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을이 오면

류귀숙 2013. 9. 30. 16:25

        <가을이 오면>

 가을 산의 두런거림이 나를 끌어들인다.

 때마침 가을바람이 실고 온 햇살도 정겹게 다가오고 있다.

 진득한 소금기의 여름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자양분을 만들어, 열매 맺고 꽃이피어 있는 산을 오른다.

 함지처럼 태반처럼 포근함으로 다가오는 함지 산 초입에 들어서니, 확 달라진 바람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싱그러운 가을바람은 온갖 향기를 코끝으로 실어 날랐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소리 따라 눈길이 머문 곳엔 들국화 곱게 피어 진한향기 품고 있고, 각종 나무들도 화려한 단풍 옷으로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또르르 굴러오는 도토리 한 알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반질거리는 모습이 앙증맞다.

 뜨거운 햇살 이겨내고 튼실한 열매로 보답한 도토리나무를 올려다본다.

 올려다봐서는 보이지 않던 열매들이 내려다보니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나치기엔 너무 아쉬워 한 알 두 알 줍다보니, 어느새 한 줌이 넘친다.

 한 친구가 "도토리 주워 묵 해먹자."라고 해서 세 명이 보물찾기하듯 그 반질한 귀여운 열매를 줍기 시작했다. 지나칠 땐 보이지 않던 것들도 자세히 살펴보니 꽤 많이  떨어져있다. 나중엔 주머니를 채우고, 가방까지 묵직하게 채워주었다.

 다람쥐의 겨울먹이가 걱정되어 대충 줍고 산 정상에 오르니 산 너머 보이는 농촌 들판에 황금물결 일렁인다. 주렁주렁 감을 매단 감나무도 나지막한 집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보이고 개 짖는 소리도 아련하게 들린다.

모두가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산 밑 아담한 식당에서 햅쌀밥과 생선찌개로 배를 불리고 진한 커피향도 음미하면서 만남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또 가을 산이 벌이는 향연에 초대까지 받았으니, 이 위에 뭘 더 바라랴!

 곳곳에서 들리는 산새들의 중창은 소프라노와 알토가 적당히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어느 중창단의 노래보다 더 맑고 청량한 노랫소리는 물방울 튀기듯 톡 톡 튄다. 상큼함 그 소리는 이미 우릴 깊숙한 산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가을이 되면 생명체는 저마다 한 해의 노고에 대한 결실을 계수하고 있다.

 도토리나 알밤 등을 비롯한 과일들은 그 열매로, 들국화나 이름 모를 꽃들은 최상의 미모로, 우리 인간을 즐겁게 해 주지 않는가? 

 또 열매도 꽃도 남기지 못하는 초목은 씨앗으로, 단풍으로, 자신의 노력의 결실을 재주껏 보여주고 있다.

 한 여름 뙤약볕 속에서 보살피고, 가꾼, 농부들은 풍성한 수확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계절이다.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마주하는 우리들은 농부의 노고와 하나님의 섭리에 고개가 숙여진다.

 "울며 씨를 뿌리려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성경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거름 주고, 김을 매 주며, 정성들여 가꾸었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린 하나님의 섭리와 합쳐져 이렇게 우리들의 식탁을 풍성히 꾸며주고 있지 않은가?

 씨 뿌리고 가꾼 자의 풍성한 결실로 농사짓지 않은 우리까지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농부들의 노고가 새삼 고마와진다. 

 포도 한 알 따서 입안에 넣으니 입 안 가득 달콤함이 감미롭다.

도토리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려오면서 내 인생을 돌아본다.

 나는 무엇을 추수할 것인가? 내 영혼의 추수를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 가을이 오듯 내게도 가을이 이미 턱 앞까지 다가오고 있다. 그 추수의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내 영혼은 어떤 농사를 짓고 있는가?

 나이를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것에만 집착하면서 살아오지나 않았나? 되짚어 본다.

 가지마다 과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과일나무 같이 내 영혼을 살찌우기위해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욕심이 지나쳐 씨앗만 뿌리는 봄으로만 지내서는 안 되고, 잡초를 뽑아주고, 거름 주면서, 일에 파묻힌 여름으로만 지내서도 안 된다.

 적당히 버릴 것은 버려 실한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내 처지와 내 나이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 따스하고 다정함이 익숙하게 몸에 밴 사람 , 이런 삶을 소망하는 이 가을에 잠시나마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보려 한다.

 내가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하고, 힘을 비축해서 이웃의 아픔도 챙길 줄 아는 그런 삶을 살 때, 내 영혼에도 탐스런 열매가 맺히지 않을까?

 유난히도 무덥던 지난여름의 폭염을 이기며 영글었기에 이 가을의 과일은 유난히도 당도가 높고, 단풍 색깔도 곱다.

나도 이제 나이만큼의 분량대로 충실하게 살면서 충실한 열매를 맺고자 한다. 내 영혼을 추수하는 날, 얼마나 무거운 곡식 단을 준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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