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처음 조롱을 벗어나던 날

류귀숙 2017. 6. 3. 14:43

    처음 조롱을 벗어나던 날

 어릴 땐 손바닥만 한 세상이 전부라 생각했다. 조금씩 몸집이 커지고 부터는 조롱 안이 답답해 조롱 밖의 세상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농촌이라는 이름의 틀 안에는 산과 들이 계절마다 변화를 주었고, 하늘의 달과 별도 가끔은 친구가 됐다. 그래도 따분할 때는 대도시로 향해 까치발을 세우며 그곳에다 희망을 걸었다. 막상 희망의 도시로, 엄청나게 넓은 곳으로 왔지만 이 또한 갑갑한 조롱일 뿐이었다.

 조롱 밖에선 무수한 소식들이 날개 돋친 듯 날아 들어왔다. 먼 나라 이웃나라의 소식들도 눈과 귀를 유혹했다. 그러나 용기 없는 나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때 나의 등을 강하게 떠미는 녀석이 있었다. 바로 막내딸이었다. 이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더니, 잠자던 꿈이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기회만 있으면 조롱 밖을 향해 돌진하겠다는 뜻을 언뜻언뜻 비치기도 했다. 아마도 바깥세상을 호시탐탐 노리는 나를 닮았는가 보다.

 며칠간 집을 비운 사이 이 아이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른 바 '여권 사건'이다. 평소엔 내색도 않더니 이 아이의 마음속에선 용암이 끓듯 여행에 대한 욕망이 부글거렸던 모양이다. 나와 남편의 사진을 찾고, 또 자신의 사진은 대입 전형 때 쓰던 걸로 찾아내서 여권을 만들었다. 웃기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없으니 가당치도 않은 사진을 이용했다. 아빠 것은 20대 때 찍은 사진을 앨범에서 오려냈다. 그러니  얼굴만 꽉 찬 모습이라 장애자를 방불케했다.또 50대의 중년을 20대의 젊은이로 탈바꿈 시켰으니 오죽했겠나! 내 사진은 자신의 앨범에서 백일 때 자길 안고 찍은 것을 머리 부분만 오려냈다. 내 사진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그런 사진으로는 어림도 없고, 본인이 직접 방문해야 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여권을 만든 후, 여행사를 찾아가 중국 상하이, 소주, 항주 3박 4일의 여행 패키지에 선금을 질러 놓았다. 하필 날짜도 구정 연휴 때로 정했다.

 이 일을 어쩌나! 구정 때라니…. 이 추운 겨울에 여행이라니…. 그러나 어쩌랴! 이미 정해놓은 일을….

 드디어 덩치라면 한 덩치 하는 우리부부가 갓 솜털을 벗은 딸의 뒤를 줄래줄래 따라서  상하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젠 조롱을 벗어나고픈 막연했던 욕망이,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공산 깃발을 들고 중공이라는 이름을 달았을 땐 넘을 수 없는 철의 장막이 이었는데, 이젠 슬그머니 그 깃발을 감췄단다.

 지금 그 중국을 향해  동방항공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다. 감동과 떨림으로 가슴이 쿵쿵 거린다. 2시간도 못 걸리는 이 가까운 나라 땅을 이제야  밟게 되다니!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신기하고 감동적이다. 비행기에서 부터 중국 아가씨의 서비스를 받으며 거대 땅 중국에 나의 족적을 남기려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나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고, 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런 시간이 온 것도 지명을 넘어선 2004년 1월21일에야 겨우 실현됐다.

 멀게만 느껴졌던 중국 땅이 서울 가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내 발아래 엎드렸다. 푸동항에 착륙하자마자  내 눈동자의 사이즈가 커지기 시작했다. 공항의 거대 규모에 놀라고, 깨알 같이 많은 사람들이 빈틈없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낯선 거리에 서니 알 수 없는 중국말을 하는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자칫하면 미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처음으로 낯선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의 물결 속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아마 신천지를 밟은 기분이랄까? 딱 들어맞는 표현을 찾기가 어렵다.

 상하이 시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여행 일정을 진행했다. 다음 코스로는 소주로 가서 '한산사'라는 사찰도 구경하고 졸정원이라는 어느 부자의 정원도 구경했다. 연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규모의 크기는 어딜 가나 우릴 주눅 들게 한다. 부처의 크기며 건물, 탑의 크기가 우리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마침 설날이라 불교신자들이 절을 찾았는데 향불을 피우는 것도 우리와 사뭇 달랐다. 향도 옛 싸리 빗자루 단 만큼 한 크기의 향을 소죽 구유만한 곳에다 넣고 태우고 있었다. 또 밤새도록 터트리는 폭죽 소리는 총소리처럼 요란했다. 

 낯선 음식을 먹어보는 감동도 만만찮았다. 동파육, 거지 닭 등 이름도 이상한 음식을 먹어보며 외국을 제대로 체험했다. 또 쇼핑 센터로 다니며 진귀한 물건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명주솜과 용정 차도 사 왔다.

이렇게 오나라 월나라의 옛 도읍지 소주와 항주 그리고 우리 민족이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신도시 상하이의 중요 지점을 찾아 첫 해외여행의 발자국을 찍었다.

 이 일이 계기가 돼서 날개를 단 듯, 바퀴를 단 듯 순풍에 돛 달고, 해외여행이라는 항로를 따라 지금도 항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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