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장에 가면

류귀숙 2013. 11. 28. 08:38

      <시장에 가면>

 시장은 한여름 날의 해수욕장이다.

 뜨거운 열기 따라, 사람의 물결 따라, 나도 모르게 블랙홀 같은 그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

 은빛 비늘이 번쩍인다. 쏴 코끝으로 비릿함이 몰려온다. 눈부신 물결이 일렁인다.

 요동치는 활기에, 시끌벅적한 소란에,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어깨가 들썩인다.

 악다구니로 잡아끄는 그곳을 향해 안으로 안으로만  빠져든다. 애타게 옷깃 부여잡는 손길 외면하고 곧장 한 방향으로 내닫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선 먹는 즐거움부터 맛보리라. 그 다음엔 느긋한 마음으로 한 판 놀아보련다.

 낯익은 주인 아지매 미소로 반긴다. 옹색한 의자에 앉으니 엮인 굴비두름 같다. 이 좌판 저 좌판 빼곡히 늘어앉은 사람들은 숟갈 들고 입속으로 퍼 넣기 바쁘다. 꼭 어릴 적 시골에서 혼인 잔치할 때와 흡사하다. 음식을 나르는 자, 쉴 새 없이 퍼먹는 자,  모두가 몰입 또 몰입이라, 먹고 또 먹고 옆도 안 보이나 보다. 세상의 재미 중 가장 으뜸이 먹는 재미 아닐까?

 수제비를 시켜놓고 사방을 둘러본다. 칼국수, 묵, 죽, 만두, 떡볶이, 떡국, 종류도 다양하다.

 짜장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수제비 값을 셈하니, 넉넉한 인심이 덤을 준다. '덩치가 크니 한 그릇 더 잡수슈.' 빈 그릇 채워주며 더 줄 수도 있단다.

 풍선처럼 부푼 배에, 부푼 가슴에, 이 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둥둥 떠다닌다.

 이곳저곳을 눈요기 하는데, 은근한 눈빛이 나를 붙든다.

 나를 붙드는 강한 빛에 끌려 모자가게에 들렀다 .이 모자 쓰고 거울 앞에서 헤벌쭉, 저 모자 쓰고 씽긋, 값을 깎아본다. 넉넉한 아줌마 인심 쓴다며 물건을 건네준다.

 새로 산 모자를 왕관처럼 눌러쓰고  2층으로 올라간다. 가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옷들이 예쁘기는 하지만 고를 자신은 없다. 장사꾼이 능청을 떤다. 잡아끈다. 흥정할 자신도 없고, 믿을 수도 없어, '옷은 백화점에서 사야지,' 맘먹고 뿌리친다.

 한 바퀴 돌때마다 상인들의 애환이 보인다. 어떻게 끌어당겨 물건을 팔아볼까. 재고만 쌓이는데 월세 걱정, 생활비 걱정에 입이 마른다. 그 눈빛, 그 몸짓, 그 노력이 안쓰럽다.

 아래로 내려와 신발가게에서 벌쭉 서보고, 채소가게에서도 두리번거린다.

 난전바닥에 늘어선 생선가게 앞에 섰다. 생선 파는 아줌마의 눈길이 은근하다. '옛다 한 마리 더 준다.' 하면서 덤으로 얹어준다. 갈치 한 무더기 사오면서 갈치 국 보글보글 끊어 오르는 저녁 식탁을 그려본다.

 찬송가 소리 구슬프게 들리는 곳엔 다리에 검은 고무 끼운 아저씨 한 사람이 바닥을 쓸며 동전그릇을 들고 기어간다. 알량한 동전 한 푼 딸랑 던지니, 동전 소리 따라 마음이 내려앉는다.

 옆을 돌아보니, 구석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나물 파는 할머니가 보인다. 한여름 땡볕을 머리에 이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좌판에 펼쳐놓은 시든 채소 천 원짜리 두 장으로 싹쓸이 하니, 할머니 고맙다고 자리 털고 일어난다.

 나는 사람이 북적대는 재래시장에 오면 신이난다. 마음은 두둥실 구름을 탄다.

 내가 가끔 '큰 장'(서문시장)을 찾는 이유는 없는 것 없이 볼거리가 요지경처럼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칫 따분하기 쉬운 황혼인생에서 이곳에만 오면 활력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정까지 흘러넘치니, 이곳에는 사람 냄새가 난다. 또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말하자면 인간들이 모여 살을 비비는 인간시장이라는 것이다.

 살아 보려고 애쓰는 몸놀림이, 악다구니가, 속임수가, 넉넉한 인심이,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같다.

 백화점에서는 볼 수 없는 생동감이 있고, 싼 값에 많은 물건을 살 수 있어, 넉넉하다. 에누리 하려고 밀고 당기며 흥정하는 재미도 만만찮다. 모두가 살아 숨 쉰다. 꿈틀하는 용틀임이 보인다.

 또 시장의 참 묘미는 시골 장인 닷새 장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생일을 맞은 듯, 누구네 결혼식인 듯, 수런거리며 들뜬다. 경운기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 리어카에 얹혀 오는 사람,  이고 지고 시골 사람들이 닷새를 기다렸다 꾸역꾸역 모여든다.

 펑, 펑 강냉이 튀기는 소리, 야바위꾼들의 속이는 소리, 확성기 틀어놓고 손님 모우는 약장수의 구성진 노랫소리, 광대처럼 알록달록한 옷에 피에로처럼 분장한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

 소리 소리들의 한 쪽엔 올망졸망 깨나 콩 자루 끼고 앉아, 장꾼들의 눈치를 살피는 선량한 시골 아주머니들도 한 몫 한다.

 별의 별 악다구니가 총알처럼 튀어 나온다.

  포장 친 음식점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닷새 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끼리 손잡고 들어온다, 막걸리 사발 앞에 놓고 그동안의 소식 전한다.

 시골 장은 오전에는 가져 온 물건을 팔고, 늦은 장에는 바꾼 돈으로 물건을 바꿔 산다. 현대판 물물 교환이다. 팔 때는 밑지는 것 같고, 살 때는 속는 것 같다.

 시골 닷새 장은 소식의 징검다리가 되고, 돈이 매개되어 물건을 교환하는 장소가 된다.

 어릴 때 엄마 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며 시장을 돌던 때가 생각난다.

 가져 온 곡식을 돈으로 바꿔 쥔 엄마를 졸라, 신발 가게에서 고무신 한 켤레 얻어 신고,  엿장수 가위 소리에 끌려가 엿 한가락 얻어먹었던 옛날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마음이 울적하면 시장엘 가보라.

삶이 팍팍하거나 지루할 땐 시장 한 바퀴 둘러보아라. 

 여기엔 펄펄 뛰는 갓 잡아 올린 생선의 뜀뛰기가, 올망졸망 엮어낸 삶의 이야기가, 무한 리필로 시간 제한 없이 우리를 반길 것이다. 삶의 의욕이 흘러넘치는 그곳,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 보자.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삶의 힘을, 마음껏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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