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갈이
오늘은 얼갈이배추로 배추 국을 끓여볼까?
푸릇푸릇 뻣뻣한 배추를 살짝 삶아 숨을 먼저 죽여 놓는다. 숨이 살짝 죽어 양념을 받아들일 자세가 된 배추에 곰삭은 된장과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 들깨가루를 몇 스푼 푹 퍼서 넣는다. 여기에 다진 마늘, 다진 풋고추와 붉은 고춧가루를 적당히 넣고 주물럭거려 저희끼리 화합할 기회를 준다. 이렇게 해 놓으면 육지를 고향으로 둔 재료들이 어우러지게 된다.
다음으로 바다 친구를 불러들일 때다. 바다를 무대 삼아 물결을 가르며 종횡무진 자유롭던 멸치와 새우를 불러들이고, 다시마를 불러들인다. 그들은 또 다른 물속인 수도 물 속에서 한바탕 자신을 토해낸다. 그들이 가진 최고급의 영양소를 흥건히 우려내면 영양 만점의 육수가 만들어진다.
보글보글 육수가 끓으면 미리 준비된 육지의 재료들이 이들을 만나 두루뭉술 어울려 냄비 안에서 비로소 통일을 이루어 낸다. 여기다 다슬기 알이나 바지락이 끼어든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나는 얼갈이를 좋아한다. 배추든 시금치든 다른 채소보다 한 걸음 늦게 출발했지만 다부지게 따라붙는 점이 마음에 든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꿋꿋하게 자라는 모습이 싱그럽다.
채소의 일생도 인생살이처럼 비를 만나고 강풍도 만난다. 때론 견디기 힘든 추위도 만나게 된다. 이 얼갈이는 다른 채소들이 두 손 들고 백기를 흔드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심는 채소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싱싱한 푸성귀로 남아있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들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겸손함으로 대지를 붙들고 강하게 견뎌온 옹골찬 채소다. 더운 여름 날 가는 몸매로 훌쩍 웃자란 채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얼갈이란 이름을 들으면 자꾸 '얼간이'가 생각난다. 어렸을 적 나에게 붙여졌을 법한 얼간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맴을 돈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이름은 '간'과 '갈'의 차이가 난다.
두 이름 모두 대충 대충이라는 뜻이 들어가니 완벽이라는 단어와는 대조적이다. 얼갈이도 논밭을 대충 갈아엎는다는 뜻이 있고, 얼간이도 좀 모자란다는 뜻이 있으니 그 점은 비슷하다. 또 얼간이는 됨됨이가 변변치 못한 사람이고 얼갈이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심은 채소라 상품 가치로는 높은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 부분도 많이 닮았다. 그러나 얼갈이는 다른 채소보다 늦게 심었지만 그 풋풋한 기상은 어느 채소보다 힘이 넘친다. 서민들의 먹거리로는 윗자리에 올라도 될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아마 내 이름 앞에 얼간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붙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을 것 같다. 얼간이처럼 덜 떨어진 아이였으니 당연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의 체면을 봐서일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2달 앞두고 겨우 젖을 뗐으니 말할 것도 없다. 그때는 입학을 4월에 했고, 2월에는 설이었는데 그때 젖을 뗐다고 한다. 금방 젖을 뗀 아이가 밥을 잘 못 먹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제대로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가 6학년이 다 됐을 때였다. 그 당시 시골에서 밥을 잘 못 먹으면 먹을 것이 없었다. 마냥 젖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분유가 있을 리 없으니 적당한 먹거리를 준비하려고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먹지 못하니 자라지 못해 다른 애들보다 왜소했다. 입학식 날 줄서기를 했는데 우리 반 82명 중에서 내 키가 가장 작아 맨 앞에 섰다.
어머니는 입맛 돋우는 음식으로 찐빵, 고구마, 떡, 엿, 곶감 등의 달콤한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 주셨다. 이로 인해 지금도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됐다. 빵과 떡을 좋아한다고 떡순이, 빵순이 라는 이름까지 얻게 됐다.
답답한 어머니께서 '내가 애는 버리고 태를 키웠구나!' 라고 한탄하시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입학을 두 달 앞두고 젖을 뗀 아이를 입학시켰으니 불안한 마음에 6학년이던 언니를 보디가드로 세워 놓았다. 다른 애들보다 어린 나이에 서둘러 입학시킨 것도 언니가 졸업하기 전에 1년 정도 훈련을 거친 후 다음 해에 재입학 시키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언니가 내 가방을 대신 들고 나를 데려다 교실에 앉혀 놓고서야 부리나케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마침 학교가 지척에 있어서 그나마 귀가할 때는 혼자서 갔다.
똑똑한 친구들은 내 나이에 동생 돌보고, 소 먹이고, 쑥 캐고, 심부름 등을 하며 집안일을 도왔는데 나는 도리어 짐만 됐다. 나와 6살 차이로 동생이 태어났는데도 홀로 서지를 못했다. 걸핏하면 감기에 두드러기에 백일기침에 또 각종 전염병까지 불러들였다. 그 마을에 들어온 병들은 모두 내 친구가 됐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결석을 밥 먹듯 하는 아이가 됐다. 또 어리석기로는 도를 넘었다. 시간이나 날짜를 이해 못해 등교하는 날이 언제인지 몰랐다. 방학계획서에 '등교일 15일, 개학일 9월1일'이라 써 놓으면 그날을 몰라서 언니한테 '몇 밤을 자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언니는 짜증을 내며 '거기 쓰여 있는 대로 가면 되지 뭘 묻느냐.'고 했다. 그때 생각으로는 몇 밤인지 알아서 손가락을 꼽든지 아님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려 놓고 헤아려 볼 생각이었다. 그러니 내이름 석자 앞에는 얼간이가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러던 내가 얼갈이 채소 같이 땅에 뿌리를 제대로 박고 자라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문자 해독을 했고, 남보다 늦게 셈을 익혔는데도 남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것이 큰 이유였다. 스스로 책을 보며 공부했더니 차츰차츰 발전해서 6학년 때는 남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공부가 가장 재미있었다. 학문을 깨우치는 재미가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게 됐다. 어린 나이에 새벽 종소리와 함께 깨어나서 공부했다. 요즈음 아이들은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부추기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일찍 자고 적당히 공부하라고 말렸다.
그 재미를 알고 있었기에 애들 키우느라 미루었던 공부를 50대에 시작하게 됐다. 어렵다는 중국어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 60이 넘어 글을 써서 등단도 했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이젠 얼간이란 이름을 떼고 얼갈이란 이름을 붙여도 되지 않겠나? 너무 이른가?
오늘도 얼갈이라는 이름이 빛나는 내 인생의 국을 끓이기 위해 쉼 없이 자료들을 준비하고 있다. 또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도 놓지 않을 것이다.
언제쯤에 나도 맛깔 나는 얼갈이 인생 국을 끓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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