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름다운 이름

류귀숙 2016. 2. 28. 19:02

     아름다운 이름

 산골짝에는 얼음이 풀리고 땅은 이미 풋풋한 봄 냄새를 뱉어내는 해토머리다. 한 뼘 남은 겨울 끝자락을 등에 업고 중국 딸이 돌아왔다. 춘절을 맞아 중국 간 지 꼭 20일째 되는 날이다. 그간 마음 속에 웅크리고 앉은 불안감 때문에 중국 쪽을 바라보며 해바라기를 하던 차였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 무지개처럼, 풀잎에 이슬처럼 내 곁을 떠날 것만 같다. 이름부터가 부평초 평(萍)자를 둘씩이나 거느린 평평(중국 발음 :핑핑)이다. 그 아이는 이름대로 초등학교 졸업 후 서른 살이 넘은 지금까지 부평초가 되어 떠다니고 있다. 정말 이름값을 하는 아이다. 그 애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남다르다는 생각이다. 이 아이가 이렇게 넓은 땅을 누비고 다닐 것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내 입장에선 언제 떠날지 모르는 파랑새 같은 존재다. 이런 나의 불안을 가볍게 누르고 얼굴 가득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돌아왔다.

 "언마, 나 한, 중 합작 화장품 회사를 차릴거예요." "한국과 중국 모두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그 애의 눈빛은 희망으로 빛났다.

 미(美)를 창조하는 회사니까 이름 또한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이름이라! 그 속에 미래의 희망을 담아야하고 회사를 대표할 깃발이 돼야 한다. 한, 중 사전을 넘나들며 많은 글자 중에서 가장 적당한  몇을 뽑아 올려 아름다운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 이름 짓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다.

세상에는 인간을 선두로 모든 사물이 고유한 이름은 가지고 있다. 요즈음엔 사물이 아닌 무형의 회사나 단체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런 다양한 이름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총총하게 박혀있다.

 어릴 적에는 산야에 흩어진 그 많은 동 식물이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언제? 누가? 그 많은 사물에 이름을 붙였을까?  그 궁금증을 풀길 없어 끙끙대다 주일학교 선생님한테서 그 답을 듣게 됐다. 성경 창세기에 분명히 적혀 있는 회답은 첫째 사람 아담이 사물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돼 있었다. 그래도 그 사실이 딱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많은 이름들을 사람이 지었다는 건 분명했다.

 둘러보면 재미있는 이름이 참 많다. 식물의 이름 중에서 도깨비바늘, 며느리믿싯개 등의 재미있는 이름이 있다. 곤충 이름으로도 소금쟁이니 버마제비니 하는 이름이 있는데, 사람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태초에 창조주께서 사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셨다. 그 후 인간은 사물에게 이름이라는 틀을 만들어 지배를 쉽게 하려고 했다. 이름이 주어지면 그 이름대로 살아야 하며 이름에 값이 매겨지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이름 석 자를 가슴에 붙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 이름은 곧 나와 하나가 됐다. 내 이름은 나의 재산, 가족, 친구, 그리고 나의 과거와 미래도 관리한다. 내가 다녀갔다는 표시로 내 이름으로 사인하고 내가 했다는 증거로 내 이름을 적는다. 졸업장, 자격증, 상장에 박힌 이름들이 내 노력의 결과를 말해주고 있다. 나의 대변자요 나의 깃발인 이름을 함부로 지었다면 얼마나 억울한 생을  살아야했을까! 언젠가 잘못 지어진 느낌이 드는 촌스러운 이름에 대해 만만한 엄마한테 분풀이를 했다. 그때 엄마의 대답이 "그래도 끝숙이 보다는 낫지 않니?" 라고 해서 제로 게임으로 끝난 적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 또래의 나이든 여자들은 이름에 그 부모의 불만이나 아들을 낳고 싶은 소망을 담고 있다. 남아 선호사상이 강했던 당시엔 딸자식의 앞날은 철저히 무시했다. 그저 순하게 자라서 말썽 부리지 않고, 사내 동생을 낳는데 도움이 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딸을 그만 낳으라는 뜻으로  끝을 나타내는 말(末)자나 마칠 필(畢)자를 이름에 넣었다. 또 딸을 낳은 게 분하다고 분(憤)자를 넣으면서 한자를 살짝 바꿔 가루분(粉) 등의 글자를 넣었다. 어떤 집은 아예 남자 이름을 붙여줬다. 또는 여자의 이름에 사내남(男)자를 넣기도 했다. 그래서 말자, 끝순, 필숙, 득남, 필남, 순자, 옥분 등의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내 이름은 귀하다는 뜻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이름 석 자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자녀 이름을 함부로 지어서야 되겠나 싶다. 적어도 딸자식의 이름에 자신의 서운함이나 억울함을 담아서야 되겠나! 그 자식의 이름에 희망쯤은 넣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야 그런 일이 드물지만 노년기에 접어든 여자들은 아직도 이런 소망 없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듣기 좋고 부르기도 좋고 담긴 뜻 또한 좋은 이름이면 순풍에 돛을 다는 인생일까?  대답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부모는 자식의 이름에 희망과 소망을 담아주면 되고,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몫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에서 남긴 이름은 단순히 석 자로 나타낸 이름이 아닐 것이다. 그 이름을 달고 평생을 살았던 그 이름 주인의 인생이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을지라고 마지막 인생을 결산할 때는 그 이름의 가치가 달라진다. 촌스러운 이름이면 어떻고, 함부로 지은 이름이면 어떠랴! 자신의 이름에 빛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위다. 바른 삶, 남을 위한 삶을 살아온 자에게는 그 이름이 역사에 빛날 것이다.

 좋은 이름을 받은 사람도 그 행위로 인해 이름에 오물을 뒤집어쓰기도 하니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런 인생길을 가야할 것이다. 내 인생을 마지막 결산하는 날 내 이름의 가치는 어떨까? 생각해 보면 오싹하다. 이름 지은 자는 부모님이지만 이름을 남기는 일은 자신의 몫이다. 더러운 이름과 빛나는 이름은 순전히 삶의 결과가 결정짓는다.

 딸이 중요한 이름을 나에게 부탁했으니 책임이 누름돌이 된다. 내가 지은 이름으로 회사가 돛을 달고 항해를 해야 한다는데 어떻게 하지? 아름다울 미(美)자와 즐길 낙(樂)을 찾아내서 이리저리 맞추며 아름다운 이름을 만들어 본다. 중국 사람들도 좋아하는 이름이라야 되니 중국인의 의견을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다 싶다.

 그래! 혼자서 앓고 있을 일이 아니지! 지인들에게 공모를 해 보는 방법은 어떨까? 일단 중국어 밴드에 올려서 중국어를 알고 중국에 관심 있는 지인들의 의견을 물어보자. 생각의 타래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을 찾아서 두 발로 뛰어야 겠다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님의 시구가 생각난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러줘야 아름다운 이름이 될 것이다. 그렇담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의 꽃이 되는 방법부터 생각해야 겠다.


*해토머리: 얼었던 땅이 녹아서 풀리기 시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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