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腕章)
요즈음 어딜 가나 주차 문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며칠 전 주차할 곳을 두리번거리다, 마침 대학 교육관 건물의 텅 빈 주차장이 보여 그곳을 이용하러 들어갔더니, 경비원 아저씨가 막는다. 사정 좀 봐 달라고, 잠깐이면 된다고, 사정사정 했으나 막무가내로 차를 돌리란다.
'빈 공간이 많은데 좀 봐주면 될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그 권력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수더분한 외모에, 중년으로 보이는 연륜에, 좀 봐 줄 것 같은데, 이렇게 권력을 휘두르다니!
그의 팔에는 관리원 완장이 빛나고 있었다. 맥없이 무너져 그 곳을 나오면서 난 그 힘이 완장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난 지금까지 완장을 차 본 적이 없어 그 권력의 달콤함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완장의 힘 아래 속수무책 당한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중학교 시절엔 기율 부 완장 찬 선배의 휘두르는 칼날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이 단단히 혼이 났다.
상급생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둥, 방과 후 신입생 정신교육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둥 이 핑계 저 핑계로 벌을 섰고 또 무릎 꿇고 장시간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때 그 녹색 바탕에 선명한 두 줄기의 흰색 줄이 계급장처럼 빛났는데 가운데는 기율 부라고 검은 글씨로 씌어져 있었다 .
갓 입학한 1학년들은 완장 찬 기율 부가 지나가면 일제시절 순사 보다 더 무서워했다.
요즈음도 곳곳에서 주차요원의 완장에, 아파트 경비원의 완장에, 낭패를 당한 적이 더러있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에 등장하는 '임종술'도 저수지 관리 완장을 차고부터는 사람이 달라졌다. 망나니로 살던 그가 마을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며 왕 노릇을 하게 된다.
이렇게 완장을 차고 나면 권력가로 변하니 모두들 완장을 갈망하나 보다.
이를 이용해 최고의 권력자는 힘없고 미미한 존재에게 완장이라는 권력을 주어 자신의 하수인으로 삼게 된다.
해방 후 공산당의 붉은 완장이 그랬고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의 병이 찬 완장이 그랬다.
평소엔 하인 노릇을 한 자거나 학생 신분이거나 한 하급 층에 있던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다녔다.
지주를 찾아다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고매한 인격자를, 학자를, 문학가를, 의사를, 협박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생(生) 사(死) 여탈 권을 아낌없이 행사했다.
심지어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잡아다 '부르주아'란 이름으로 처단하기까지 했으니......
그래도 이런 권력의 상징인 완장은 눈에 보이는 완장이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완장, 변형된 완장으로 지하에 숨어서 권력을 휘두른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 국회의원의 금배지는 어떤가?
유세 때는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다가 막상 금배지를 가슴에 다는 순간 그 때 일은 까맣게 잊고 만다.
그들의 얼굴은 T. V에서나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은 코미디언에 가까운 익살꾼으로 바뀐다.
멱살도 잡아보고, 수갑도 차보고, 망치로 문도 두드려 부숴보며, 경찰관 앞에서 묵비권 행사한다고 벙어리 흉내도 내보인다. 특히 요즈음엔 기술 하나가 더 늘어났다.
이른 바 '국회의원 막말 사건'이다. 그들은 상대를 여지없이 뭉개는 말을 해놓고 영웅이 된 양 우쭐거린다.
어느 코미디언이나 연예인 보다 더 연기를 잘한다.
우리들은 지도자가 아닌 연기자를 뽑아 올린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정치권력의 완장을 차고 오랫동안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그 얼굴엔 선량한 지도자의 가면을 쓰고서......
그들에겐 힘없는 서민 먹잇감이 많으면 좋겠지. 박수까지 받으면 더 좋고.
나는 이 완장의 이름을 바꿔 버려야겠다는 당찬 꿈을 꾸어본다. 군림하는 완장이 아니라 섬기는 완장으로 말이다.
그 완장의 종류로는 가장 크고 빛나는 게 '사랑'의 완장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거다. 예수님만큼은 아니라도 조금은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다음으로 믿음, 봉사, 질서, 용서 등의 완장을 하나씩 모두 차고 다녔으면 좋겠다.
고위 정치인들은 사랑의 완장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고, 공무원들은 봉사의 완장, 국민들은 믿음, 질서, 용서 등의 여러 완장 중 하나를 고르면 되겠다.
나는 무슨 완장을 고를까? 난 희생의 완장과 사랑의 완장을 모두 고르고 싶다.
여기서는 욕심을 내도 괜찮지 않을까? 너무 욕심을 내서 실천을 못하더라도 좋다. 마음을 먹었다는 게 중요하고, 실천 하려는 의지가 더욱 가상하니!
모두가 욕심쟁이가 되는 것도 볼만 하겠다.
온 세상이 질서정연하고 사랑이 넘친다면 이게 바로 천국이 아닌가?
하도 답답한 마음에 나의 이상향을 그려 봤다. 나도 정치인을 벌써 닮았나 보다.
현실에서 이상을 넘보고 있으니 이 또한 코미디언 아닌가?
수백억의 자금을 은닉해 놓고도 29만원 밖에 없다는 그런 코미디언 보다는 한참 뒤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씁쓸하다.