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머리카락

류귀숙 2013. 9. 24. 08:57

        <머리카락>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과 마주한다.

 오늘따라 더욱 낯설어 생경스런 노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입을 감싸고 깊게 골 지어진 八자 주름을 거슬러 양 미간 사이를 흐르는 내 川자의 물결 따라 위를 거슬러 올라, 지붕처럼 얹혀있는 머리카락을 만난다.

 손으로 쓸어보고, 손가락으로 세워보며 속절없이 떠나버린 그것들의 자취를 더듬어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감싸 그것들을 훑어본다.

 우두둑 몇 가닥이 손아귀로 빠져 들어 오더니, 몇 가닥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땅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면류관처럼 머리 꼭대기에 얹혀서 젊음을 빛내던 삼단 같은 머리 털이 아니던가!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빨그레한 민머리가 돈짝 만하게 보인다.

 빈 공간을 감추려 손가락으로 세워보고, 빗질도 해 보지만 도둑맞은 젊음을 되돌릴 수 없듯이 뻥 뚫린 정수리엔 휑하니 찬바람이 스친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떨어져 나간 머리칼을 물구나무서기로 주워 어루만져 본다.

 땅 바닥에 드러누운 채 바람 따라 꿈틀거리는 그것은 꼭 살아서 나의 허물을 폭로하는 듯 보인다.

 그것들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마음은 늘 허전하고 아쉬웠다.

 '이러다 대머리 아줌마가 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유난히 검고 틈새 없이 빼곡히 들어선 머리숱의 추억으로 허전함을 덮어 본다.

 머리카락은 사람의 이미지와 미모에 지대한 역할을 함은 물론 그것들은 육신과 영혼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삼손'은 엄청난 힘을 소유했다. 적국에선 그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요부 '들릴라'를 통해 알아냈는데, 그게 머리카락에서 나옴을 알고는 그의 머리를 자르고자 갖은 묘략을 썼다. 결국 머리칼을 잃은 삼손은 거대한 힘을 잃고, 평범한 사내가 되어 잡히는 신세가 됐다.

 사람들은 머리칼의 의미를 중요시 했다. 그래서 신분을 표시하기도 하며, 머리칼에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해서 계급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섬기겠다는 등의 지극한 정성을 표시하는 도구로도 쓰여 왔다.

 뚫린 정수리 메꾸려고 짧게 층을 내어 뽀글뽀글 파마를 했더니, 영락없는 시골 할머니 모습이다.

 스잔나 머리, 긴 생머리, 멍키 머리, 숏 카트, 웨이브 진 긴 머리 등으로 한껏 멋을 풍기던 젊음은 속절없이 가 버렸다.

 떠난 머리카락 주워 모아 가발로 고정 시키면 그 옛날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돌아 올까? 어림없는 소리!  한 번 간 세월이 다시 오지 않듯, 내 몸을 떠난 머리칼이 돌아올 리 있으랴!

 반짝이는 검은 머리 숲에서는 몰랐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이 마냥 봄이라 생각했는데, 그 검은 숲에 서리가 내리고, 황량한 바람이 몰아친다.

 가는 봄 잡아 보려 애를 쓰지만 가을은 지름길로 다가와 서릿발만 남겼다.

 눈을 감으니 입 안 가득 검은 채취가 몰려온다. 그 때는 그렇게 머물러만 있을 젊은 향기라 생각 했었다.

 치달아 가는 곳의 방향도 모른 채 물결 밀리듯 이곳까지 떠밀려 와 보니, 내 부질없던 혈기와, 무지와, 편견으로 가까운 피붙이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안겨줬다.

 풍요로운 머리칼 속에서는 알지 못했던 소홀함이 후회로 돌아온다.

아까운 인연들을 외면하고, 흘려보낸 날들이 안타까움으로 발길을 막는다.

 외로움에 허기진 내 어머니를 보듬지 못하고, 끝내 서운함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던 지난날이 가슴앓이로 다가온다. 

 많고 많은 시간들을 허망하게 써 버리고, 남은 시간 계수하니 절반이 훌쩍 지났다. 아쉬움에 곁눈질 해 보지만 그것들을 따라잡지 못한 무능이, 안일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원망하고 꾸짖어 보지만, 자책골처럼 허공을 돌아 내게로 되돌아온다. 

그 때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모두가 내 자신이 소홀한 탓이다. 눌러 버리고, 덮어 버린 소중한 인연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이미 태풍이 바닷물을 뒤엎듯 그 영화롭던 젊음을 쓸고 간 뒤라, 후회만이 서릿발 귀밑머리로 파고 든다.

 다행히도 아직 반 이상의 머리칼이 나를 지키고 있으니, 이건 신의 배려임에 틀림없다.

 멀어져 간 세월보다는 다가올 세월이 아직도 숱하게 있음을 축복으로 생각하자.

 출렁거리는 파도보다 잔잔한 호수 같은 수면을 바라보자.

 패기와 욕망과 아집으로 충만했던 젊음을 가만히 무릎 아래로 내려놓는다.

 뱀 껍질처럼 묵은 허물을 떨구어 내는 늙은 머리칼의 되새김질은 허투루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채찍이 되어 내 앞길을 밝힌다.

기왕 지난 일을 후회해 보지만, 내일을 바라보며 다독여 본다.

 다시 거울을 본다.

그 속에는 내 어머니가 계시고, 거울 앞에 선 젊은 내가 어머니께 응석을 부려 본다.

 켜켜이 쌓인 내 허물을 비춰 보이며, 어머니께 용서를 빌어 본다.

 너털웃음으로 답하는 어머니의 말씀은 '남은 시간이라도 후회를 남기지 말라.' 이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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