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공항
이른 아침 호텔에서 주는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고 아메리칸 항공기 체크인을 위해 줄을 섰다. 6일 간의 서부 여행을 끝내고 동부로 가기 위해 LA발 뉴욕 행 비행기를 타려고 준비 중이다. 비행기 표를 받고 짐을 부치는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국내 가이드 동행 없이 현지 가이드에게만 의존하는 여행은 입, 출국 수속을 스스로 해야 한다. 이때 외국 항공인 경우에는 언어의 장애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우리 일행 23명이 비행기 표를 받고 짐을 부치려는데 짐 값을 기본 25불내란다. 주로 부부 팀이니 한 집에 50불은 부담해야 한다. 23Kg을 초과하면 추가 요금도 내야한단다. 여행계획서에서 언급했지만 모두들 허투루 생각하고 넘겨버린 게 잘못이다. 아니 알아도 어쩌겠나. 15일 간의 장기 여행인데 20Kg 정도의 짐은 기본 아닌가? 이런 작은 짐까지도 요금을 매기다니! 시작부터 기분이 상한다.
일행 중 어떤 이는 자신의 가방이 기내에 들어가겠다 싶어 부치지 않고 들어왔다가 검색대에서 태클이 걸렸다. 가방을 열어보란다. 그는 짐을 부칠 심산으로 액체 류(스프레이)를 가방에 넣었는데 깜박 잊고 짐값 생각만 하다가 그렇게 됐단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사람 저 사람이 거들어 겨우 소통된 내용은 다시 밖으로 나가 짐을 부치란다. 그렇다면 그 물건을 버리는 게 더 유익이라 그렇게 하고 겨우 통과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숨 돌리고 47번 게이트 앞에서 AA2기의 보딩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보딩 시간은 8:30분, 출발 시간은 9:00이다. 이제 비행기만 타면 뉴욕으로 가게 된다. 어려운 검색대도 통과했고 곧 비행기를 탈 것이다.
감히 내가 뉴욕시, 워싱턴 DC를 갈 수 있다니! 가슴 속에선 작은 흥분이 일어난다. 세계적인 도시에 내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역사적 순간이 아닌가! 이제 동부도 눈앞에 와 있다. 6시간 후면 뉴욕에 가 있을 것이다.
이때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가 닥쳤다. 보딩 시간이 됐는데도 탑승구에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항공기도 대놓지 않고 있다.
'이상하다. 보딩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도 조용하다. '불안한 가운데 일행 한 사람이 게이트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바꿨다는 게이트로 몰려가서 직원에게 물어보려는데 여기도 직원이 없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어떻게 물어야 하나?' 자꾸만 불안해 진다.
뒤늦게 전광판을 보니 AA2기는 42번 게이트이고, 딜레이라는 표시등이 반짝인다. 그러면 왜 딜레이 됐으며 언제 출발하는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당황스럽다. 직원 한 사람을 잡고 통역을 불러 달랬더니 여긴 통역이 없단다. 한국인이 이렇게 많이 오가는데 한국인 통역이 없단다.
짧은 영어 실력이 바닥났다. 모두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라 영어 소통능력이 원활한 사람이 없다. 이때 나의 기지를 발휘해 보리라 생각했다. '영어 잘하는 한국인 젊은이를 찾아보는 거다.' 그러나 생각처럼 젊은이를 찾지 못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방송에서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지만 귀머거리라 들을 수가 없다. 전광판을 보고 오후 1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아냈다. 그렇담 4시간이나 딜레이 된다는 건데 그건 말이 안 된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이럴 수가 있나! 난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 지연되는 비행기를 본 적이 없다. 중국 국내선을 타면 자주 지연이 되는데 그때도 1시간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4시간이라니! 나의 머리 속에 있는 미국은 정확한 나라, 합리적인 나라, 인도적인 나라다. 그런 미국이 비행기를 4시간이나 지연시킨다는 건 미국답지 않다. 원인을 설명하는 안내방송이 나와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오늘은 귀머거리 환자가 된다.
