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윷놀이

류귀숙 2015. 2. 28. 16:19

       윷놀이

 봄이라고 하기엔 겨울 쪽으로 뒷걸음치는 새침한 날씨다. 추위를 잊은 무리들이 팔을 들어 내리치며 함성을 지른다. 겨우내 잠들었던 대지가 깨어난다. 여기저기서 다급히 불러댄다. 모야! 걸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봄이 놀라 깨어난다.

 설날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윷놀이가 절정을 이룬다. 이 놀이는 까마득한 고대로부터 내려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모가 나오고, 뒤이어 윷이라도 나오면 덩실덩실 어깨춤이 따라 나온다. 뒷전에 앉았던 사람들도 이때만은 일제히 일어나 엉덩이를 씰룩인다.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윷가락 따라 움직인다. 덤을 듬뿍 얻을 수 있는 모와 윷을 간절히 부르며 윷가락을 응시한다. 두 편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나면 같은 편은 동지가 되고, 상대편은 적이 된다. 전투에 임하는 병사 같이 필승을 외치며 온힘과 정성을 한곳으로 모은다. 이때 각 편의 대표가 나와 점수판을 장악한다. 이들의 손에 승패 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친근한 짐승인 돼지, 개, 양, 소, 말의 다섯 짐승도 이 놀이에 참가하게 된다. 가장 만만한 돼지가 1점을 맡고, 개가 2점, 양이 3점, 소가 4점, 말이 5점을 맡았다. 모두들 높은 점수를 얻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말과 소를 부르며 손목에 힘을 준다.

 윷말을 맡은 두 사람은 결연한 의지로 작전을 세운다. 욕심을 죽이고 천천히 갈 것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 판 승부에 목숨을 걸 것인가가 관건이다. 돼지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실을 다지자는 편은 말판 위에서 서행을 한다. 여기에 한판 승부를 꿈꾸는 쪽에서는 투기도 불사한다.

 요행을 바라고 여러 개의 윷말을 간 고등어 포개듯 엎어놓고는 높은 점수 나오기만 기다린다. 목울대에 힘이 가고, 눈빛은 독수리의 그것 같이 상대를 기로 장악한다.

 이때 모가 나오고 잇달아 좋은 점수를 얻게 되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한 판 춤사위를 벌인다. 시끌벅적, 떠들썩 모처럼 생기가 돌고 기쁨으로 온 몸이 하늘을 나른다. 그러나 이 윷말 판에도 인생 길 같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게 바로 함정이다. 무소불위의 능력을 발휘하던 편에서 이 함정에 빠지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순간에 허사가 된다. 그 함정의 이름도 재미있다. '퐁당' '지옥' 등의 이름으로 한 방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구제 불능의 지옥행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상대의 패배를 보고는 고소해 죽겠다고 박장대소를 한다. 그러나 그 편 역시 안심할 수가 없다. 언제든지 상대편이 '임신' '전도'등의 보너스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모나 윷만 죽어라 외쳐대던 쪽에서는 도와 개, 심지어 백도도 승리에 한 몫 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는 교훈을 찾아낸다. 윷놀이의 묘미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런 윷놀이를 통해 예전에는 풍년 농사를 점쳤고, 한 해 운세도 점쳤다고 한다. 하늘을 우러르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오늘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놀이가 윷놀이인 셈이다.

 내가 열 살도 못되었던 어릴 적이라 기억된다. 그때 그날 시리도록 맑게 갠 하늘을 향해 검정 고무신을 던져 올렸다. 고무신 안에는 배고픔이 들어있었고, 울분도 함께 들어있었다. 하늘을 향해 종 주먹을 날리는 심정으로 힘껏 던져보았지만 고무신은 곧바로 내 곁으로 돌아와 가난에 동참했다.

 나이가 들면서 고무신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소망을 연에 담았다. 꼬리를 흔들며 비상하는 연의 등에 소원을 실어 보냈다, 연은 미래의 꿈과 희망을 싣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희망이, 꿈이, 하늘에 닿아 언젠가는 연처럼 가볍게 꼬리 짓 하는 인생길이 오길 희망했다. 이렇게 옛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희망이었고 대화의 상대였다. 어려운 현실을 이길 힘을 하늘에서 찾았고, 미래의 꿈을 하늘에다 걸었다.

 이번엔 그 하늘을 끌어내렸다. 둥그렇게 하늘 형상을 그리고 28개의 별자리를 만들었다. 중앙에는 땅 모양의 네모를 만들어 북극성을 앉혀 놓았다. 또 4개의 막대기에 5마리 짐승의 혼을 담았다. 돼지, 개, 양, 소, 말과 같은 친근한 짐승들과 같이 즐기며 놀았던 놀이가 바로 윷놀이다.

 돼지의 걸음이 기준이 돼서 도가 1점이면 말인 모는 5점이 된다. 가운데 짐승들은 몸의 크기에 따라 개, 양, 소를 순서대로 세워 놓았다. 윷가락을 던질 때마다 점수를 얻어 28개의 별자리를 찾아간다.

 이 말판 속에도 우주가 있고 하늘이 있다. 4개의 막대기는 순간순간 윷이 되고 말이 되어 하늘을 나른다.

 팔을 들어 힘차게 내리치는 힘은 어린아이나 노인이 따로 없다. 이때만은 팔뚝에서 힘이 솟구친다. 던지는 팔과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미래를 향해 힘껏 내닫는다. 이런 오묘한 진리를 윷가락에 담아 소원을 실어 보냈던 조상의 지혜가 훌륭하다.

 지금 지고 있는 편에서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기고 있는 편에서도 자만은 금물이다. 언제라도 뒤집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인생 길 도처에 도사리고 있던 복병이 이곳을 피해갈 리 없다.

 누가 아는가! 가다보면 예기치 않은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래서 끝까지 희망 줄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래서 윷놀이는 중도 포기가 없다. 친선을 다지기에도 이만한 놀이가 없다. 어디 그 뿐인가 한 판 춤판을 벌여 스트레스를 날려 보낼 기회도 주지 않는가.

 모처럼 짜릿한 한 판 승부를 향해 힘차게 윷가락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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