던 친척 아저씨 집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봤다. 아저씨는 그것을 '펌프'라고 불렀다. 나는 속으로 '펌프라는 우물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그 펌프의 손잡이를 잡고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을 길러 올렸다.
호기심에 아저씨네 식구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봤다. 키가 작아 펌프 손잡이를 간신히 잡고 '눌렀다 당겼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을 알아보는지 '피식피식' 바람 소리만 냈다. 온 힘을 다해 눌러봤지만 풍선에서 바람 빠져 나가는 실없는 소리처럼 힘이 빠져 나갔다. 괴물 같이 시커먼 펌프는 헐렁한 몸짓으로 헛바퀴 돌아가는 소리만 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 펌프에게는 물씨가 있어야한다는 것을….
불을 땔 때도 불씨가 있어야 불이 지펴지지 않는가? 옛날에 성냥이 없을 땐 부싯돌로 마찰시켜 불을 피웠다. 그러나 그 방법은 너무 어려워 사람들은 한번 붙인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나갔다. 화로에다 불을 때고 남은 시뻘건 불씨를 담고 그 불씨가 꺼질새라 밤새도록 다독이며 지켰다고 한다. 당시는 불씨를 간직하지 못한 주부는 이웃에게 불씨를 빌려 와야 하는 수치를 당해야 했단다. 그때는 불씨를 꺼뜨리는 게 수치였나 보다. 성냥이 나오고 부터는 불씨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된 셈이다.
이 펌프에는 물씨가 필요하단다. 불씨라는 말을 들어 봤어도 물씨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니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바가지의 물씨를 펌프의 정수리에 부어야 한단다.
그 물씨가 땅속 깊은 곳에 고여 있는 물을 흔들고 깨워서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말하자면 그 물씨가 땅속 깊은 곳에 고여 있는 물을 마중 가는 '마중물'이란다. 마중물이라는 이름이 정답다. 피시식 헛바람 소리를 내던 펌프가 마중물을 받아들이더니 다시 깨어났다. 삐꺽대는 쇠 소리를 덮기라도 하듯 콸콸 물을 쏟아낸다. 쏟아지는 물길이 시원스럽다.
나는 그때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면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 긷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때 우리 집 부엌 한 구석에는 큰 물독이 있었다. 그 물독에다 물을 가득 채워두는 게 그날의 일과 중 중요한 부분이었다.
우리 마을엔 마을 앞에 공동 우물이 있었다. 마침 깊이 파서 두레박질을 하지 않아도 되게 얕은 곳에서 퐁퐁 물길이 솟아오르는 옹달샘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은 바가지로 퍼서 사용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 이 동네의 복중 가장 큰 복이었다.
어머니는 이 물을 길러다 큰 독을 채우고 그날 저녁과 아침에 사용했다. 우리 집은 우물과 비교적 거리가 멀어 물동이를 이고 10번 넘게 물을 긷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부엌에서 쓰는 물은 오롯이 어머니 차지가 됐다. 소죽을 끊이든지 세숫물로 쓰이는 물은 아버지 책임이었다. 물통을 들고 개울에서 퍼 날랐는데 다행히 개울이 바로 앞에 있어 허드레 물 긷기는 쉬웠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집안에 우물이 있는 집이 몇 집 있었다. 그들은 물을 긷지 않아도 되니 물 부자인 셈이다. 나는 그 우물 있는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두레박을 아래로 떨어뜨려 깊은 우물물을 길러 올리는 일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 물 긷기는 추운 겨울이 더 큰 문제였다. 물동이를 잡고 있는 손이 얼어 뻘겋게 됐다. 또 눈이 오면 길바닥이 미끄러워 물동이를 이고 가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어떤 집은 눈을 녹여 먹기도 했다.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가능했다.
그 중요한 물이 우물이 아닌 펌프에서 쏟아지다니! 놀랍다. 이제는 깊은 우물에 머리 쳐 박고 두레박질하는 친구가 부럽지 않게 됐다. 다만 펌프가 있는 집이 부러울 뿐이었다. 이상한 형상을 한 쇳덩이에 마중물만 부으면 물이 쏟아진다는 사실은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후 새마을 바람이 불더니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엔 펌프보다 더 좋은 수도가 생겼다. 지하 수맥을 찾아 양수기 비슷한 것으로 물을 끌어 올리게 됐다. 펌프는 건너뛰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지게 됐다. 이젠 부러울 게 없다. 우물도, 펌프도….
대 도시의 수도물 못지않게 지하의 물길이 끊어지지 않으면 물은 얼마든지 나오게 돼 있었다.
빨갛게 슨 녹을 뒤집어쓰고 마당 한 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펌프를 보며 그것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떠 올린다. 그리고 펌프 옆에는 항상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준비 돼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 본다. 오늘 만난 이 펌프도 그때의 영화를 접고 동화 나라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다. 빈 집을 지키는 모습이 안쓰럽다.
이 펌프 앞에 준비되어 펌프를 움직인 마중물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한 바가지의 물인데 그 물이 씨가 되어 수십 배의 결실을 보지 않는가! 또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가 숨겨둔 얘기들을 흥건하게 토해내게 하는 능력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마중물로 살다간 삶들을 더듬어 본다. 가장 가까운 곳에는 마중물이 되어 가정을 일으켰던 어머니의 삶이 있다. 한 사람이 길러온 물로 우리 여섯 식구가 먹고 살았다. 그 외에 나라위해 인류를 위해 마중물이 되었던 선구자나 성인의 삶도 둘러본다. 크게 잡지 않아도 낮은 자리에서 수고와 고통을 짊어지고 마중물이 된 사람도 있다. 그 많은 삶들이 길러 올린 물로 지금까지 안일하게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한 해가 기울어 가고 있다. 이 한해를 돌아보며 내가 누군가에게 마중물이 된 적이 있었는가? 반성해
본다. 아직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마중물이 되고 싶다. 내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생각 샘에서 솟구쳐 오르는 물 한바가지를 퍼내고 싶다. 누군가의 목마른 가슴을 적셔 주는 글귀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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