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미국에 간다.
여행 날을 받아 놓으면 가라앉았던 마음이 부스스 기지개를 켠다. 갑자기 외출할 채비를 하듯 마음이 바빠진다. 밑반찬도 5종 세트 정도는 만들어놔야 하고 대청소도 한번 쯤 해야 한다. 그 외 부재 시 일어날 경우의 수에도 대비해야 한다. 사 둘 것은 미리 사 두고, 내야할 세금이 있는지도 살핀다. 또 계절을 앞당겨 옷장도 정리해야한다. 파도가 밀려오듯 내가 처리할 일이 눈 안 가득 들어온다. 발걸음은 이미 가속페달을 밟았고 마음엔 날개를 달았다.
유럽도 여러 나라를 가 봤고,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도 여러 곳을 다녀왔다. 그러나 그 모든 나라보다 윗자리에 있는 나라 미국에 간다. 여행 가이드북을 꺼내 가야할 지방들을 살펴본다. 이미 뇌리 속엔 미국에 대한 지식들이 가득 차 있다. 그 옆자리엔 동경과 경외감까지 자리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언제 내 머리와 가슴 속으로 들어왔을까?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라 기억된다. 한국전쟁 때 앞장서서 패전의 위기에 처한 우리를 구해준 나라.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도 우리를 구해준 나라라는 기억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은 어린 시절 교회에 가면 코 큰 아저씨가 주고 간 선물을 나눠줬다. 그 선물은 공책일 때도 있고, 초콜릿이나 사탕 종류일 때도 있었다. 학교에도 가끔은 보자기를 가져가는 날이 있었는데 그 보자기에 하얀 밀가루를 담아왔던 기억이 남아있다. 생전 처음 보는 노란 옥수수 가루를 받아왔던 때도 있었다. 그때 그 옥수수빵 맛의 구수함을 잊을 수 없다. 그때부터 내 머리 속의 미국은 지상천국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도를 펴 놓고 미국의 수도가 있는 워싱턴 DC에 점 하나를 찍어 본다. 그 다음으로는 뉴욕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곳이다. 학창 시절 사회책에서 횃불을 높이 든 자유의 여신상을 봤는데, 그 곳을 실제로 가 보는 것이다. 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하면서 퀴즈문제를 냈던 그 높은 빌딩도 만나게 된다. 인터넷을 뒤져 그랜드캐니언이 있는 위치를 확인 해 본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는 위치에는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 넣는다. 이렇게 많은 볼거리들이 모여있는 곳 미국을 가게 됐다고 여기저기다 자랑을 해댔다.
최근에는 막내딸이 살고 싶어 하는 나라다.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에 가고 싶어 한다. 그 속에 막내가 끼어 있는데 그 정도가 심하다.
주위에선 더러 미국에 이민 가기도 하고, 유학차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조건과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관광객의 자격으로라도 그 땅을 한 번 밟고 싶었다. 죽기 전에 그랜드캐니언과 나이아가라 폭포를 꼭 한 번 보고싶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때에 태어났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행복감이 밀려온다.
내일이면 인천공항에서 LA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결혼 날 받아 놓은 신부마냥 가슴에서 작은 물결이 일어난다.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LA를 먼저 구경하고,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그랜드캐니언을 구경하는 코스는 서부관광 코스다. 이어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건너가 나이아가라, 백악관,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하는 동부코스도 아울러 관광할 것이다. 여기다 캐나다 국경을 넘어 캐나다 쪽에서 폭포를 감상하고 토론토 시내를 관람하는 일정까지 보탰다. 마지막은 뉴욕으로 다시 와서 우드버리 아울렛 매장에서 쇼핑도 즐길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좀처럼 물건을 사지 않는 나이지만 세계적인 쇼핑센터에서 미국 메이커인 코치 가방 한두 개쯤은 살 예정이다. 막내딸이 그 메이커를 좋아하기에 이번엔 좀 예외로 쇼핑관광도 해 볼까? 생각 중이다.
또 여행이란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모든 일상을 잊고 몸과 마음을 여행지에 푹 잠그는 것 아닌가? 보름 동안이라도 미국 땅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어릴 적 들어앉아 있는 그 이미지에 현실의 인상을 포개고 싶다.
구호물자나 받던 못사는 나라 국민이 키다리 아저씨의 나라에서 어깨를 펴고 다닐 것이다. 그들의 서비스도 받으며 1달러의 팁도 거침없이 던질 것이다. 이제는 갑의 위치에서 미국인들에게 당당히 맞설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회로 밀려오는 한 가지는 영어를 배우지 못해 아쉽다는 것이다. 그 나라 언어를 알아야 그들을 부릴 수 있고, 부당하면 항의라도 할 것이 아닌가? 듣자하니 입국심사 시 까다로운 질문을 한다는데 어쩌지? 옛날 학창시절의 영어는 이미 머릿속을 떠나간 지 오래다. 그간 문화센터에서 영어를 배울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중국어를 시작했기에 배우던 중국어도 버거웠다. 또 영어랑 헝클어져 두 나라말 모두를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시도라도 해 볼 걸'하고 후회해 본다.
입국심사에 필요한 질문과 답변을 한글로 적고는 그걸 딸에게 번역해 달래서 프린트했다. 발음 연습을 해 보지만 혀가 굳어 잘 되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말이 안 되면 준비한 프린트 물을 보여주면 되겠지,' 하고 배짱을 가져 본다.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으면 프린트 물을 보이면 된다는 배짱이 생기니 죽었던 기가 다시 살아난다. '설마 그들이 돈 쓰려고 오는 관광객을 내치기야 하겠나?' 이래서 나이든 사람들은 한국 가이드를 동행하는가 보다.
우리 부부와 친구 부부는 나이도 영어 실력도 비슷하고 여행 취향도 비슷한 지라 간 크게 도전장을 냈다. 이때 영어교사 출신이 한명 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의 도움도 없이 4명의 영어 청맹과니가 미국 LA에서 입국 심사를 무사히 통과할까? 인터넷을 뒤지며 예상 문제를 풀어보지만 둔한 머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입국은 될 되로 돼라.' '근심은 내려놓자.' 이렇게 마음먹고 즐거운 일만 생각하련다.
그랜드캐니언에 내 발자국을 찍는 일을 생각하자. 나아아가라 폭포 아래서 부서지는 물의 굉음을 듣고 소리 한 번 크게 질러보자. 4사람이 협력하면 어떤 일이든 못하겠나? 두 주먹을 쥐어 본다.
다시 가방을 챙긴다. 4계절 옷을 골고루 챙겨 넣는다. 동부는 춥다니 겨울옷을, 라스베이거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여름옷을 입을 것이다 그 외의 곳에서는 춘추복이면 족할 것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빨간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본다. 이 복장으로 샌프란시스코 해변을 걸을 것이다.
역사적 순간이 아닌가! 비행기에 몸을 싣고 태평양을 날아 천사의 땅 LA에 사뿐히 내려앉는 꿈을 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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