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맹수의 포효 같은 겨울 폭풍을 이끌고 으르렁거리던 동장군도 봄볕의 따사로움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가?
성경의 인물 삼손도 사자를 손으로 찢어 죽일 정도로 강한 힘의 소유자이지만 '데릴라'의 속삭임 앞에서는 그 힘을 잃고 말았지 않은가?
겨울이 아무리 설쳐대도 화사한 봄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며 아무리 강한 남성도 봄같이 화사한 여자의 속삭임엔 힘을 잃을 수밖에......
오늘따라 조심스럽게 베란다를 기웃거리는 햇볕을 맞으려 얼른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봄볕이 얼었던 가슴에 와 안긴다.
머지않은 날 차가운 대지에 연두 빛 융단이 펼쳐지리라.
괜히 신이 나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가슴도 두둥실 구름이 된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집안을 정리하고, 잔뜩 웅크리고 있던 화분에게도 안부를 물어 본다.
봄과 함께 나를 찾아온 또 하나의 기쁨은 며칠 후면 떠나게 되는 해외여행이다.
떠날 여행에 대한 기대가 가슴 한 복판에서 나를 붕붕 띄워 주고 있다.
내 속에는 언제부턴가 기회만 있으면 울타리를 박차고 더 넓은 들판을 질주 하고픈 역마(驛馬)가 한 마리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그 뛰고 싶은 욕망은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동안 삶의 굴레에 얽혀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던 그 억눌림이 탈출구를 찾게 된 건 지천명을 맞고야 겨우 실현됐다.
결혼 전에는 청바지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팔도강산을 누비고 다닌 전적(戰績)이 있지만 그 방랑벽이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보니, 앞도 뒤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로, 조롱에 갇힌 새로, 2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런 나에게 나를 닮아 호시탐탐 뛰쳐나갈 궁리를 하고 있던 막내딸이 해외여행 제안을 해왔다. 당시로는 엄두도 못 내던 시기라 그냥 건성으로 넘기고 말았는데, 이 딸애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엄마 아빠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서 여권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여행사를 찾아다니며 여행지를 알아보고 계약까지 해놓았다.
웃기는 일은 아빠 사진을 아무리 뒤져도 못 찾으니까 앨범에 있는 사진을 오려서 여권을 만들었단다. 그러니 그 여권 사진이 아주 젊은 20대의 얼굴에다 큰 것을 사이즈에 맞게 오리다 보니 바탕은 하나도 없고 얼굴만 보름달처럼 하나 가득한 사진이라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그 때는 본인 확인도 없고 가족이 주민등본만 제시하면 되니까 사진은 확인조차 하지 않던 때였다.
날짜도 맞추기 어려우니 설 연휴를 여행 일자로 잡아놓았다. 지금은 명절에 여행객이 더 몰린다고 하지만 그때는 명절에 제사도 안 지내고 여행 간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억지 춘향으로 갓 스무 살을 넘긴 어린 딸의 손에 이끌려 엉거주춤 따라 나서게 됐다.
덩치라면 한 덩치 하는 우리 부부가 어린 딸의 뒤를 주춤주춤 따라가는 꼴을 상상해 보라!
대구공항에서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고 부터는 내 마음 속에 잠자던 그 말(馬)의 기상이, 집시의 노래가, 꿈틀하고 용틀임 하더니 분화구를 통해 용암이 분출되듯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튀어 나오는 게 아닌가?
처음으로 낯선 나라 낯선 거리에서 이방인이 되어 본 그 해방감, 설렘 ,낭만은 나와 딸아이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처음엔 가지 않겠다고 망설이던 남편도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폼이 싫지만은 않은 듯하다.
한번 물고가 터지니 내 안에서 잠자던 역마살인지 방랑벽인지 하는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분수가 되어 솟아올랐다.
여행이라면 행선지가 어디든, 테마가 무엇이든, 조건을 묻지 않았다. 일상을 떠나 집 걱정 밥걱정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됐다.
길 떠날 날 잡아 놓으면 설날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손가락 꼽아가며 하루를 10년같이 기다린다. 달력엔 출국일이라 크게 써놓고 그 날짜 주위를 붉은 동그라미로 몇 겹 둘러놓는다. 이렇게 해놓고 나면 가슴은 풍선처럼 둥둥 떠서 여행지를 날아다니고,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여행은 생활의 청량제다. 또 세상사에 지쳐 덕지덕지 묻은 때를 벗겨주는 초강력 세제며 희망과 행복을 주는 오색 무지개다.
어딘가를 향해 떠날 준비로 바빠지게 되면 일체의 잡념이 없어지고 오로지 희망만이 내 앞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이 일도 쉽지만은 않다.
삶이 고삐를 잡고 있는 한 시간과 돈, 건강, 어느 것 하나 가벼운 것이 없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덜컥 저질러버리지 않으면 한발도 나갈 수가 없다.
서양 속담에는 자식 교육에 여행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고, 중국 속담에도 만리를 걸으면 책 만권을 읽는 것과 같다지 않는가?
여행은 문화유산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그 첫째다. 다음엔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다. 때로는 웅장한 자연 앞에서 한 송이의 꽃이 되기도 하고, 보잘것없는 한 포기 풀이 되기도 한다.
자연이 읊는 시와 부르는 노래는 내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와 나의 시 나의 노래가 된다.
5대양 6대주를 샅샅이 뒤져보고 싶은 꿈은 작은 가슴에 갇혀 제대로 날지 못하고 있지만 언제든지 두 날개로 비상하는 그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다.
이번엔 오세아니아 주에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날아가는 코스다.
망망대해를 독수리의 힘찬 날개 짓으로 날아올라 영국인이 정착해서 세운 나라라는 그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받은 큰 축복이다. 시간과 물질과 건강이라는 삼박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창조주 하나님의 걸작인 자연의 품에 안겨 생활에 지친 때, 탐욕의 때를 벗어버리고 희망과 감사를 담아오고 싶다.
기다리는 재미도 떠나는 재미 못지않음을 이미 경험 했지만 이번엔 우리와 반대편 남반부로 간다고 하니 더욱 더 설레고 기대가 된다.
새봄에 떠나는 이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갓 충전한 전자제품처럼 새로운 에너지를 온몸에 담아 올 것이다. 겹겹이 껴입었던 허욕과 위선의 옷은 망망대해에 던져 버리고, 겸손과 온화를 갖춘 새로운 모습으로 일상에 복귀할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그것을 다시 껴입지 않을 것을 다짐도 해본다.
여행은 나의 안목을 넓혀주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통로이며, 내 삶을 풍성하게 가꿔 줄 희망이며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