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고등어
갑자기 들이닥친 따가운 햇살이 기온을 끌어올리더니 여름처럼 후덥지근하다. 아직 여름이라는 이름을 불러주기엔 한참 이르다. 이제 겨우 5월 초입에 들어섰기에 봄이라고 불러야 맞다.
며칠 전만 해도 계절이 거꾸로 가는 게 아닐까 했다. 겨울과 봄이 뒤죽박죽 얽히더니 오늘은 봄을 건너뛰고 여름이 왔다. 변화무쌍한 날씨가 봄과 여름을 수시로 넘나들고 있으니 옷 입기가 애매하다. 썰렁한 아침 날씨에 맞춰 두꺼운 옷을 입었다간 낮에는 낭패를 보기가 일쑤다.
가정주부 입장에선 어쨌든 여름이 올 것은 분명하니 갑자기 더워질 때를 대비해서 여름옷을 꺼내 손질해야 한다.
칙칙한 날씨 피해 장 농 깊이 잠자고 있던 여름옷을 꺼냈다. 두 사람의 옷인데도 장 농을 휘저어 꺼낸 여름옷이 작은 산을 이룬다. 작년에 즐겨 입었던 옷들인데도 모두가 후줄근하다. 늙어가는 우리 부부처럼 옷들도 시대에 밀려 허접하게 누워 있다. 그 중 바지를 집어 든다. 남편 것 내 것 할 것 없이 가랑이가 넓고 힙 선도 헐렁한 게 옛날 핫바지 같다.
'이제 낡고 유행에 뒤떨어진 허접한 것들은 버리고 살아야겠어요.' 라고 하자 남편이 거든다.
"아직도 입을만한데 버리긴 왜 버려." 버리려고 밀쳐두었던 옷들을 움켜쥐고 다시 끌어들인다. 아마 옷 사 입기 좋아하는 나에게 태클을 걸어보자는 것일 게다. 순간 내 눈에 힘이 가며 서릿발이 돋는다.
'그럼 당신 것만 끌어안고 핫바지 같은 노인 바지 입고 다녀요.' '난 새것으로 바꿀 테니까.' 남편의 눈에서도 핏발이 선다.
남편이 퇴직하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사사건건 부딪쳐 소리가 난다. 우리 부부는 아직도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우렁껍질을 두르고 산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버릴 것을 보자기에 싸서 현관에 내 놓았다.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하듯 남은 옷에 물을 뿌려 곱게 다려본다. 이젠 고집이든 욕심이든 자존심이든 쓸데없는 허접한 것들은 헌 옷과 함께 밖으로 내 몰아야 한다. 이해, 용서, 양보 등 쓸 만한 것들만 다부지게 끌어안고 곱게 다려야한다. 저 버려질 옷들도 구입했을 때는 기쁨을 주었는데…. 그 마음 살며시 묻어둔다. 세월이 가면 변하는 게 어디 물건뿐이랴!
결혼식 날 주례 앞에서 맹세한 그 약속도 이젠 허접쓰레기로 추락하고 있다. 서리꽃 머리에 필 때까지 하나로 살자는 그 맹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가끔은 하나 될 때도 있지만 둘이 되어 두 목소리를 내며 불협화음을 낼 때가 더 많았다. 한 집에 살면서도 다른 집에 사는 것처럼 생소할 때도 있었다.
요즈음 퇴직하고 삼식이 신세가 된 남편 때문에 머리에 누름돌을 이고 다니는 기분이다. 자나 깨나, 가나 서나 반찬 걱정이 머리를 누른다. 나이 들면 부엌에서 해방되리라는 꿈은 물거품이 됐다.
