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벌떡 일어나라

류귀숙 2017. 2. 8. 20:13

     벌떡 일어나라

 된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축 늘어진 그의 모습을 본다. 빛나던 눈동자, 다부진 몸매는 어디다 감추었을꼬?

가냘픈 작은 손을 만져본다. 뚝딱뚝딱 이 작은 손이 움직이면 요술 방망이를 두드린 듯 맛있는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또 한 번 방망이를 휘두르면 커텐이 나오고, 소파 커버가 나오고, 멋쟁이 모자와 옷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직도 할일이 남아있는데, 이 손이 앙상한 겨울나무가지처럼 변해버렸다. 푸릇푸릇 강줄기를 이루는 실핏줄은 손등에서 그물망처럼 얽혀있다.

시시로 다가오는 태산 같은 고통을 어찌 감당할거나! 편작을 부르고 화타도 데려오고 싶다. 자꾸만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나가려는 손을 영원히 잡고 싶다.

 천리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 '탄핵 무효, 탄핵 기각.' 이 추위 속에서 휘날리는 절규의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아~아~ 우리 대통령' '조국이여, 일어나라. 힘을 내라.'

 파도처럼 밀려오는 천리 밖의 소리가 또 다시 외친다. ' 무너진 나라를 세우자. 붉게 물들어 가는 조국을 살리자.'

 친구여 이 소리가 들리는가? 어서 일어나라 벌떡 일어나 깃발을 들어보자. 이전의 혈기를 되찾아 산천을 누벼보자.

 한 모금의 물도 통과시키지 못해 목구멍에 걸려 있다고 한다. 말라빠진 갯고랑 같은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물길을 열어본다. 주인의 생명을 팽개친 장기들을 꾸짖고 싶다. '식도는, 위는, 장은 무엇 하느라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게 하느냐고?'

 뱃속의 장기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자신의 임무는 망각하고 깃발만 흔들어댄다. 이건 배신이다. 징계 받아 마땅하다. 제일 먼저 간이란 놈이 암 덩이를 끌어안고 빨갛게 부글거리더니, 어느새 사방으로 전염시키고 말았다. 이젠 뱃속의 모든 장기들이 한통속이 됐다.

 처음 암이란 불청객을 맞은 후 그들을 대척하느라 무진 애를 썼지.  어르고 달래고 또 회초리로 때려도 보았잖니? 그런데도 그들은 위세를 떨치며 배꼽 주위로 몰려들더니, 단단한 돌덩이로 바리게이트를 쳐버렸다.

  나라를 분탕질하던 무리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언론이 합세를 하고, 국회의원이 넘어가고, 공무원까지 무릎을 꿇었다.

 이 서슬에 파김치마냥 숨죽여 있던 애국 국민이 일어났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목청껏 함성을 지르고 있다. 이미 태극기의 기세가 촛불을 덮어버렸다.

 친구야! 저 소리가 들리느냐? 비록 장기들이 똘똘 뭉쳐 시위를 벌일지라도 떨쳐버리렴. 배신자는 무시해 버리렴.

 오늘 한 뼘 남은 친구의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이 친구 며칠 새 병원 복이 더욱 헐렁해졌다. 쭉정이 곡식처럼 알맹이가 다 빠져버린 팔뚝을 옷 속에 감추고 있다. 야윈 상체와는 달리 발과 다리가 통통 부어올랐다. 그 다리 주무르며 같이 걸었던 거리를 돌아본다. 중국 장가계에서, 구채구에서 또 서안과 대만에서 개선장군마냥 내달았지…. 그때 이 발이 앞장섰던 일이 눈에 선하다. 손길을 위쪽으로 옮기니 모든 장기들이 모여들었는지 불룩하다. 임부의 배 마냥 부풀어 오른 뱃속에선 반란군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 같다. 장기들이 광장에 모여 궐기대회라도 벌이려는 모양이다. 이들의 파업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정말 막다른 골목까지 가려는 건 아니겠지?

벌떡 일어나라. 친구야! 손잡아 일으키면 일어나겠니?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보자.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조롱을 벗어나던 날  (0) 2017.06.03
결국엔...  (0) 2017.04.28
새봄에도 볼 수있을까?  (0) 2017.01.14
지금은 골방으로 들어갈 때  (0) 2016.11.29
뿌리  (0) 2016.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