영어를 배우며 낭비한 시간들이 쓰레기더미 속으로 흘러간다. 중 고 시절 보충수업을 하면서까지 배웠던 영어가 휴지 조각이 되어 날아다닌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의 이중 장애자처럼 들을 귀도 말할 입도 없다.
바뀐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탑승객들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들은 모든 걸 포용하겠다는 너그러움까지 보이고 있다. 불안, 초조에 불만까지 담고 있는 얼굴은 모두 한국인들의 얼굴이다.
12시쯤 지나니 항공사에서 샌드위치와 과일, 음료 등 간단한 식사를 제공했다. 샌드위치도 냉동실에서 꺼내왔는지 싸늘하다. 얼음 같이 찬 샌드위치를 입 속으로 구겨 넣으며 샌드위치처럼 눌린 자존심을 꼽씹어 본다. 물론 사과 말은 한마디도 없이 음식만 제공했다.
키다리 미국에 대항 한 번 못하고 항의하는 목소리조차도 삼켜버린 힘없는 나라 국민이다. 마음만 동당거릴 뿐 어디다 화풀이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4시간 늦은데다 시차까지 3시간을 보태니 도착은 저녁 9시 39분에 했다.
나침반 없는 우리 한국인 16명은 뉴욕 케네디 공항에 발을 올렸다. 애초에 23명이 출발했으나 7명은 1시간 먼저 출발하는 테켓이라 그들은 정상적으로 도착해 호텔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또 검색대를 어떻게 통과하나?' 걱정하며 외국인들이 줄을 서고 있기에 우리도 따라 붙었다. 거기서 또 줄을 잘못 섰다는 걸 알았다. 알고 보니 그 줄은 런던으로 환승하는 줄이었다. 하루사이 바보가 된 우리들은 바보처럼 직원이 손가락 짓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검색을 하지 않는다. 잔뜩 긴장했는데 무사통과라! 이것 하나만은 마음에 든다. 입국할 땐 그리도 까다롭게 굴더니만 국내선에선 내리기만하면 바로 짐을 찾을 수있다. 짐만 찾으면 오늘의 짐은 벗을 수 있다. AA2 넘버의 전광판이 반짝이고 있는 8번 홈 앞에서 짐을 기다린다.
여기서 우리들은 도 한 번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짐이 나오지 않는다. 짐을 운반하는 벨트가 움직이지도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 시간을 보니 밤 11시다. 이때 같은 비행기를 탔던 외국인 부인이 가르쳐줘서 짐 있는 곳으로 가 보니 짐들은 보관소에 있었다. 찾아가지 않는 짐을 보관하는 창고 비슷한 곳이었다. 물론 여기도 직원은 없다. 이때 기다리다 지친 현지 가이드가 들어왔다. 밤 늦은 시간이라 직원들이 없는 틈을 타서 안으로 진입했나 보다.
부모를 잃었다가 찾은 아이 같이 가이드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고해 바쳤다. 그리고 분풀이도 부탁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짐이 사람 보다 먼저 이곳에 온 것이다. 미국에는 흔히 이런 일이 있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아침 8시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우리 짐까지 다 실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짐작일 뿐이다. 누구 하나 변명하거나 사과하는 일도 없으니…
어릴 적 미국에는 키다리 아저씨가 살고 있어 우리들이 어려울 때마다 척척 도와주는 줄 알았다. 지금도 미국은 우리들에게 무척 호의 적일 것이라는 환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키다리 아저씨의 나라에서 푸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가이드에게 사과라도 받아내서 억울함을 풀어 달랬더니, 소용없다는 말만 했다. 그들은 후진국 국민들의 항의 따위는 무시한단다. 억울하면 법적으로 맞서라고 한다니 어이가 없다.
그렇담 미국은 우리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대답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엘리베이터에서 얻었다. "이 빌딩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로 시작하는 안내 방송이 영어, 불어, 이태리어,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흘러 나왔으나 한국어 해설은 없다.
엘리베이터 안을 꽉 채운 사람들은 모두가 한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