입맛이 까다로운 남편인지라 음식 솜씨 없는 내가 감당하기엔 벅차다. 미역국을 끓여도 배추 국을 끓여도 숟갈 한번 대지 않는다. 된장이나 생선찌개도 심드렁하다. 맛보나 마나 기대 할 게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거기에 거기인 한국음식인데 어쩌란 말인가! 매일같이 나의 음식 솜씨와 남편의 입맛이 쌍벽을 이루며 줄다리기를 한다. 어떤 날은 식탁위에서 오고가는 눈길이 인두처럼 벌겋다. 그래도 잘라내지 못하는 한 조각 연민 때문에 내가 먼저 꼬리를 내린다. '대 수술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 열두 폭 치마로 내가 감싸야지 별수가 없지 않은가.
반찬거리 구하려고 재래시장을 돌고 돌아 산나물이랑, 가지, 돌나물을 사고 그래도 채우지 못한 시장바구니 들고 휘 도는데 한곳에 눈길이 머물렀다. 얼음 좌판위에 죽 줄지어 드러누운 간 고등어들이다. 작은 놈은 큰 놈을 위해 등을 내 주고 큰 놈은 가슴을 열어 작은 놈을 꼭 끌어안고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인연의 끈이 이토록 죽어서도 하나로 포개 놓은 것일까? 아마 고향 바다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해초의 숲을 유영하였으리라. 어부의 그물망에서 펄떡이던 힘 찬 몸짓도 이제는 부질없음을 알았는가? 지금은 그 모든 욕망 내려놓고 열반에 든 스님처럼 조용히 누워 기다리고 있다. 삶의 영화를 놓아버린 간 고등어들은 연리지로 짝지어 감지 못한 눈 둥그렇게 굴리고 있다.
몸속엔 아직도 바다 냄새 출렁이며 비릿한 고향 냄새 풍기고 있다. 깊은 바다를 휘젓던 그 힘 어디 두고 소금물에 목욕재계하고 무엇을 기다리는가! 죽어서도 둘이 하나 되어 꼭 껴안고 있는 고등어의 끈질긴 인연을 본다.
좌판에 가지런히 누운 간 고등어 행렬에서 가장 푸른빛이 돋보이는 하나를 집어 든다. 속을 헤집어 작은 것으로 물때를 가늠해 본다. 고등어는 우선 보이는 큰 것보다 속에 안겨있는 작은 것이 부실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등어 살 때는 배를 헤집어 살점을 눌러 보고 냄새를 맡아 본다. 그들이 고향 떠난 기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생선 좌판이다. 갓 잡아 올려 푸른 등 꿈틀거리며 꼬리 짓하던 그 때를 상상하며 한 손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는다.
등 푸른 생선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많은 영양소를 가졌다기에 고등어로 식탁 꾸미기를 즐긴다. '오늘도 고등어로 식탁을 꾸미면 되겠다.' 싶다. 큰 맘 먹고 그 중 가장 잘 생긴 놈으로 한 손 골랐다. 아침에 나누었던 날 선 눈빛과 짜증스런 마음을 풀어 놓고, 고등어에게 화해의 징검다리 역할을 청해 본다. 노릇노릇 구워진 고등어에서 자르르 기름이 흐른다. 남편이 좋아하는 찰밥 한 술 떠서 고등어 한 점을 올려놓는다.
고등어 먹으면서 서로를 놓지 못하는 고등어를 닮아 우리 부부도 등을 내어 주고 가슴을 열어주는 관계가 유지되길 바란다.
40년 가까이 부부로 살면서 비익조 한쪽 날개 분신인 양 매어 달고 살았다. 긴장일랑 한 박자 늦추면서 그 많은 세월들을 외나무 다리 건너듯 아슬아슬 잘도 건넜다. 때로는 단칼에 무 베듯 연민을 싹둑 잘라 다시는 안볼 듯이 등을 돌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부부 십계명 중 맴을 도는 열 번째 구절 '처음 연애하던 그때처럼 살아라.'되새김질하며 삭여 왔다.
아직도 비익조 고운 인연으로 동행할 길이 남아 있지 않느냐!
두 몸 하나 되어 서리꽃 필 때까지 등 돌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자다 깨어 설핏 본 당신 얼굴의 주름살에 내 얼굴도 겹쳐진다. 함께한 세월 오늘 따라 등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