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는 꽹과리
봄내음이 물씬 풍긴다.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꽃향기는 겨울잠에 갇혔던 몸과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이어서 내 안에 퍼질러 앉았던 향수가 일렁인다. 어린 시절이 버들강아지 눈뜨듯 몽실몽실 일어난다. 들판에는 쑥이랑 냉이 등의 봄나물까지 덩달아 술렁댄다.
봄꽃이 웃음을 참지 못해 터뜨리는 함박웃음 속을 걸어 본다. 금싸라기 같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팝콘처럼 터져버린 벚꽃 그늘 아래 서니, 4월의 노래가 입 속을 맴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이미 목련꽃 그늘을 지나 벚꽃 그늘 속을 걷고 있다. 강둑을 노랗게 물들인 개나리도 뒤질 새라 아는 체를 한다. 낙화되어 떨어지는 꽃잎이 하나 둘 머리 위에 올라앉는다. 벚꽃 화관을 쓰고 이 순간 봄 처녀가 된다.
실로 일순간의 일이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천둥번개처럼 귓전을 때린다. 우레 같은 소리를 질러대는 자 그 누구며 무슨 소린가! 놀라 돌아보니 국회위원이 되고 싶은 자가 질러대는 소리다. 확성기를 양껏 틀어 놓고 우레 같은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귀뿐만 아니라 눈의 관심도 차지하려고 한껏 머리를 썼나 보다. 선전 차량에는 큰 글씨로 후보자의 기호를 써 놓고 이름과 얼굴을 내밀었다. 대문짝만한 글씨는 기호0번 0당 000였다. 얼굴에는 웃음을 한 바가지 담고 있다. 포즈 또한 멋있어 패션모델이나 되는 듯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역민을 위한 일꾼이 되겠단다. '잘못된 나라를 바로 잡겠다.'고도 하고, '경제를 일으키겠다.'고도 한다. 깨갱깨갱 꽹과리 소리 같은 후보자의 목소리가 봄 하늘을 가른다. 지금까지 봄 처녀인양 봄꿈을 꾸다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저기 상춘객이 모이는 곳에는 으례이 선거운동원들이 끼어든다. 미소 띤 얼굴로, 은근한 목소리로 또 정중한 자세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다. 이때만은 그 가족들도 선보인다. 그 대표의 부인인데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다. 평소에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인사도 없던 사람이 이때만은 친한 척을 한다. 적당한 미소에 머리까지 조아리며 악수를 청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요조숙녀가 따로 없다. 마침 포근한 봄볕이 그들의 얼굴을 비춘다. 이렇게 온유하고 공손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봄꽃보다 화사한 그들의 얼굴엔 교양, 지성, 그리고 미소가 넘친다. 그러나 왜 내 귀에는 그들의 말소리가 꽹과리의 울림으로 들리고, 그들의 얼굴이 어릿광대처럼 보일까?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정월 대보름, 단오 등의 명절이 되면 풍물놀이 한마당이 벌어졌다. 또 김매기나 호미 씻기와 같이 중요한 농기가 돼도 풍물놀이를 했다. 농사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일으켜 신바람을 몰아왔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아이들은 풍물놀이패를 따라 동네를 돌았다. 한 번씩 천지를 진동케 하는 징 소리가 징∼하고 울리면 온 몸에 쌓여있던 한과 피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장구소리도 다듬이소리처럼 타닥이며 장단을 맞췄다. 이때 맨 앞자리에 서서 상모를 쓰고 꽹과리를 든 상쇠가 지휘를 맡는다. '갠지∼ 갠지∼ 갠지∼ 지갠∼' 하면서 장단을 고르면 뒤이어 풍물 소리가 어울려 익어간다. 마칠 때도 꽹과리가 신호를 한다. 상쇠를 맡은 자는 풍물패의 지도자 역할인데 앞서서 상모를 돌리며 어깨까지 들썩이니 한껏 흥이 났다. 그러나 초랭이처럼 깝죽대며 너무 설쳐대니 경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쇠의 신호에 따라 모든 풍물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니 신기하기도 했다. 풍물놀이가 벌어지면 신이 나서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그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한바탕 마을을 돌고 나면 어느새 마을은 정적에 잠긴다. 남는 건 쓰레기와 공허뿐이다.
