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뿌리

류귀숙 2016. 8. 25. 19:12

            뿌리

 올해는 기어코 뿌리를 뽑아 제대로 된 산소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시부모님의 산소로 향했다. 돈짝만한 하늘이 겹친 능선너머로 빼꼼이 내다보고 있다.

 어릴 적 소 먹이러 산에 갔을 때 맡아보던 솔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그때 소들을 계곡으로 몰아넣고  민둥산 같이 봉긋한 산소에 모여 놀았다. 누구의 산소인지 모르지만 아마 가족들의 무덤인 듯 보였다. 넓은 잔디 묘역에 너 댓 기의 봉분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봉분 꼭대기에서 미끄럼 타듯 미끄러져 내려올 때의 스릴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산소는 그때의 그 산소와 판이하게 다르다. 잔디의 자람에 방해하는 억센 놈들이 봉분위로 겁 없이 솟아 올라있다. 아카시아를 선두로 싸리나무도 있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세력다툼을 하는 듯하다. 한술 더 떠서 야생 줄 딸기는 제집인양 봉분을 아예 감싸 안았다. 여기다 다년 생의 억센 풀까지…. 임자 없는 집에 나그네만 가득하다. 이건 산소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죄송스럽다. 자손이 없어 버려진 산소와 다를 바가 없다. 갑자기 오기가 생기면서 그것들과 맞서 보기로 했다. 해마다 벌초 때만 와서 예초기로 이발하듯 윗 부분만 잘라냈더니 이것들이 비웃고 있다. 머리가 잘려 나간들 뿌리가 있으니 그것들이 세력을 넓히는 건 당연하다. 손에 비닐 입힌 면장갑을 끼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을 한다. 곧이어 한바탕 결전을 벌일 태세에 들어간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적군을 한번 노려본다. 처음엔 잔디가 제법 잘 자랐는데 언제부턴가 주인인 잔디를 몰아내고 이것들이 붙박이가 됐다.

 맨손으로 당겨 봤더니 꿈쩍도 않는다. 이번엔 가져간 특별 무기를 갖다댄다. 가늘고 길게 생긴 약초 캐는 호미다. 날이 가늘고 뾰족해서 깊은 뿌리를 뽑는데 제격이다. 딸기나 아카시아는 가시를 세우며 더욱 강하게 저항해 온다. 줄딸기는 낫으로 줄들을 잘라 내고 밑둥를 찾아서 약초 호미로 뿌리를 뽑는다. 살아남기 위해 가늘고 긴 뿌리가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길다. 잔 뿌리 일부분만 땅 속에 남아도 내년엔 또다시 싹이 날 것이고, 자손을 이어갈 것이다. 캐내고 또 캐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 생각하니 힘이 쭉 빠진다. 한참 실랑이하느라 온 몸이 땀범벅이 된다.

 처음 도착했을 땐 남의 집을 점령하고 있는 뻔뻔함에 분노했는데, 한참을 싸우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진다. 뽑혀나간 뿌리가 하늘을 향해 허옇게 말라있는 걸 보니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영역을 뺏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놀랍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이렇게 잡초처럼 뽑히고, 밟혀도 다시 살아난 수난의 연속이었다.

 쥘부채를 펼친 듯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다운 우리 땅을 노리는 승냥이 떼가 있었다. 그들은 비옥한 토지와 질 높은 먹거리가 탐이 났고, 우거진 산림도 탐이 났을 거다. 그들은 급기야 이 땅을 뺏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비록 우리 조상들은 잔디처럼, 들꽃처럼 순하고 연한 것 같지만 승냥이에게는 단호히 맞섰다. 그들의 야심을 알아챈 민초들은 강한 잡초로 바뀌어 이 땅을 지켜냈다. 밟으면 일어서고, 총 칼엔 맨 손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응수했다. 그들은 민초들의 뿌리 뽑기가 난관에 부딪치게 되자, 왕실의 뿌리 뽑기로 방향을 바꿨다. 그때 일제는 마지막 왕손인 영친왕을 강제로 데려가고 어린 덕혜옹주도 데려갔다. 대한 제국의 왕손을 없애면 쉽게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 착각했다.


 그때 용암이 끓듯 부글거리던 우리 민족의 가슴도 10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식어만 갔다. 분노도 세월 속에 묻혀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 여기 영화관에서 100년의 세월 속에 묻혀있던 그녀를 만났다.

 허진호 감독이 손예진이라는 배우를 통해 덕혜옹주를 살려냈다. 영친왕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덕혜옹주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옹주는 고종의 막내딸로  귀인 양씨 소생이다. 그때 일제는 왕실 뿌리 뽑기의 일환으로 13세의 덕혜옹주마저 일본으로 데려갔다. 강제 유학을 시키고, 대마도 군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도 시켰다. 어린 옹주는 남의 땅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다 우울증에 걸리게 됐다. 남편과의 이혼과 딸의 자살까지 지켜봐야 했으니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해방 소식을 듣고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거절당했다. 왕족의 부활을 염려한 탓일 것이다. 왕자도 아닌 옹주에게까지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었을까!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이 처연하다. 30대의 젊은 나이 때 해방이 됐는데도 귀국 반대로 15년이나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콧등이 시큰하다. 51세에 귀국해서 7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했다.

 1989년 옹주는 이 땅을 떠나면서 서툰 한글로 메모를 남겼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와 비전하도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정신이 온전치는 않았지만 옹주께서는 고국에서의 삶이 행복했던 것 같다.

 고국 땅에서 뿌리 뽑힌 옹주가 그때 산소에서 뿌리 뽑힌 잡초와 오버랩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이별하고 낯설고 물선 원수의 땅에서 살았던 그 시간들이 오늘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이 진하게 다가온다. 또 앞으로 지켜야할 나라에 대해 내가 해야할 일도 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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