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떡시루의 증기처럼 확확 달아오르던 열기가 맥을 놓고 있을 때, 성큼 가을이 다가왔나 보다. 따뜻한 햇볕이 정다운 모습으로 다가 오는 것을 보니......
가을이라는 강한 손길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도심을 벗어나고 말았다.
창밖의 시원한 바람과 들판의 황금물결을 눈요기하며 들길로 들어섰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상큼한 웃음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코스모스의 손짓을 대하니 벌써 마음은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하얀색 빨간색의 꽃을 머리에 인 꽃대들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시골학교 운동회 때 고전무용을 한다고 두 손에 끼고 춤을 추었던 한삼의 흔들림을 닮았다. 또 초등학교 소풍 때 큰길가에 죽 줄을 서서 가다가, 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던 그 모습과도 같다.
가을의 대표 꽃을 국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단연 코스모스를 윗자리에 올리고 싶다.
튀거나 되바라지지 않고, 또 뜯어보면 다른 꽃들에 비해 한참 빠지는 미모지만, 무리 지어 바람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어느 꽃의 아름다움보다 더 고상하고 기품이 있다.
비록 화단에도 초대 받지 못하고, 변방으로 떠돌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 하나 보살펴 주지 않지만 추운겨울도 견뎌내고 그 뜨거운 태양도 거슬러 더위에 지친 가슴에 청량제로 다가왔다.
이 꽃을 만나려면 화분들 틈 속을 기웃거려도 안 되고, 꽃집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도심을 벗어나 고향 냄새가 나는 곳에서나 만날 수 있다.
오늘은 그 구수한 숭늉 맛의 꽃을 위한 축제장을 찾아 나섰다.
우리의 정서와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인데도 외면만 당하더니 생활에 지친 도시 사람들이 그 진가를 알아주기 시작했나 보다.
오늘부터 '코스모스 축제'라고 이 꽃을 주인공으로 하는 향연이 벌어진단다.
도심에서부터 죽 늘어 선 차량 행렬도 볼만하다.
나도 뒤질 새라 그 대열에 끼어 꽃의 향기에 푹 빠져 세상 때를 벗겨 볼까 한다.
줄을 잇는 꽃구경의 행렬을 비집고 그를 만났다.
일제히 일어서서 함성을 지르며 우릴 맞이하고 있었다. 꼭 독립 만세의 함성처럼 그들의 외침은 우리의 가슴을 울렸다.
꼭 '왜 이제 서야 왔느냐'고 원망하는 소리로도 들렸다.
그 들은 서운함을 속으로 감추고 그 연약한 몸을 일으켜 우릴 환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 꽃무리 속에서 조선의 여인을 본다.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옥양목 천으로 정갈하게 한복 지어 입은 조선의 여인이다.
그 속에는 가난에, 시집살이에, 남성 우월주의에 짓밟히던 내 어머니, 할머니, 아지매들이 흰 코스모스로 변해 나를 맞이했다.
소박한 소반에 고구마랑 옥수수도 푸짐하게 담아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풋풋한 향기로 이 땅을 지켜온 우리의 언니들도 오늘따라 그 모습이 더욱 화사하게 보인다.
빨간 치마 곱게 차려 입은 빨간 코스모스처럼 옷고름 입에 물고 배시시 웃는 그 모습은 순수함과 순결함을 모두 갖추었다.
신이 꽃을 만들 때 코스모스를 가장 먼저 만들고 맨 나중에 국화꽃을 만들었다고 한다. 첫 작품이라 그런지 어찌 보면 홑꽃이라 엉성하게 보이지만 질서 정연한 8장의 꽃잎은 여인의 절개와 정절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신도 꽃을 처음 만들 때 이미 우리 여인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우리네 여인들이 신의 첫 작품을 너무 많이 닮은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짓밟혀도 두 손 맞잡고 함께 일어서는 코스모스를 마주하고 포장마차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과 부추 전 한 접시 시켜 놓고 그 옛날을 떠 올린다.
꽃구경 온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옛날 고향 사람 같다. 여기 저기 모여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가 어릴 적 고향 아주머니, 아저씨들이다.
평상에 둘러앉아 고구마 쪄놓고 나눠먹던 그 인심이 그립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면 소재지에 있는 꽤 큰 학교였었는데 학교 앞 진입로엔 1Km정도가 코스모스 꽃길이 조성돼 있었다.
그 해 가을 운동회 구경 온 마을 처녀가 총각 선생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처녀는 코스모스 꽃길에서 꽃을 따며 출 퇴근 시간에 맞춰 그 총각을 기다렸다고 한다.
결국은 소원대로 사랑의 결실을 맺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하니, 코스모스 덕을 본 셈이다.
요즈음은 보기 드문 사랑 이야기다. 그 때는 그 처녀의 순수한 사랑이 총각에게 전달되는데 무리가 없었나 보다.
순수함이 오염된 지금 코스모스의 순수함이 이 사회에 번져 갔으면 좋겠다.
현대식 '축제'보다는 혼자서는 힘없고 보잘 것 없어도 뭉치면 힘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 코스모스 꽃잎 따서 책갈피에 넣었다.
말린 꽃잎으로 성탄카드 만들던 그 때의 순수함을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