그때의 그 꽹과리 소리를 후보자들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거철만 되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는지, 꽹과리를 잡고 상쇠가 된다. 깨갱…깽…잔기침을 해댄다. 천 갈래로 갈라지는 목소리가 간곡히 호소한다. "제발 나에게 한 표를 달라고." 딱 이때만 '쨍--'하고 나타나서 친한 척 은근하다. 흘끔거리는 눈길도 포근히 감싸고, 중얼거리는 입질도 다소곳이 참는다. 당선만 되면 꽃방석에라도 앉혀주겠단다. '먹을 것 입을 것이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도 한다. 초능력자인 척 공수표를 날리고 있다.
이 지역은 복을 많이도 받았다는 생각이다. 성인군자, 초능력자. 요조숙녀가 한 두 명이 아니니 복에 복을 받은 지역이다.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인물이 있는 줄을 몰랐다. 저마다 자신이 가장 큰 행복을 주겠다고 '깨갱깨갱' 울려댄다. 공중에 떠다니는 목소리들을 모아 보면 모두가 애국자의 목소리다.
오늘 배달된 우편물 속에 무게를 잡고 있는 유난히 큰 봉투가 눈에 뜨인다. 좁은 우편함을 비집고 들어앉은 그것을 선물이라도 받은 듯 끌어안고 들어와 거실 바닥에 부려놓아 본다. 길에서 만났던 후보의 얼굴들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멋진 포즈를 지으며 올려다보고 있다. 열 손가락으론 셀 수 없는 후보자의 프로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돋보기를 쓰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그들의 면면을 꼼꼼히 헤집어 본다. 재임 중 많은 일을 혼자 해낸 듯 자랑 섞인 멘트를 날리는 후보가 눈 안 가득 들어온다. 아! 그러나 이게 무슨 말인가! 4년 국회위원 재직 중 체납했던 세금 액이 어마어마하다. 배신 감이 쏵 밀려온다. 자신이 많은 일을 해 냈다고 자랑하면서 정작 국민의 4대 임무 중의 하나인 납세 임무를 소홀히 했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말로만 잘 하겠다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다를 게 없다.
다른 후보도 마찬가지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점입가경이다. 범죄 기록 난을 빼곡히 메운 후보자도 있다. 교통 위반에 음주 운전은 기본이고, 사기, 횡령 등의 무거운 범죄들도 언듯언듯 보인다. 그들이 입법부에 들어가 법을 입안하는 자리를 차지하겠단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찬란한 스펙과 묵직한 이력을 가진 지도자가 평범한 시민보다 못하니 이 일이 큰일이다. 납세 의무를 저버린 자가 복지 정책을 늘이겠단다.
국가의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인간 수명의 연장으로 노인 인구가 가속 페달을 밟으며 늘어나고 있다. 노인 인구가 젊은이들을 앞지른 지도 한참 됐다. 자연히 노인 유권자가 많게 됐고, 투표율 또한 젊은이들 보다 높다.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노인 인구에 대한 부담까지 지고 있다. 이 점을 잘 아는 후보자들이 넓은 표밭인 노인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다. 청년 일자리를 제쳐 두고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올려주겠다고 한다. 자신의 돈으로 선심쓰듯 인심이 넘쳐난다. 연신 허공을 저어 뜬구름만 잡고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 마음에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으면 실천인들 할 수 있겠나?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다를 게 없다.
풍물 판이 벌어진다. 북이 울리고 징이 울린다. 그 속에서 까불대는 꽹과리 소리가 경망스럽다. 특히 꽹과리 잡은 상쇠의 모양새도 진중하지 못하고 풀풀 날린다. 징소리의 위엄보다 작달막한 꽹과리를 닮은 후보자들의 호소 소리가 귀전으로 비켜나간다. 오늘은 말잔치를 벌이고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모르쇠 작전으로 나갈 것은 뻔한 일이다. 나라가 걱정이다. 후세들에게 평화스런 나라, 살기 좋은 나라를 물려 줘야 할 어른들이 정신을 똑 바로 차려야 할 때다.
병아리를 낚아채려고 솔개가 하늘을 휘저으며 위협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어미닭은 병아리를 날개 속에 숨기고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와 같다. 우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소중한 한 표가 헛되지 않게 어미닭의 지혜와 용기를 본받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